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주
각 분야를 관할하는 마탑의 수장.
마법사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층.
마법사의 자긍심이 위치한 곳.
“설명하게. 적탑주.”
그런 위치에 있는 청탑주였기에, 블루아는 동료였던 적탑주의 배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어째서 마탑주인 자네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배신에는 상식적으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 집단이 크면 클수록, 몸을 담근 시간이 길면 길수록.
배신을 한 이유는 그에 맞게 클 수밖에 없었다.
“제인, 네가 한 짓이 지금 무슨 일을 일으킬 지 알기나 해?”
제인과 친분이 있던 아스피 일리난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탑의 색은 다를지언정 같은 마법사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이건 그저 널 처벌하는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야.”
마법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도, 마법을 대하는 무게는 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따르는 학생들은 함께 배신자로서 처벌을 받을 거야.”
그중에 무고한 이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대적인 책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너 하나 때문에 300년이 넘은 적탑 자체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고!”
적탑주의 비리는 여타 다른 마탑을 견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의 문제였다.
전투를 담당하는 적탑의 뿌리가 쓰러지면 아예 마탑의 균형이 어그러질 것이다.
황실은 물론, 각종의 단체에서는 마탑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고, 마탑 자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불신을 살 것이다.
“...그래. 세 번이나 넘게 물어봤으니 대답하는게 예의겠지.”
질린 듯한 어투, 같은 질문을 여러번 듣는 게 귀찮아서 대답한다는 듯한 태도.
죄악감은커녕 죄에 대한 선조차 없는 듯한 태도로 적탑주는 입을 열었다.
“...마탑이 멸망한다 했나?”
그 정도 사실이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미래에는 그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적탑주는 당당했다.
있을지도 모른다 말했지만, 그녀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난 힘과 비전이 있는 쪽에 맡겼을 뿐이야.”
그런 설명에 아메리에게 부축받으며 나가는 리오스에게는 지나치게 걸렸다.
‘...그게 무슨...’
그건 마치
‘...아우가 겪은 미래 같잖아...’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는 듯한 발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리오스!! 얼른...!!”
하지만 대화를 곱씹을 여유는 있지도 않았다. 아메리는 치료를 위해 리오스를 들쳐업고 달리고 있었다.
이제 4명의 마탑주의 격전에 이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조롱조의 말과 달리 적탑주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남은 예비본은 이것 뿐이지.’
남겨둔 여유본은 세 체.
아무리 흡혈귀에게 습득한 기술로 육체의 복제와 영혼의 접속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지금 다른 마탑주 앞에 있는 지금 하나 뿐.
몸은 용사 아리아스필과 레오나르도에게 완전히 도륙이 났다.
게다가 문제는 육체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다가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일부러 심장만 빼내었군.’
자폭을 택한 것은 단순히 폭발력을 높이기 위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시체를 깔끔히 제거하기 위해 육체의 폭발을 선택한 것.
마나가 없는 실험품이 남은 실수를 두 번 범하지 않기 위해 안전책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예상치 못한 도살로 인해 그 안전책은 완전히 깨부숴졌다.
‘...영악한 놈...’
시체가 남으면 당연하게도 본인을 추격할 방법은 존재했다. 흑탑주와 백탑주 또한 이런 추적에는 적격인 인물.
하물며 마탑 전체가 자신을 노리는 것도 고려하면 지속적으로 추적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콰아아아아아...!
재해처럼 보이는 마법사들의 대마법.
청탑주의 지형 조작 마법, 주변 지형은 건들자마자 재구축되며 적탑주를 옥죄었고,
백탑주가 사용하는 정령술의 보조는 화염의 폭발을 전부 상쇄해냈으며,
흑탑주가 사용하는 그림자의 복제술은 순식간에 화포를 주조해 발사해내고 있었다.
적탑주가 버틸 수 있는 까닭은 그녀가 전투에 전반적으로 유리한 마법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일 뿐.
수적으로나, 역량으로나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마탑 측엔 지원은 몰려들고 있었고, 시간이 더 늦는다면 용사와 레오나르도마저 지원으로 올 것이다.
패배는 시간 문제였다.
[보아하니 곤란한 것 같군.]
그 목소리는 마탑에서 울린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자신이 따로 만든 지하 방공호.
마탑은 물론 흡혈귀들의 근거지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원래 몸을 ‘보관’하고 있던 장소에 그 존재는 나타났다.
각종 방호 마법과 함정에는 일체의 작동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그는 태연히 그녀의 앞에 있었다.
[놀랄 여유는 있나?]
그 존재는 조용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안위를 질문했다.
그 상황을 보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그 존재는 위기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곳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하...”
그 경악을 적탑주는 탄식으로나마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저 존재와 대면했을 때도 분명 같은 감정이었다.
본능적으로 굴복하게 되는 감정.
왕족이나 귀족에게 느끼는 압력과는 다른 무게의 압력, 흡사 갓 태어난 토끼가 사자의 입에 나뒹굴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힘, 미지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저 존재에게선 쾌락이 느껴졌다.
[적절한 힘이 필요하다면.]
위험한 달콤함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의 지식을 한낱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그 존재에게 필요했던 것은 ‘적탑주’가 아닌, 자신의 지식을 이해할 두뇌와 장비를 맡아줄 적당한 이였을 정도니까.
적탑은 본디 마법의 힘을 숭상하는 마탑.
어쩌면 그 존재의 명령에 따른 것도 그 힘에 매혹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알고 있겠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바치겠습니다.”
그녀는 악마에게 영혼을 넘겼다.
대가로는 끝없이 타오르는 업화가 지펴졌다.
***
전투의 전반적인 흐름을 잡은 것은 청탑주였다.
적탑주보다는 못했지만, 전투 마법에 한해서는 일가견과 경험이 풍부한 그였기에 나온 결과.
더군다나 지금 두 마탑주에게 동시에 조력을 받고 있다.
백탑주는 정령술로서 전황 조성과 전체적인 버프를, 흑탑주는 그림자로 화기를 제조해 적탑주의 화력을 상쇄해냈다.
“...다 끝났네.”
콰드드드득...!
지면의 암석이 뱀처럼 꽈리를 틀며 적탑주의 몸을 포박했다. 어차피 죽여봐야 살해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암석의 몸체에서는 뿌리가 생성되며 적탑주의 몸체에 파고 들었다. 혹여나 자폭에 대비해 체내의 마법과 마나를 흐트릴 방책이었다.
흑탑주는 마나를 아끼며 대기 중이었다. 적탑주에게 추가적인 지원이나 수단이 있다면, 그의 고유 마법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 끝났다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적탑주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지었다.
“...이제 시작이지.”
보랏빛 불꽃이 그녀의 몸을 뒤덮는다.
“...마기...!?”
그 자리에 있는 마탑주들은 당황해버렸다.
지금도 마나는 흡수 중이었고,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에게서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통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마기를 받아드리지 않았다고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녀는 지금 전투에서 단 한번도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불꽃은 무엇인가?
여태껏 적탑주가 썼던 마법과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형상이었다.
독극물처럼 흘러넘치는 마기의 연기가 그 사실은 검증시켜주었다.
“...정도껏 해라...!!”
적탑주의 발악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청탑주는 암석의 압력을 늘렸다. 꽈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암석이 적탑주의 몸을 조인다.
퍽석, 살점이 터지며 뼈가 뒤틀린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건장한 마인이라 할지라도 즉사할 압력.
화르르륵...!
하지만 그런 치명상에도 화마는 굳건하다.
“...제인...!! 정말...!”
그 다음에 나선 것은 백탑주였다.
바람의 정령으로 아예 주변에 붙은 검은 불꽃을 둘러싸 진공 상태를 만들었다. 어설프게 물의 정령으로 상쇄해서야 화력으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적탑주가 죽지 않는다 할지언정 진공 상태에서는 생명체도, 화염도 유지될 수 없었다.
치이이익...
그럼에도 화마는 잠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공에서도 화염은 사그라들지 않고 주변에 퍼지고 있었다.
“...화염이...!”
고작 옷깃에 살짝 닿기만 한 불꽃도 큰불로 번져나갔다. 빙결계 마법을 아무리 사용해도 자색의 불은 사그라들 기미를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그 위험에 마탑주들은 당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황은 실수의 근본이었다.
코오오오...!
고열의 열기가 이동하는 음색, 암석에 육체가 찌부러지고 있음에도 열기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염 자체는 암석 틈에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색의 빛은 틈 사이로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현상을 제일 먼저 이해한 것은 흑탑주였다.
“엎드려!! 폭...!”
이미 늦었다.
___
______
_________
뇌운에 낙뢰가 떨어지는 듯한 굉음.
자폭보다도 대규모의 폭발이 타오른다.
폭발이 마탑 전체를 날려버리지 않은 것은 위기에 위기에 대비한 흑탑주가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
프로젝션의 그림자 자체가 배리어를 형성해 폭발 범위를 최소화시켰기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켈록...”
하지만 지근거리에 있던 마탑주, 특히나 흑탑주는 완전히 자색 불꽃에 집어삼켜졌다.
다른 마탑주와 건물 전체의 보호에 집중했기에 흑탑주 자신의 몸은 화염에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저 보랏빛 마염(魔炎)이 마탑 바깥으로 나가 퍼졌더라면 아마 마탑 전체 학생이 몰살될지도 몰랐으니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켈록...”
어차피 자신은 죽을 목숨이었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부상 때문이 아닌, 고질적인 지병에서 나오는 각혈이었다.
본디 체질이 병약했기에 생긴 문제.
수명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있었다.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마탑주로서의 능력과 지위로 회복과 약재를 마련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체질에 이 화염까지 닿았다는 시점에서 자신의 명은 여기서 다한 것이었다.
“...흑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레오나르도의 얼굴.
“흑탑주님...!”
창이 옆쪽에 꽂혀있는 걸로 보아 투창에 블링크를 걸어 무모하게 이동한 것으로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마라. 레오...”
이 불꽃은 점화의 현상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닿기라도 한다면 전염병처럼 몸을 타고 올라가 망가뜨릴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오나르도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물들고 있었다. 그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마저 아른거리니 그 모습은 퍽 감동적이었다.
“...어차피 난 죽어. 이런 때에 유언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지.”
눈물은 건조한 안구와 화염의 열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흑탑주는 눈물이 흐른다 착각이 들었다.
“...알고 있나? 이 옆에 강단이 자네와 처음 만났을 때인데...”
첫만남에선 마탑의 강단에서 당돌히 강의를 하는 소년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자신과 닮은 머릿결과 눈동자를 지녀서만이 아닌, 자료를 보았을 때 자신과 같은 고아에서 시작해 스스로 성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게 아니라...!”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군. 자네가 찾아준 현자의 유산들은 실로 감사했네. 덕분에... 마법사로서 가진 첫 소원을 이룰 수 있었어...”
고아였던 자신이 마법사의 꿈을 찾게 된 것은 현자의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으레 용사에 동경했을 때, 베르난은 현자라는 이의 지혜에 동경하게 되었다.
어쩌면 흑탑주라는 직책에 오른 것도 마탑에 숨겨졌다 말한 현자의 유산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게도 말을 오래 할 수가 없군...”
흑탑주가 짓고 있던 미소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제 갈 때였다.
“...흑탑주의 후계는 아메리 에스프에게 맡기지. 자네도 알다시피... 유능한 학생이니까... 필요한 교육은 끝마친 상태일세...”
이윽고 흑탑주는 눈을 감았다.
“[눈 감으면 후회할걸?]”
레오나르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노인의 목소리, 점잖다기 보다는 제법 경박한 축에 속하는 가벼운 어투였다.
“...누구신...지...”
눈을 떴을 때에는 레오나르도만이 그 자리에 서있지 않았다. 사람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대검 형태의 판넬들이 공중에 부상해있었다.
“[흑탑주로서 사명을 다한 이의 공을 치하고자 온 대마법사.]”
검은 판넬에서는 노인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윽고 마치 벌처럼 교차하며 비행한 그 비행물체는 하나의 마법진을 이루고 있었다.
“...몸이...”
흑탑주의 몸을 타고 있던 자색의 불꽃은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열기가 없어지자 어설프게 떠지던 눈이 제대로 뜨였다.
“...당신은 도대체...”
판넬 너머로 한 노인의 유령이 아른거렸다. 사경에 보이는 환각인지는 몰라도 베르난은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마법사가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마탑 기강 좀 잡으러 온 노인네기도 하고.]”
현자가 마탑에 강림했다.
“...흑탑주님, 되도록 버텨주세요.”
레오나르도는 싱긋 웃으며 검은 업화를 향해 다가갔다.
“흑탑주님은 제 결혼식에 오셨으면 좋겠거든요.”
레오나르도의 말을 끝으로 이번에는 공중에서 성검의 빛이 광명했다.
“...겨...결혼식...!?”
“마탑 내 부상자 치료는 끝났나보네요.”
와이번을 타고 내려온 자신의 신부를 보며 레오나르도는 태연히 질문했다.
“...어어...?! 에일린이 보조해서 빨리 끝났어.”
“...자,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
레오나르도의 흑색 장검이 거대한 화마를 겨누었고, 그에 따라 아리아의 백색 성검도 교차하여 한쌍을 이루어 검날을 빛냈다.
“...으응...! 여, 여보..."
현자는 저 둘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곱씹었다.
"[왜 내가 멋있어야할 타이밍에 왜 너희들이 꽁냥거리냐?]"
물론 대답한 이는 없었다.
흑탑주만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 공지 없이 9일 동안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건강적인 문제로 받은 여러 충격이 제법 오래 지속되어 연재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게 되더군요.
간 자체에 큰 질병이나 심장 쪽에 합병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 수치에 3배 이상이 찍힌 것은 나름 충격 아닌 충격이었습니다.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정신에 큰 데미지가 오게 되더군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감사합니다. 차두리 씨. 덕분에 정신이 조금 편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