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폭발에 정신을 차리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기 레오...”
아리아는 물리적인 검은 돌의 보호막에 둘러싸여 기묘한 자세가 되어있었다. 레오를 받아 안은 채로 달렸기에 일어난 해프닝이기도 했다.
“숨을 쉴 수가 없는데...”
아리아스필과 레오나르도는 아예 검은 돌에 밀봉된 채로 서로의 몸을 비비고 있었다.
특히나 레오나르도의 덩치가 아리아보다 컸기에 아리아는 완전히 레오나르도에게 뎦쳐지는 형태로 감싸질 수밖에 없었다.
“...죄...죄송합니다.”
보호막을 해제한 레오나르도는 급히 아리아에게서 떨어졌다. 아직 위기 상황인데 이렇게 흐트러져서야 전투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괘...괜찮아.”
아리아스필은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아까의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되새겼다.
상황이 아직 위험한 것은 맞았지만, 자신의 본능은 한시라도 빨리 그 감각을 되새기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 무슨 생각이야...! 이런 상황에선 집중해야 해.’
아리아스필은 허튼 생각을 바로 잡기 위해 볼을 연신 쳐대었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음습한 욕망은 다시 내면의 심연으로 빨아들여졌다.
“...적탑주는...”
시신 확인을 위해 아리아스필은 적탑주가 있었던 폭발 현장으로 천천히 걸아가보았다.
폭발한 현장에는 폭발한 시체를 찾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만이 눈에 찼다.
누가 보아도 그 자리에는 생명체의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적탑주의 몸은 그대로 자폭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완전히 죽었네. 생포에는 실패했어.”
죽은 것은 아쉬었지만, 아리아스필은 한편으로 안심하기도 했다.
적탑주는 마법사 중에서도 최강이라 명망이 자자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히 쓰러뜨렸으니까.
“우선 보고라도 해놓죠.”
레오나르도는 통신을 위해 텔레파시의 전음을 열어두었다.
현 상황이 전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적탑주가 자폭하고 그 현장에서 자신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으..지...직...주...직...으...]
하지만 통신이 되지는 않았다. 울리는 것은 단순한 잡음 뿐,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방금의 폭발이 원인이었다. 마나의 파장이 폭발의 힘으로 완전히 뒤틀린 것이다.
‘...통신이 안 되는 건 타격이 큰데...’
전투에서 최악의 상황은 군사의 부족도, 물자의 부족도 아니다.
통신의 부재, 정보의 오류로 인해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였다.
그 순간이었을까, 레오나르도의 감각이 한방향을 향해 예리하게 요동쳤다.
휘익
“레오?!”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쏴재낀 화살, 활시위를 꺼내들자마자 발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챙!
하지만 확실히 적중했다. 견제를 위해 빠르게 쏜 만큼 위력은 별 볼일 없었지만, 적에게는 확실히 공격이 전달되었다.
“...이 거리에서 알아챌 줄이야.”
폭발 마법을 준비하던 또다른 적탑주는 그 자리에서 급히 방어 마법으로 화살을 막았어야했다.
“...살아있었어...?!”
아리아스필은 그 상황에서 그렇게 경악했다.
분명 아까의 모습은 서클을 과부하가 될 만큼 회전시켜 자폭을 가동시킨 행색이었다.
하지만 구덩이 위에 있는 적탑주의 모습은 그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 같았다.
“...아뇨. 죽었음에도 나타난 거에요.”
“정답이네. 자네는 역시 유식하군.”
정답에 대한 상이라는 듯, 적탑주는 구덩이를 향해 폭격을 날렸다. 탕진된 마나도 이미 충전된 것처럼 양도, 위력도 방금 이상으로 화력이 폭발했다.
‘...비가 안 내려서 위력이 더 심해.’
아까의 폭발로 하늘이 뚫리고 구름이 헤집어짐으로서 이 부근의 기후는 그에게 유리하게 뒤바뀌었다.
공기의 흐름으로 봐선 다시 에일린과 리오스가 협력한다 해도 이쪽을 향해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꺼내둔 풀고르를 연이어 회전시키며 화염 마법을 막아내었다. 이어지는 것은 연막의 마법, 폭발을 먹고 성장하듯 터진 연막은 크게 부풀어올랐다.
“...레오...! 어떻게 적탑주가...!”
“...저번에 제 어머니 시체가 두 구인 거 보셨죠?”
그 한 마디에 아리아스필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 둘은 분명 복제된 개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의 기억이 이어져 있거나, 원래 어머니가 지닌 기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기억을 지닌 복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럼... 불사신이나....”
그것만으로도 적탑주라는 개체가 살아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우선 지금 마탑으로 가주세요.”
레오나르도는 아공간의 망토를 펄럭이며 아리아를 구덩이 바깥까지 붙잡아 이끌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이 상황을 전달해야해요. 게다가 마탑에도 저 여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그래서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죽어도 예비용이 죽은 것이고, 설사 들켜도 본인은 마탑에 있다는 알리바이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선 레오나르도 네가...!”
“괜찮아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적탑주는 한 명이에요. 그러니...”
콰아아아아앙!
말을 매섭게 끊는 폭발음, 소리에 따라 폭발도 거칠게 연막을 뚫어내었다.
“이제와서 도망인가? 실망이군. 기껏 비밀을 드러낸 의미가 없지 않은가.”
연막을 가르고 나온 적탑주는 양손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을 쥔 채로 다가왔다. 건조한 기류에 걸맞게 화염은 주체못할 열기를 발산했다.
분명 방금보다 강한 상태, 거기에 혼자 싸우는 것은 둘이 협공하는 것보다 몇배는 불리했다.
“...아인아!”
레오나르도는 망토를 펄럭이며 자신의 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버지.”
“마탑까지 엄마 좀 태워다줘! 얼른!”
“알겠습니다.”
아인은 자신의 팔에 와이번의 이빨을 박아넣었다. 이빨의 주인은 최속을 자랑하는 실피드 와이번, 와이번으로 변한 아인은 아리아를 입으로 잡아 등에 태웠다.
“잠깐...! 레오!”
“괜찮아요.”
그 말과 함께 슥,하고는 레오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리아스필도 그 태도에 멍하니 레오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널 이기려고 어떤 단련을 했는지 알잖아?”
그 진솔한 문장에 아리아스필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뻔한 허세였지만, 저 뻔한 허세가 이루지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노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기에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었다.
1초도 안 되는 침묵 속에 아리아가 뱉은 말은 간단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지지마. 특히 여자한테는 절대.”
레오나르도는 피식 웃으면서 검은 도신의 검을 들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용사님.”
이윽고 아인의 날개는 비상했다.
“보내줄 것 같나?”
적탑주의 화염구가 와이번의 몸체를 향해 발포되었다.
사아앙! 퍼어엉!
“맞히게 둘 것 같냐?”
화염구를 쳐낸 무구는 레오나르도의 손에 있지 않았다.
“호... 이건 의외인데.”
“비장의 카드는 당신한테만 있는 게 아니여서.”
레오나르도의 주변에 떠다니는 대검 형태의 판넬들은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공중을 떠다녔다.
그 형상은 마치 레오에게 새로운 팔과 손이 돋아난 것 같았다.
***
마탑에서 아메리 에스프가 탈출하지 못한 이야기는 제법 복잡하다.
“...으음...”
그녀는 밤늦게 마탑 도서관에 머물면서 졸업 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맡은 과제는 현자의 유산에 대한 자료 정리, 마탑에 있는 현자의 유산을 전부 찾는데 기여한 아메리기에 내보일 수 있는 졸업 과제였다.
“...으...”
다만 지금은 카페인의 부족으로 잠시 잠에 들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늦은 밤의 도서실은 깜빡 잠들기 좋은 장소에 꼽혔다.
“...아...?!”
그녀가 갑자기 깨어난 이유는 눈앞의 금발의 남성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자는 모습도 귀엽군. 안녕하신가?”
“끄아!”
그녀는 비몽사몽하게 흘리던 입가의 침을 닦은 채, 앞에 있는 제국의 황자를 바라보았다.
“쉿, 도서관에선 조용히 해야지.”
레굴루스는 아메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느끼한 멘트를 던졌다.
그것보단 아메리는 과제 준비하던 도중 잠든 것에 놀라며 급히 배고 있던 책을 정리하기 바빴다.
“...죄...죄송합니다! 황자님!”
“미안한 건 내 쪽이지.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니 말이야.”
미안하다는 말과는 달리, 레굴루스는 아메리가 읽고 있던 책들을 천천히 펴보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현자에 대한 학식이 느껴지는 책들이로군. 저번에 했던 말에 보람을 느낄 정도야.”
“아...아니에요. 그냥 졸업 과제 때문에...”
“겸손치 않아도 되네. 난 개인적으로 자네가 현자에 대한 지식이 가장 완성된 이라고 생각하니까.”
현자 본인과 그의 직속 후계자가 들으면 콧방귀를 낄 이야기지만, 황자가 보기에는 현자에 대한 전체적인 학식이 풍부한 이는 아메리였다.
레오나르도도 아메리가 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가장 풍부하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 그런 생각을 가져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한 칭찬에요오... 그러니까...”
차마 ‘주변의 시선이 신경쓰이니까 가주실래요.’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아메리였다.
“과하지 않네. 난 개인적으로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까.”
레굴루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같이 있던 용사 일행들이 시큰둥하게 반응하게 와중에도 아메리는 다양한 현자에 대한 지식을 자연스럽게 꺼내들었고, 동시에 마법과 마도구학에도 정통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나이에 4서클이라니, 황실에서도 보기 드문 실력이라네.”
은근히 레굴루스 자신을 띄우는 말이기도 했다.
본인은 20대 초반에 5서클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아뇨. 리오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해요. 그 녀석은 벌써 6서클에 고유 마법까지 만들었으니까요.”
아메리는 큰 의도를 지니지 않은 채로 한 말이었다. 그저 자신을 쓸데없이 칭찬하는 레굴루스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한 겸손일 뿐이었다.
“허... 그런가.”
레굴루스는 그 말을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라인하르트에는 인재가 많지. 지금 마탑에도 그 대표적인 인재가 3명이나 있으니 말이야.”
황실에서는 그 사실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용사의 피를 이은 라인하르트에는 루벤의 이름에 걸맞는 인재들이 세대마다 나타났다.
하물며 레오나르도와 같이 라인하르트라는 가문의 명예에 따라 직접 남기로 결정한 외부인들도 문전성시를 이뤘으니.
용사 라인하르트의 가문을 복속시키지 못한 것은 황실에선 크나큰 한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생각하네. 이런 아름답고도 훌륭한 인재를 미리 선별해놓는 것이 황자로서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어리둥절해하는 아메리에게 레굴루스는 최대한 남성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 가지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황실에 마도구 기술 고문이 되었으면 해서 말이네. 자네라면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확신했네.”
“...근데...”
레굴루스의 손에서 내밀어진 종이 중에는 일반적인 서류가 아니었다. 크기만 놓고 보자면 작은 쪽지에 가까웠다.
“...축제 때 쓸 티켓이네요? 그것도 두 장이나...”
“아무래도 길을 설명해준 자네는 지리에 해박한 것 같아서, 축제 때에도 지리 설명을 부탁하고 싶은데 말이네. 어떤가?”
서류를 받은 아메리는 그렇게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들고 있는 티켓을 옆쪽으로 밀어놓았다.
“...저... 레굴루스 황자님. 전 티켓을 이미...”
그 순간,
사이렌이 울린다.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울리는 경보에 당황해 황자는 도서관 주변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도서관 내부에는 아메리와 레굴루스 외에는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게 대개 이런 경보는 마탑에서 보관 중인 물건이 도난 당했을 때 울리는데...!”
이윽고 연이어 울리는 폭음, 이어지는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피하세요!!”
“으워어어어!!”
파짝
아메리가 급히 밀치자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괴인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저게 무슨...”
황자는 급히 전격 마법을 연성해 발사했다. 사람이었다면 조금 화력을 조절했을지도 모르지만, 저것의 생김새는 어딜 봐도 괴물이었다.
“...으어...”
“...이게 무슨...”
쓰러진 괴인을 바라보며 레굴루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떨고 있었다.
5서클 마법사라고는 하나,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깥에도...!”
도서관에는 창문이 없었지만, 외부의 상황은 경보로도 판단할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아메리! 지금 이 자리는...”
이윽고 달리려던 순간, 도서관의 입구에서는 한 여성이 걸어왔다.
“괜찮습니까? 황자님?”
붉은 머릿결을 지닌 채로 붉은 로브를 입은 여성.
“적탑주...!”
적탑주 제인 나르샤였다.
“폭발 소리가 들려서 와봤더니, 이곳에...”
적탑주는 평소와 같이 호쾌한 목소리로 황자에게 다가왔다.
“마침 잘 만났네! 호위가 없던 차에...!”
이내 그 말은 잘리고 말았다.
“...저기 적탑주님.”
아메리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적탑주에게서 슬며시 떨어졌다.
“...죄송하지만, 적탑주님은 이곳에 어떻게 황자님이 있다고 알고 오셨어요?”
아메리가 질문할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일까, 적탑주는 잠시 말을 늦추더니 대답했다.
“...아, 그거야 폭발 소리를 듣고 와서 확인해 보니...”
“...그러면 다른 학생들을 먼저 탈출하는 것이 합리적이잖아요. 게다가 적탑은 여기서 거리도 있을 텐데...”
아메리의 추측은 냉철했고, 더욱이 정확했다.
적탑주는 이런 패닉에 빠지기 쉬운 상황에 아메리가 저런 관찰력을 발휘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흠... 아메리 양.”
적탑주의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자네는 이런 쓸데없는 곳에 눈치가 빠르군.”
짧은 독설과 동시에 발사되는 화염탄.
“...으아아악..!!”
아메리는 놀라 비명을 지르지만, 다행히도 지니고 있는 마도구는 이미 발동되었다.
굉음과 함꼐 섬광이 떠트려진다.
“...이런...”
적탑주의 눈에 남은 것은 폭발과 충격에 기절한 두 사람이 아닌,
“...이 지도를 이런 식으로 쓸 줄이야.”
본인이 높게 평가한 아메리가 직접 만든 순간이동 지도의 탄 조각이 남아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근 들어서 또 휴재가 잦군요.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지만 죄송합니다.
휴재한 날짜인 1/26일이 알고 보니 제 생일이었더군요.
근데 아무도 축하를 안 해주길래, 저 혼자서 에반게리온의 [오메데토] 엔딩을 돌려봤습니다.
행복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