진실은 때때로 잔인하다.
믿음의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다.
그 잔혹함은 믿음의 정도에 따라 궤를 달리한다.
세상이 파멸한 뒤엔, 신을 부정한 사제와 성기사들이 자결하는 것이 일상일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확신할 수 있다.
“...단장님, 단장님이 말씀하시죠...?”
지금만큼 진실이 잔인하지는 않을 거라고.
크리스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기사단장인 마르켄에게 복화술을 하듯 입술의 움직임을 최소화시켜 신호를 보냈다.
본인이 대악당이라 생각하는 저 안쓰러운 남자를 위해서라도 빨리 말하는 편이 서로에게 안전했다.
“...지금은 가주인 네가 나서는 편이...”
하지만 마르켄도 말하기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마르켄도 원로원에게 악감정이 있었고, 직접 죽인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크...크리스 네가 말해라. 예전에 스승이기도 하고, 서로 잘 통할 것 같은데...”
가주인 글라디오조차 이에 대해서는 직접 말하고 싶지 않았다. 원로회를 영구 동결시킨 것은 가주인 본인이었다.
그런 본인이 말하는 것보다는 레오를 라인하르트에 데려오고, 회귀 전에는 스승 역할까지 자처한 크리스가 맡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성격조차 기묘하리만치 비슷하지 않은가.
“...죄...죄송합니다... 가주님... 하지만...”
“...지..지금 우는 건가...?!”
가주의 부탁을 듣기 전부터 크리스는 킬킬대는 레오를 보며 굵직한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는 게 아닙니다... 단지 마음의 상처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뿐이죠...”
흑암의 감성에서는 도저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광기에 젖었음에도 자신의 복수를 끝맞히고 하는 위악자의 정의는 흑암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도 남았다.
“...제가 해볼까...”
“넌 나서지 마라. 리오스.”
자신의 아들일지라도 저 순애 광신도에게는 설명과 설득을 맡길 수 없었다.
오히려 악화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아리아가...”
파악...!
나이프가 벽면으로 날아가 꽂혔다. 자리는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시리카의 머리카락에 스쳤다.
“미안하게 됐어. 내가 헛소리를 많이 싫어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헛소리를 제일 많이 한 레오는 그리 말했다.
“작전 회의는 이따가 해. 댁들의 우둔함을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거든.”
[...너만 하겠냐?]
보다 못한 현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저러다 진짜 기억 돌아오면 자살할 것 같아서 내린 스승으로서의 결심이자 결단이었다.
[잘 들어. 원로원은 이미...]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듣지도 않은 채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가슴팍에 다시 다섯 손가락을 꽂아넣었다. 피가 흘러내리며 손에서 검은 신성이 흘러넘쳤다.
[...으그그...극... 이 배은망덕한 새끼...!]
“그런 말 많이 들어. 맞는 표현인지는 몰라도.”
이윽고 현자의 영체는 그대로 분해되어 레오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기분 나쁘다며 먼지처럼 영체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건 덤이었다.
그게 레오 인생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인 줄 모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뭐하는 짓이죠?! 현자를 돌려주세요!!}
“...설마 사랑하는 사이야? 나이 차이가 범죄적인데?”
물론 레오가 생각하는 피해자와 가해자 방향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광기가 흐르는 자리에서 누가 도둑놈이고, 도둑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낭만입니다!}
“뭔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두 분 다!”
두 광인들의 지랄에 보다 못한 루미네가 수치스러운 분노에 소리쳤다.
평소 고상한 예절을 고수하던 그로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 법한 일갈이었다.
“오, 루미네 화내는 건 오랜만에 보네. 그러고 보니 너한텐 빚이 있었지.”
광기는 전혀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레오는 떠오른 낡은 악몽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선 그들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빚이라니...”
“날 치료해준 빚 말이야. 돈도 안 받고 팔 다리 꼬박꼬박 치료해준 거.”
분명 감사한 은혜에 대한 보답처럼 말했지만, 그 자리에 누구도 그런 의도로 레오가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팔과 다리가 잘려서 가만히 두면 영면에 들 수 있었음에도, 죽고 싶어서 마경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넌 어떻게든 날 살렸지.”
그 역설적인 발언에 루미네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부정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기이하다고는 생각했었다.
레오나르도가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 단지 ‘금제’나 ‘전투력’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미네가 직접 치료해줬다면 이야기에 신빙성은 더해진다. 치료만 가능하다면 레오가 아무리 자신의 몸을 혹사해도 재기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이교도를 치료하지 말라고 해도, 그럴 바에는 자신들을 치료해달라 애원해도 넌 날 살렸어.”
말에는 저주가 섞였다. 내용을 듣자 라인하르트 일가도 고개를 숙였고, 루미네와 앤젤라마저 엄숙하게 레오의 시선을 피했다.
“꿈에서 깨고 싶어도 그 악몽으로 어떻게든 끄집어올렸지. 정말 은혜로운 일이야. 안 그래?”
볼 자격조차 없다는 죄악감을 그들을 종속했다. 레오의 증오는 피해지는 그들의 시선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복수하고 싶은 겁니까?}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보였어? 천사 아가씨.”
레오나르도는 또다시 과장된 웃음을 선보이며 앤젤라와 루미네를 연거푸 돌아보았다.
루미네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냐 물었을 때가 겹쳐 보여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설명해주는 거야.”
레오의 웃음은 잘리듯 끊어졌다.
마치 다른 표정의 가면을 쓴 것처럼도 보였다.
“루미네, 네가 라인하르트가 아니라고 해도 죽일 이유는 충분히 있다고. 언제 멱이 따여도 이상할 건 없다는 거지.”
억울하다 생각될 수는 있었지만 일행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십년이고 해묵은 증오는 변호나 반론을 존재 자체로 뭉개버렸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보자고 시체 제군들!”
이내 다시 밝은 기운으로 돌아온 레오나르도는 그리 인사하며 방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자...잠시만...! 레, 레이널드!”
“오, 그래도 학습은 했구나. 칭찬해줄게. 천재 용사.”
이름을 정정해 부른 칭찬의 의미일까,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아리아의 손길을 바로 내치지 않았다.
“...간다니? 지금 갑자기 왜...!”
“아니, 취소해야겠네.”
파악, 거친 팔의 움직임은 아리아스필의 손을 떨쳐내었다.
“...천재치고는 아주 덜떨어진 질문을 하잖아.”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붉은 피가 흰 머리를 적시고 있음에도 아리아는 레오를 밀어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사랑이라면 사랑이었고.
집착이라면 집착으로도 보였다.
“넌 선전포고한 적이 한 집에서 그대로 목욕도 하고, 한 침대에 잠들 거라고 생각해?”
물론 레오나르도는 이 감정을 증오라 일축할 테지만 말이다.
실제로 지금 레오의 감정은 증오로 해석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건...”
“잘 들어. 이 우둔한 천재야.”
머릿결을 쓰다듬는 레오의 손길이 거칠어진다.
“내가 널 지금 죽이지 않는 건, 옛정이나 자비 따위가 아니야.”
레오의 손이 아리아의 머리채를 쥐여잡는다. 아리아는 반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기를 들려고 하는 가족들에게 살기를 죽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내가 직접 너에게 안겨줄 거니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레오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집안, 재산, 가족까지... 하나하나 차례로 앗아갈 거야.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머리채가 쥐어진 채로도 아리아는 기죽지 않은 채로 질문했다.
“모든 걸 가진 용사에게 상실을 안겨질 수 있겠지.”
자신이 느꼈던 상실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게 자신에게는 최선의 복수가 될 테니까.
“원로원주를 몰살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증명이다. 라인하르트의 같잖은 전통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내 손으로 증명하고 싶거든.”
상황이 꼬여있기는 했으나 그건 저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 다음으로 네 친구, 가족, 그리고 연인이 있다면 연인마저도 죽여주지. 지킬 수 있으면 지켜봐. 나도 기대하는 바...”
“어... 레이널드 씨.”
장황한 독설과 연설이 이어지는 사이, 리오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 라인하르트 학살자...라고 불러야 되나요?”
“...아, 형님. 우리 자랑스러운 순애의 수호자님.”
레오는 아리아의 머리를 집어던진 채로 리오스를 바라보았다. 그 살기에 리오스는 오금이 저려오고 식은땀이 흘려내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순애라고 지랄하기 전에, 순순히 애라도 낳았으면 좋았을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레오의 모욕에도 리오스는 얼굴을 일그려뜨리지 않았다. 실눈과 미소를 유지한 채로 리오스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가장 중요한 설명을 꺼내들었다.
“그 원로원을 죽이는 게... 증명이라고 하셨죠?”
“그 말대로. 왜? 이 자리에서 막아볼 텐가? 권유하고 싶지는 않은데.”
레오는 이미 이 주변에 함정을 깔아둔 뒤였다. 연극을 하듯 돌아다니며 묻혀둔 혈흔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유의미한 장치, 성혈이라는 이름으로 결계를 형성할 수 있는 성역의 기반이었다.
아마 쓴다면 저들의 체력은 성역에 흡수되어 천천히 탈진될 것이다. 그 사이에 자신은 안전히 탈출하면 그만이었다.
“근데... 죽기 전에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죠오...?”
리오스는 눈을 더 질끈 감으며 폭력을 각오하고 질문했다. 지금 자신의 아우의 태도는 자신조차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푸...”
그 생각대로 레오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다.
“...푸하하하하하...! 그건 생각 못 했네!!”
당황할 줄 알았던 레오나르도는 역으로 즐겁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진심으로 예상 못했기에 낼 수 있는 행복의 웃음이었다.
“그래, 내가 죽이기 전에 죽여버리는 건 생각을 전혀 못했네.”
“...아...그러시구나...”
“가주님, 아주 자식농사를 잘 지었어. 에일린 그 미친년보다도 영악하잖아.”
거침없는 칭찬에도 글라디오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혹시 원로원을 저희가 대신 죽일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레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눈치가 없네. 하긴, 그랬으니까 가문이 그 꼴이 났겠나 싶지만.”
레오 귀에는 리오스가 자신들이 레오가 죽이기 전에 먼저 암살한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그 발상의 역전에 감탄한 것이었고, 인정한 것이었다.
“...그게 그런 게 아니거든요오...?”
“형님, 저희 사이에 숨길 건 없잖아요. 아, 혹시 마차에 태운 사이 사고사라도 할 위장할 생각이었나?”
레오 눈에는 리오스가 협상을 수단을 제대로 마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원로원들은 이미 죽었어요.”
진실은 때때로 잔인하다.
“...예?”
레오나르도는 잠시 당황한 듯 존댓말로 되물었다. 옛 습관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원로원이 없어요. 전원이 몰살당해서.”
“...뭐...뭐... 노환으로 죽었어? 사고사? 아니면... 설마 내가...!”
아까의 살기는 온데간데 없이 얼빠진 모습으로 레오나르도는 리오스를 붙잡으며 캐물었다.
“...그니까... 레오나르도도 죽이긴 했는데, 전적은 아리아하고 할아버지가 대다수여서...”
그 말에 레오의 표정은 삽시간이 요동쳤다.
레오의 안면근육이 그렇게 늘어나는 것을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라인하르트 일가에서 본 레오의 기본 표정은 대부분 부드러운 미소 뿐이었으니까.
“...너희들 제정신이야?! 원로원이 뭔일이 있는진 몰라도 전부 죽여버리면 어떡해! 군사고 경제고, 명예고 그들이 가진 게 얼만데! 생각 없어!?”
놀랍게도 아까까지만 해도 원로원을 죽이자 말한 자칭 라인하르트 학살자가 뱉은 말이었다.
물론 원로회를 몰살한 경험에서 우러나는 말이겠지만, 괴리감이 지나쳐 뭐라 반응하기 어려웠다.
“...그게... 여러 사정 덕분에 동결시켰기도 했고... 무엇보다...”
리오스는 미소가 옅은 입술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마 이 말을 하고 나면 자신은 더럽게 얻어맞을 것이다.
“...전원 흡혈귀가 돼서 죽일 수밖에 없었죠. 아하하...”
“...그걸...”
레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엔 광기는커녕 수치로 완전히 붉게 달아올랐다.
“왜 이제야 말해!!!”
리오스를 꺾듯이 부여잡으며 레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인이는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아직 기억상실의 여파는 해결하기엔 멀고도 험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폭력적인 사랑이여.]
“...후...”
“괜찮나요? 용사님...!”
루미네는 다친 아리아를 붙잡으며 상태를 살폈다. 레오의 손짓은 누가 보아도 난폭하고, 거칠었다.
멍이나 상처가 생겨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괜찮아요. 그리 세게 때리지도 않아서...”
“어머니, 안심할 거짓말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인은 아리아의 몸을 쓸어넘기며 몸상태를 살폈다.
“출혈이나 타박상은 없지만, 어머니의 심박음은 과할 정도로 빠릅니다. 과흥분에 과호흡 상태이기에 입가에서 침도 흘러내리지 않습니까.”
그 설명에 루미네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사랑이란 참 아름답군요. 저런 폭력까지 포옹하다니.]
선배 성인의 보충설명을 들으며 루미네는 생각했다.
이 광기의 소굴에서 믿을 이는 아인밖에 없다고.
***
최근에 나무위키를 보고 있는데 '2인자는 회귀했다' 문서를 봤습니다.
근데 후기에 대한 설명 중에 '이 정도면 작가의 머리속이 궁금해지는 수준'은 좀 너무하군요.
갱신을 안 하면... 후기 더 안 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