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전 아리아스필이 사망 직후.
라인하르트는 물론, 제국은 혼돈에 휩싸인다.
라인하르트의 본가가 궤멸되었다는 시점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제국의 기사단들은 8할이 몰살되고 타락하며 해체되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루미네가 말하길, 라인하르트가 몸을 사렸다면 아마 제국이 멸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방 대륙까지 파멸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건 대략 30년 뒤 쯤에 현실로서 다가오게 되고 말이다.
직계에 방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왕족은 몰살당하거나 마인의 편에 서게 되고, 종국에 가선 제국은 국가로의 형태를 완전히 잃게 된다.
하지만 그나마 수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리디카 펜드레건, 저 남자한테 숨겨진 딸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저 남자의 사생 딸, 유리디카가 있었기에 간신히 제국의 일부 대신들은 수립될 수 있었다.
[...사생아인데... 명분이 있어? 반발이 심할 것 같은데.]
아리아가 말한 것은 처음 레오나르도가 공주의 구조와 호위를 맡았을 때, 뱉었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다.
차이가 있다면 육두문자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일 뿐, 당시 레오나르도와 아리아스필의 의견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사생아라고는 해도, 나름 사정은 있었어.]
흑마법사과 마인들은 왕족, 용사, 성자, 마탑의 주요 인물의 씨를 말리고자 했다. 그들은 정치적인 입지는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었으며, 동시에 특수한 혈통으로 인해 능력이나 비전을 받는 경우가 있어 위험 대상에 항상 꼽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처와 자식을 숨겼다는 거지.]
그리고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안전을 확보되었을 때, 비공식적으로 일하고 있던 어둑시니 레오나르도에게 공주의 호위를 부탁한 것이고.
[...바람둥이도 생각은 있구나...]
말은 부드럽게 해도 아리아는 저 바람둥이 왕자에게서 썩은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로서도, 그리고 세상의 유일한 용사로서도 저런 난봉꾼을 좋게 봐주는 것은 생리적으로 무리였다.
“아리아스필 양은 안 본 사이에 아리따운 숙녀가 되었군. 못 알아볼 정도였어.”
오브와 짧게 인사를 나눈 레굴루스는 아리아의 얼굴과 성검을 번갈아보며 눈과 입으로 미소를 내보였다. 레굴루스에겐 아리아스필도 충분히 연을 맺을 필요가 있는 여성이었다.
레굴루스의 인사에 아리아스필은 아무 말 없이 귀족적인 미소를 지으며 귓가의 머리를 넘겼다. 보통 사람들은 호응해주는 것이라 생각할 테지만, 저 용사와 긴밀한 관계인 레오와 리오스는 알고 있다.
저건 아리아가 자신을 아는 척하는 상대방을 전혀 기억 못할 때, 보이는 특유의 손동작이었다.
그나마 안중에도 없는 상대에게 간신히 예의를 지키기 위해 시리카가 직접 가르친 처세술이자 예법이기에 더더욱 뇌리에 남는 동작이었다.
“그럼...”
그렇게 왕자는 아리아스필의 손를 붙잡고, 아메리에게 했던 것처럼 손등에 입맞춤을 날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아가씨, 손이 떨리시군요.”
레오나르도는 레굴루스가 손을 붙잡기 전에 재빨리 먼저 아리아스필의 손을 붙잡아 감싸쥐었다.
“손이 많이 차갑습니다. 장갑이라도 따로 준비할 걸 그랬나 보군요.”
“...아... 그런가?”
아리아의 따뜻한 손가락이 레오의 딱딱한 손에 깍지를 끼며 서로의 온기를 공유했다. 손잡는 것을 보자 레굴루스는 아리아와 레오를 보며 피식 웃어보였다.
“확실히 공기가 차기는 하군. 축제 기간에는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어.”
레굴루스처럼 보는 이에게는 자연스러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지만, 직접 손을 잡는 아리아에게는 레오의 행동이 필시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알 만큼 부자연스러웠다.
[...내 기사님은 질투심이 많네.]
질투심에 자주 타올라 본 적이 있는 아리아인 탓일까, 그녀에게 자신의 기사가 본인을 위해 질투라는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자극적인 행복으로 느껴졌다.
[아까 손등 키스하려던 거 막으려고 했던 거지? 왜 그런...]
[어, 미안해. 내 멋대로지만 막으려고 했어.]
[...으...응?]
저 질투심을 들추어내 놀리려고 했던 아리아가 반대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평소라면 ‘정말로 추워 보여서’라던기 ‘제대로 오러를 전달하기 위해서’ 같은 핑계를 댈 텐데.
‘...갑자기 이렇게 훅하고 들어온다니...’
[...저 남자한테는, 네가 닿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그거는 그러니까... 꼭 그런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레오나르도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고, 특별한 제스처를 취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러의 영향 때문일까, 아리아는 레오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표정이 연상되었다.
[저 왕자가 후린 여자가 몇 명이 넘는지 내가 말했지? 게다가 넌 네가 생각한 것보다 매력적이라고.]
[...아니이... 그건...]
순수한 진심이 담긴 말에 아리아스필은 온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러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고, 배실배실 입꼬리는 올라갔다.
여태까지는 상냥하고 자상한 기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레오가 저렇게 허물없이 자신을 칭찬하니 손이 시리긴커녕 온몸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어쨌든 조금은 주의하고 있어. 널 노리는 남자가 한 둘이 아니니까.]
[...으...응... 고마워...]
몸으로 쑥스럽고도 조신히 답하는 그녀였지만,
‘...왜 이렇게 귀여운 건데...! 그런 것까지 걱정하고...!’
속 알맹이는 저런 질투 섞인 주의에 발정하고 있는 소녀였다.
저런 질투가 섞인 노파심마저 아리아에게는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레오의 걱정은 애당초 아리아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레오랑 비교한다면 다른 남자 따위는 이성으로서 벼멸구나 메뚜기와 같은 곤충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제국의 왕자라고 할지라도, 아리아스필의 영원한 왕자님은 레오나르도 뿐이었다.
“레굴루스 왕자님, 축제를 즐기실 거라면 외부 여관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리아와 레오나르도가 서로의 애정을 돈독히 하는 사이, 미묘한 공기 속에서 말을 아끼고 있던 오브가 입을 열어 간신히 대화에 참여했다.
오브의 조언에 힘을 얻은 것일까 리오스는 입을 씰룩대며 레굴루스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내던졌다.
“아...! 몹시 안타깝게도 마탑은 물론이고, 주변 여관들마저 꽉꽉 들어찼거든요. 아무래도 마탑에서 좀 먼 곳에서 숙소를 잡아야겠네요.”
리오스의 말대로 축제 기간에는 각종 마탑 여분 기숙사는 물론이고, 각종 숙박 업체는 성수기로 예약조차 몇 달 전에 해야될 정도로 빡빡하게 들어차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아리아스필과 한 방을 쓰게 된 것도 그러한 사유 때문이었다.
다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그 베일에 감추어진 진실은 순애의 수호라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라는 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실은 내 지인 중의 마탑에 있는 교수가 있다만, 축제 도중에 가족에게 일이 생겨 본가로 내려간다 하더군.”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잘 된 사정이었지, 라는 말을 덧붙이며 레굴루스는 너털웃음을 내보였다.
“마탑주들은 아직 전부 도착하지 않은 것 같더군. 괜찮다면 잠시 잡담에 어울려줄 수 있겠나?”
리오스는 짧게 일행들에게 눈짓해 신호를 보냈다. 그에게 있어 레굴루스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크의 구취를 맡으며 식사를 하는 것보다 고역인 일이었다.
“아... 맡은 약속이 있어서 이젠 조금...”
그런 친우의 감정을 눈치챈 것인지, 아메리는 적당한 변명을 내어 왕자에게서 떨어지고자 했다.
리오스를 위해서만이 아닌, 자신의 정신 건강 때문도 컸다.
방금 갑자기 제국의 왕자가 다가와서는 ‘라인하르트의 옛 지인들’을 찾아달라는 부탁한 것부터가 아메리에겐 부담스러웠다.
신분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이기에, 보통의 사람이라면 숨이 턱하고 막히는 감각이 드는 것이 태반이었다,
무엇보다 리오스와 왕자의 관계가 척 보아도 껄끄러운 것이 아메리의 부담을 차츰차츰 부풀려 나갔고 이윽고 그 감정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런가? 그건 안타깝군. 이 담소의 주제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네라고 생각했거든.”
레굴루스는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저으며 안타까움을 고의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사에게 가장 유혹적인 미끼를 화두로서 던졌다.
“용사의 동료인 현자에 대해 직접적인 견해를 듣고 싶었다만, 정말 아쉽게 되었어.”
“...예? 현자님에 대한 거라면...”
현자라는 말에 아메리는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약속에 대한 변명은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건 리오스와 아리아, 그리고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아메리와는 조금 다른 방향성이기는 했지만, 그들도 현자에 대한 관심은 가벼운 주제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발견한 새로운 현자의 유산에 대한 건으로, 미리 견해를 들어두고 싶었네.”
***
대화에 참여한 사람은 오브를 제외한 4명이었다.
오브 본인은 현자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지 않을뿐더러, 현자의 유산을 발견한 경험도 없기에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
다만 아리아스필은 현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전대 용사가 현자와 함께하기도 했고 극비지만 실제로 만나본 경험도 있기에 따라오게 되었다.
“오, 여기서 그 현자 연구부의 전설이 시작된 건가?”
오게 된 장소는 현자 연구부의 옛 부실.
카페나 식당가는 너무 눈에 띄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대화하는 것도 듣고 보는 눈이 많아 어려웠기에.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이 현자 연구부의 부실이었다.
레굴루스 왕자는 오히려 현자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지 허름한 부실을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혹시 타입 디아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고 싶다만.”
그러면서 레굴루스는 리오스의 지팡이와 아메리의 반지를 차례로 바라보자, 일행들은 왕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인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번 사태에서 제법 무리를 해 휴식이 필요한 상태이거든요.”
“...그건 조금 안타깝군. 타입 디아트의 골자는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 칭할 만큼 완전하다 들었는데.”
그런 배려 없는 표현 방식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낀 것일까, 아리아스필은 약간이지만 미간에 주름이 지었다.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아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저 왕자는 알기나 하는 것인가.
“...본론부터 물어 죄송하지만, 발견한 새로운 현자의 유산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설명 가능합니까?”
소심하고 유약했던 평소와는 달리 아메리는 대화를 주도하며 왕자에게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다른 것이면 몰라도, 그녀가 마법을 존경하게 된 시발점이며 대학원의 구렁텅이로 향하게 한 위인인 현자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허투루 할 수 없는 그녀였기에.
그녀의 눈빛에는 여느때와 달리 강한 생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이라... 서두는 최대한 간결히 설명해보도록 노력은 해보지.”
레굴루스는 양손을 깍지를 낀 채 들어올리며 미소를 내보였다.
“그래도 가벼운 사전 정보는 설명해야겠지?”
자신의 질문에 본인이 직접 답하기라도 하듯, 제국의 제2왕자는 마법사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제국에서는 현자의 후보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었네. 새로운 용사가 나타난 만큼, 추가적인 사태에 상정해 현자 후보를 선출해내는 것이었지.”
추가적인 사태라는 말에 레오나르도는 알만 하다는 듯 속으로 혀를 찼다.
제국에서 세운 현자에는 아마 용사를 견제할 수단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정통적인 현자의 후손이나 후계자를 찾는 것이 아닌, 현자 후보를 선출한다는 것이 그의 반증이었다.
“그러던 도중, 고서의 자료에 묘한 기록이 있더군.”
지금도 레굴루스는 당시 자료와 기록이 형태를 보고 의심을 금치 못했다.
“현자가 세계의 수호를 위해 다량의 아다만티움을 궁중 대장장이였던 드워프에게서 얻었다는 기록이었네.”
아다만티움은 현대이든, 고대이든 구하기는 물론, 순도 있게 제련하기 어려운 마광석이었다.
마나의 전도는 잘 되는 데에 비해, 물리적인 작용의 충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는 성검의 모방물을 만들고자 주로 사용했던 재료였다.
“그렇지만 이상했지.”
하지만 지금까지 마탑에서 발견된 현자의 유산에는 아다만티움이 사용된 현자의 유산을 전혀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추측해낼 수 있었네.”
아다만티움의 행방을.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현자의 유산은 모두에게로 감추어진 채로 아직 마탑에 존재할 걸세. 어떤가? 조금은 대화가 흥미로워졌나!”
“...아...예...”
레오나르도는 이 대화를 들으며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리오스와 아리아도 레오를 향해 본능적으로 눈을 힐끗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호자 케테르의 재료가 분명...’
현자를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자는 나라에서 받은 아다만티움으로 좋은 곳에 사용해 마경 결계를 지키는 수호자를 만들어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최근에 2인자는 회귀했다 나무위키에 들어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주인공의 이미지 파일명이 [발기부전이 의심되는 인물]이더군요.
최신화를 읽고도 갱신이 없는 걸로 봐선 나무위키의 소식통도 많이 늦는 것 같습니다.
(20분 지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새해에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