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 현자의 돌은 본래라면 지식의 형태로서만 존재하는 ‘서고’의 역할을 했어야 마땅했다.
성격이나 자아는 본래 상정치 못한 예상의 오류.
그렇기에 모습 또한 본래는 노인의 형상이 아니었다.
“...그럼 그게...”
[그래, 원래 이 모습이 기본 설정이야.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중년으로 하는 건데...]
작은 소년은 열받는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 모습은 후계로 선택한 이가 최대한 반감을 가지지 않고, 적대적인 태도를 줄이기 위한 아바타.
동시에 자신의 유년기의 모습을 그대로 형상화시킨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엔 그 주름이 깊은 마법사 노인네와는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앙증맞았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319년 만인가요~?}
그런 까칠한 현자의 모습이 정말로 기뻤는지 미소를 생글거리며 어린 현자를 내려보았다.
[쪼개지 마라. 레오 대가리 고치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하죠? 기껏 젊은 몸이 됐는데. 옛추억도 되새기고 좋지 않습니까.}
[그래, 되새김질하다 못해 토까지 나오겠다.]
{크흡...}
앤젤라는 현자의 말은 깔끔히 무시한 채로 그의 얼굴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저 귀엽기 짝이 없는 얼굴로 듣는 매도라면 오히려 축복에 기도까지 해주면서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우적...! 거 복잡미묘한 개소리는 이따가 합시다. 밥맛 떨어지네.”
[넌 어째 젊어지니까 더 싸가지가 없다?]
우적거리며 각종 요리를 게걸스레 먹어 치워대 는 레오는 큼직한 고기의 뼈로 현자의 미간을 가리켰다.
“댁만 하겠수?”
그 조롱에 현자의 눈이 도끼처럼 휘었다.
안 그래도 갖은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는데, 제자라는 놈은 기억상실인 채로 밥이나 처먹고 있었다.
[...그래서, 난 기억하냐?]
“...글쎄올시다. 이런 인간은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남는 법인데.”
[아주 그냥 쌍욕을 해라.]
“그건 너무 아동학대 같아서.”
냅킨으로 닦는 레오의 입에는 웃음이 드러났다.
분명한 비웃음, 현자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깔보는 조소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네.]
“후릅... 꿀꺽...!”
[사람 말하는데 좀 작작 처먹어!]
현자의 짜증에도 레오는 그릇에 남은 스프를 박박 긁어먹었다.
“인정머리가 없네. 애늙은이. 댁들이 어땠는지 몰라도 난 4시간 전만 해도 전쟁터에 있었어.”
혀를 끌끌대며 레오는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10인분은 족히 되는 식사는 10분만에 먹어치웠다.
“근데 갑자기 이런 데에 떨어져서는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순수한 50대의 기분은 생각해봤어?”
여유가 있는 목소리였지만, 말내용에 있는 기반에는 증오가 서려있었다.
그 대상에는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도 엄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 힘들다고 남한테 예절에 밥 말아 먹는 건 볼썽사나워서.]
“...확실히 그건 맞지. 애늙은이여서 그런 지 조기교육을 잘 받았네.”
그 조롱에 현자는 레오에게 다시 장기를 보여주는 고문을 할까 진심으로 갈등했다.
“그럼 본제로 돌아와서 설명을 좀 하라고. 내가 내 심장 주물럭댄 값은 받아야겠거든.”
하지만 레오의 말에 현자는 화를 삭힐 수밖에 없었다.
저 상태에서 흥분해봤자 시간만 낭비될 뿐이었다.
[...네가 기억이 없어진 거부터?]
“...설명할 수 있어요...?”
[원인 정도는. 그보다 대놓고 보이기도 하고.]
작아진 몸으로 현자는 아리아와 레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설명 안 했나 보군.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
“...설명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게 현자의 지혜인가?”
제자였고, 제자가 될 터였던 레오의 시비에도 현자의 눈엔 애석함이 깃들어 있었다.
현자의 독백을 이해한 사람은 많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검은 신성에 대해 조사하던 성자인 루미네와 앤젤라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정말 그것이라면...”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시선 속에서 현자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침묵 속에서 감정이 가다듬어지자 현자는 천천히 추측과 사실을 설명했다.
[검은 신성은 불안정하고 검증되지 않은 마나야. 마기의 성질도, 신성의 성질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
불가능하다 말하고 싶지만, 레오에게 피어오르는 검은 신성은 상식을 부정했다.
[그리고 마기의 성질 중 하나는 인간을 마인의 형태로 변모시키는 거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걸 지긋지긋하다 말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제하드, 점토사도, 적탑주마저도.
마인과 흑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다. 외형이 변하거나, 설사 인간형을 유지해도 내부 구조가 변모한다.
현자의 설명에 이해가 빠른 이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갔다.
[레오, 넌 인간에서 변태한 거야.]
“...갑자기 성희롱을 해도 곤란한데.”
그 질나쁜 농담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싸늘한 정적을 내었다.
저 레오가 정말로 소탑주라 불리고, 용사의 마법 기사라 불린 레오와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 변태 말고 빡대가리 새끼야! 생물의 성장 형태의 변태 말이야!]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의 무식한 모욕은 현자에게 신경질적인 짜증을 선사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레오는 즐겁다는 듯 입꼬리는 높게 올렸다.
“...그럼 난 마인인가? 그건 좀 싫은데.”
[아니, 마인은 아니야. 종류에 따라 기억상실을 동반하는 것도 있지만, 마인이라고 하기엔...]
현자는 확신 없는 눈치로 레오의 몸을 살폈다. 겉으로는 봐선 전혀 마인이 아니었지만, 내장이나 기타 상태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예전에 했던 검사와 지금 상태와 일치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만약 변태 성공한 거라면...]
말에 뜸을 들이며 현자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 가설을 말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고역이었다.
차라리 레오가 미리 말했다면 한결 수월했을 터였지만, 현자도 알고 있다.
자신이 레오라도 쉽게 말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것을.
[...그럴 경우, 기억은 되찾지 못해.]
설명은 그대로 끝났다.
그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이해되었다.
일체 희망은 없는 현실.
명백한 절망이었다.
“...그런... 하필 지금...”
“...이건...이거는 안 되는...데...”
“...잔혹해... 이건 너무... 잔악하잖나...”
이내 사람들의 시선은 아리아와 레오에게로 향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충격이 클 이는 단연 둘이라 말할 수 있었다.
“...바...방법이...”
아리아의 동공에는 균열이라도 인 듯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한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방법이 전혀 없나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런 건 죽음 이상으로 가혹했다.
자신에게서 경멸과 혐오를 드러내던 용사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리는 건 어째서일까.
“...마법으로... 아니면... 신성술이라도 방법이 있다면...”
자신을 맹렬히 증오하던 루벤이 어째서 자신을 살렸는지 납득되었다.
“...레오 기억을...”
저 레오를 보여주기 위해 용사는 자신을 살린 것이다. 자신에게 죽음보다 더한 벌을 주기 위해 자신의 심장에 성검을 꽂아넣었다.
“...제발...! 뭐든 할 테니까...!
아리아는 절박히 현자와 성인에게 애원했다.
레오의 기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도 좋았다.
검은 신성에 물들여 죽어도 좋았다.
하지만 레오만큼은...
[방법이...]
“큭...”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조소가 울렸다.
무력감에 자조하던 이들도, 절망감에 침묵을 택한 이마저.
그 경박한 조소에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웃음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다들 냉기가 척추를 타고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크하하하하하...! 하핫...! 아하하하하...!!”
레오였다.
레오나르도의 조소였다.
“하하...! 하... 이건 걸작인데...!”
자신의 기억이 소멸했음에도 레오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유쾌한 웃음을 내질렀다.
“...레오나르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레오의 감정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루미네는 성자의 직책마저 잊어버린 채로 그리 물었다.
레오는 웃음에 배가 아팠는지 연신 끅끅대며 눈가에 나온 눈물을 슬며시 닦아내었다.
“안 웃고는 못 배기지.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또 어딨겠어?”
백발의 레오는 차갑게 미쳐있었다.
“보아하니 너희 셋은 이걸 알던 눈치인데, 정황으로 봐선 나도 알고 있던 것 같고?”
레오의 말에 꾸짖으려던 루미네도, 현자와 성녀마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기억은 잃어도 레오는 레오였다.
“아, 대답은 안 들어도 알겠어. 표정이 채점해주네.”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지금이 현실이라는 인정하고, 지금 말한 내용의 베일마저 들추어냈다.
“그러니까 안 웃기고 배기겠어? 그렇게 착하디 착한 미래의 내가 아리아스필을 감쪽같이 속여넘기다니 말이야.”
그래서 절망이 웃겼고, 침묵에 웃었다.
“...속이다니...?”
“속였지. 아주 완벽하게 사기를 쳤어.”
아리아의 눈에는 절망감이 깃들었다.
그 눈에 비친 것은 조소를 내는 자신의 기사였던 남자였다.
“아마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언질 한번 안 해줬을 테지. 여태까지 함께 했던 추억, 우정... 모든 기억이 잿더미가 될 텐데도 말이지.”
“...아니야...”
하지만 레오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을 속삭였다.
“그런 것치곤 안색이 새파란데, 내 자신이 이렇게까지 역겨운 건 오랜만이야.”
작위적으로 보일 만큼 무리하게 사랑을 전하고자 했다.
“...아니라고...”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너와 있던 시간은 나에게 있어 위선과 자기만족이었을 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널 이용한 거야. 자존감을 채우는 존재였을 뿐이었지.”
더 들은다면...
“그 증거로 너에겐 가장 중요한 진실도...”
퍼억...!
컵이 레오의 얼굴에 직격했다. 손으로 잡지 않았더라면 유리잔이 깨져 얼굴에 박혔을 것이다.
“이거... 손이 미끄러지셨나? 집행기사단장?”
마르켄이 집어던진 유리잔이었다.
“정신 차려라. 레오나르도.”
마르켄에게 흐르는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냐! 네가 그럴 인물이 아니...!”
절망감이었다. 저렇게 변할 수밖에 없던 레오를 멈추고 싶었다.
“아니, 내가 가장 잘 알아.”
카작, 레오의 손에 쥐어진 유리잔이 균열이 생겼다. 파편이 박히며 손에 피가 흘러내린다.
“알다 못해 모르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 이미 미쳤는데도 말이야.”
그리고 유리잔이 지면에 내리쳐지며 깨부서진다. 피가 묻은 유리컵이 파편의 형태로 주변에 흩뿌려졌다.
그 사이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에겐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군.”
레오나르도는 피투성이인 손으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렸다.
“지금 난 레이널드 그레이브, 주로 어둑시니라는 낯부끄러운 호칭으로 불리지만... 당신들에게는 제일 적절한 명칭이라는 이거일 테지.”
어둑시니는 손아귀에 피를 터뜨렸다. 검은 신성이 피에 성혈로서 흘러내렸다.
“라인하르트 학살자, 단신으로 라인하르트의 혈족들을 일일이 쳐죽인 미치광이.”
이윽고 그의 손에는 어느샌가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그저 고기를 써는 식기였지만 그럼에도 그 칼자루는 위협적으로 날을 빛냈다.
“그 이름값에 따라 예고하지.”
레오나르도의 나이프는 피에 머금어져 붉게 물들었다.
“난 내일 자정까지 라인하르트 현 원로원주을 죽일 거다.”
그 예고에 긴박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죽인 다음에는 그 아래 항렬을 노리도록 하지. 계속해서 아랫쪽을 노릴 거야.”
모두가 당황했다.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이자 라인하르트 학살자는 유쾌한 목소리로 운율있게 광기를 선보였다.
“...?”
“아~ 왜 그 뒷방의 늙은이를 죽이냐는 표정이네?”
아니었다.
“시기로 봐선... 곧 있으면 원로원은 내 심기에 아주 거슬리는 짓을 할 거다. 다르게 말하면 안타깝게도 아직은 무죄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내 친히 한명 한명 그 주름진 호박통을 날리려 갈 거야. 물론 막는 건 너희 자유야. 다만 나를 죽이지 않고 생포하면...”
어둑시니는 자신의 목에 핏자국을 그렸다. 마치 절취선처럼 곡선으로 깔끔하게 단두의 형상을 그려내었다.
“난 자결하도록 하지. 거추장스럽게 목으로 그네 만들지 않아도 죽는 건 일도 아니거든.”
레오는 시리카를 응시하며 홀로 고개를 끄덕했다.
이는 싸늘한 기류는 완벽한 진미였다.
“그 경우에는 저 현자라는 작자도 길동무로 데려가겠어. 심장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자결할 테니 그 요술 돌멩이가 남지도 않을 거야.”
현자는 얼굴을 낮게 숙인 채로 한숨을 내쉬기 바빴다. 그에게도 죄는 있었다.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온 죄, 자신에게만큼은 심판할 자격이 있었다.
“용사님한테는 좀 어려운 문제겠네. 대의를 위해 타락한 옛 동료를 죽이겠는가? 아니면 사욕을 위해 타락할 현 상관을 죽이겠는가?”
“.........”
마치 딜레마를 연상케하는 질문에 레오는 마음의 포만감을 느꼈다.
이건 영웅으로서의 시험, 동시에 한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아리아 사후에 용사를 자칭한 이는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런 시험 앞에서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게 영웅의 본질이자 허울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 나는 적어도 네가 아는 레오나르도가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쓰레기 같은 본질은 같지.”
차마 다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분명 아까 내가 목표랬지? 우연이네. 나도 그렇거든.”
레오는 나이프를 아리아의 가슴을 향해 겨누었다.
“내 목표는 용사 아리아스필 너다.”
용사의 파멸, 용사가 무의미한 세상을 만들 것이다.
“유예를 줬으니 그동안 목 씻고 기다려. 마왕 따위한테 뺏길 바에는 내 손으로 직접 부셔버리는 게 낫거든.”
레오나르도는 광소를 연이어 터뜨렸다.
"그럼 대답을 기대할게. 라이벌."
그런 미친 놈을 보며 현자는 작게 루미네에게 작게 속삭여 물었다.
[...너희 원로원 다 죽인 거 얘기 안 했어?]
“...예... 말씀드릴 겨를도 없어서....”
회귀했다는 사실 외에 세부 설명을 하지 못했다. 레오를 납득시키는데에만 해도 목숨을 걸었어야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런 구차한 변명에 현자는 차게 식은 눈으로 짧게 매도했다.
[이런 말할 자격은 없는데, 너흰 진짜 악마야.]
“...지금이라도 말하면...”
[지금 자살하라고?]
차마 부정 못하는 루미네였다.
근데도 리오스는 말했다.
이후 그가 말하기를 순애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으니.
[누가 순애를 피폐하게 만들거늘, 피폐로 순애해라. 이것이 피폐순애이니라.]
자신은 매우 맞는 복음에 따랐을 뿐이었고, 고로 매우 맞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고자 레오나르도: 폭풍을 부르는 대혼돈의 멀티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