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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는 회귀했다-127화 (127/248)

싸늘한 정적이 흐른다.

레오를 향하는 시선에서 냉랭한 침묵이 섞여있었다.

사실 가문 일가는 물론, 영상을 본 모든 이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분노할 일 자체가 아니었으니까.

이 과거로 알 수 있는 건, 레오가 기억하고 말한 것보다 라인하르트 가와의 관계는 제법 깊었다는 점이었다.

레오 설명만 들었을 때는 그저 레오에게 기회를 주고 후원만 받은 일방적인 관계처럼 보였다.

레오도 회귀 전 자신을 나약하고, 그저 라인하르트의 덕을 본 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딜 봐서...?’

하지만 그건 척 봐도 아니었다. 저게 미화된 기억이 아닌, 영혼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더 확실했다.

그러기에는 유대 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깊고 탄탄했으니까.

[...그냥 기회 줄 때 일어나. 그러고 있는 게 더 쪽팔려.]

“네.”

레오는 짜게 식은 시선과 차게 식은 흑역사를 곱씹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자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 있으면 저 기억에 대한 해명이 어려워지니 일어나는 시간을 앞당긴 것일 뿐이었다.

“...이미... 일어나 계실 줄은 몰랐네요! 몸은 괜찮으세요!?”

너무나 싸늘한 나머지, 루미네는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운을 뗐다. 레오의 몸 상태를 살피면서 간신히 대화를 할 바탕을 만들어주었다.

“10분... 전부터 깨어있었나?”

크리스의 한 마디에 그나마 풀어진 레오의 표정이 다시 얼려졌다. 그러면서 제대로 마주볼 낯이 없었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게... 잠결이고... 정신도 멍한지라...”

“그렇습니까? 뇌파 상태로 봤을 때는 수면 후의 피로는 가셨을 텐데요.”

아인의 눈치없는 돌직구에 레오의 수치심이 고양이 손톱처럼 자신의 얼굴을 긁어대는 것을 체감했다.

차라리 아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걸 지적했으면 이렇게까지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잘못 가르쳤지...’

현자가 아인의 지능과 감성의 정도를 개판으로 짠 것도 있었지만, 레오는 자신의 교육이 완벽하지 않은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치심이 배가 돼서 되어 돌아오는 굴욕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설명을 조금 해줄 수 있나? 편집된 구간에 대해서도 말이네.”

글라디오는 레오의 체면 때문에서라도 일부러 본인 쪽에서 편히 이야기를 꺼낼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광기어린 가문의 가주로서 살았기에 그 정도의 눈치와 소통 능력은 충분히 갈고 닦아져 있었다.

“...편집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건 현자의 설명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걸 보여주기 위해선 70년의 시간을 버틸 힘이 필요했다.

그런 대용량의 정보는 분명 환상이나 꿈과 같은 형태로 현실과의 시간을 어그러뜨린다고 해도, 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레오는 영상의 형태로 남기는 것을 택했다. 영상이라면 필요 없는 장면은 잘라내고, 중요한 장면만 담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것보다 저런... 장면들에 대한 설명은 왜 제대로 하지 않았지?”

질문한 크리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이 기억을 대놓고 본 이들마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정말 광증이 도지지 않은 이상, 이걸 별 것도 아닌 기억이라고 편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복잡한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노망난 거야.]

“...아...”

다들 현자의 날조에 순간적으로 안타까운 감탄사를 내었다. 사실 레오의 연배를 생각하면 노망이 났다고 해도 그리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거든요...!”

[뭐가? 나이가 들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건 노망이야.]

맞는 말이지만 레오에게는 이는 굴욕적인 표현이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사실이라 하기도 애매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레오와 현자를 보며 차게 식은 눈초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완벽하지 않아요. 그건 여러분도 아실 테죠.”

기억이라는 것은 정보가 입력된 책자와 같이 일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뇌에 기록된 정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풍화되어 망각하게 된다.

이게 인간의 뇌에 있는 결정적인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래서 영혼의 기억을 사용한 거잖나? 그거면...”

[그게 또 만능이 아니란 말이지.]

현자는 장난기를 덜은 채, 설명을 시작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현자는 전문가를 넘어 창시자였으니 허투루 설명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영혼의 기억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이 정보를 입력해둔 창고 같은 거야. 그것도 청소도 없이 계속해서 쌓아두기만 하는 창고라고 하기도 민망한 쓰레기장이지.]

뇌에 정보 처리 절차에 망각이 들어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다 의미있는 기억을 제대로 꺼내고, 정보의 과부하를 막기 위한 냉각 겸 안전장치.

그게 잊어버린다는 습관의 본질이었다.

사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뇌세포가 죽지 않아도 망각의 증상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살아온 기간이 길다는 건 담아온 기억의 정보량이 많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완벽히 원하는 시간대의 기억을 알고 싶은 정보 그대로 뽑아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혼의 기억들은 도서관에 순번대로 꽂혀진 책들이 아닌, 쓰레기장에 잡동사니처럼 섞인 쓰레기들에 가까웠다.

지금 만든 검집은 그런 쓰레기를 분리수거라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었다.

“간신히 추리고 추린 기억이 원래 편집된 영상이에요. 생존한 방법과 적에 대한 정보만 담아둔 것이었죠.”

그렇게 추리는 것이 정리하는 효율성으로 봤을 때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적들과 싸우거나 중요 사건들만 정리하는 것이, 인간 관계를 정리하는 것보다 쉬웠다.

‘...정신적으로도...’

무엇보다 레오에게는 과거의 일을 제대로 마주 볼 각오가 부족했다. 정신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보게 되면 계속 그 감정에 매몰될 것 같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다수의 일상생활과 사생활을 제외하고, 적과의 교전과 주요 사건만을 요약해 엮은 것이 본래의 영상이었다.

앞으로의 적과 사건에 대비할 정보만 담아놓은 것이 본디 검집의 존재 의의였다.

‘...지금은... 내 흑역사를 까발리는데 쓰는 것 같았지만...’

보석에 금이 가기 전의 검집은 분명 잘 작동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고장 때문인지 제멋대로 순서 상관없이 편집된 부분을 꺼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우선 검집 수리를...”

“아니.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입을 연 것은 의외로 시리카였다. 아까의 장면들을 보면서 생긴 의문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오 군은 도대체 어쩌다가 가문에 내쫓기게 된 거죠...?”

누가 봐도 레오는 가문과는 호의적으로 보이는 건전한 관계였다.

물론 회귀 전에는 아리아와 너무 친근하게 대화하는 것은 썩 옹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정도야 가벼운 일탈이나 허물없는 전우라고 생각하면 그리 죄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레오를 그렇게 매몰차게 내쫒기게 된 것을.

시리카도, 다른 가문의 일원들도 쉽사리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건...”

설명하려던 레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자신의 정말 추악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편집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정보 요약으로 숨겨서는 안 되었다.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자신이 보인 열등감의 말로를.

철이 없는 혈기가 보인 끝을.

“...아인.”

“알겠습니다.”

아인은 레오나르도에게 검집을 내밀었다. 검집에 난 실금에서는 여전히 빛이 나오고 있었다.

인두로 찍기라도 한 것처럼 각인된 [어둠을 만나 거악과 맞서라]라는 문장은 인상적으로 검집의 입구에 검게 적혀있었다.

그런 입구에 넣은 검은 돌의 열쇠를 레오는 한쪽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아주 약간 남은 마나를 주입해 정리해놓은 순서 중 맨 앞에 있는 영상들을 가지고 왔다.

본래라면 이 장면들이 먼저 나오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리고,

기억은 시작되었다.

***

당시 아리아스필은 용사가 된다는 계시를 회귀 후보다 늦게 받게 되었다.

본래의 정석대로 신전과 계시를 순차적으로 거쳐 성년이 된 날, 신전에 들어가 용사로서의 수행을 시작해 성검을 뽑은 것이었다.

그랬기에 약 5년 동안, 아리아는 회귀 후와 달리 라인하르트의 기사로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회귀 전 레오는 부족한 재능과 혈통을 뛰어난 임기응변과 충분한 것 이상의 노력으로 메꾸어나갔다.

아리아스필 같은 수준이 아니더라도, 차후에 들어갈 집행기사단에 당당히 한 사람의 몫을 할 기사로서 기반을 다진 것이었다.

“이야아!!”

따악!! 파앙!!

늘 일방적으로 압살당해 패배만 하던 레오도 아리아와 최소한의 검합을 나눌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 발전은 가히 괄목하다 평할 만했다.

카앙!! 터엉!!

하지만 몇 번의 검합을 오간 끝에 항상 이기는 것은,

카아앙!!

“내가 이겼어.”

아리아스필이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아리아스필이 대련에서 승리한 날이었다. 레오는 아리아의 카운터에 목검을 놓치며 그대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하...진짜 너무하네...”

레오나르도는 그대로 넘어지듯 앉으면서 푸념을 슬며시 내뱉었다. 사실 분하다면 분한 것이었지만, 사실 그건 열등감에 사로잡힌 수준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늘 성적이 좋은 학생을 보면 질투가 나는 것과 같은 심리, 다만 레오는 오기가 세고 호승심이 남들보다 강하기에 그 행동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뿐이었다.

“일어나.”

아리아는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나름 생기가 있었다.

“...병 주고 약 줘서 고맙다 짜샤.”

레오는 털털히 웃으며 아리아의 손을 잡았다. 비꼬는 어투이긴 했지만, 레오를 어느 정도 본 사람이라면 그게 진심으로 헐뜯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었다.

그건 아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곱게 써. 습관 드니까.”

다만 주의는 늘상 주는 편이었다. 이때 레오는 회귀 후와 달리, 용병 생활로 품과 예의를 중시하는 귀족 문화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아리아에게 반말을 사석에서 편히하는 것도 그 습관 중 하나였다.

이윽고 둘은 사소한 잡담을 나누더니, 이내 서로 각자의 갈 길을 가게 되었다.

아리아는 가주가 오랜만에 저택에 왔기에 인사라도 드리려고 갔고, 레오나르도는 종자로서 훈련을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가려고 했다.

“저기, 꼬마야?”

그 순간, 한 노인이 레오을 바라보며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 있는 장소로 봐선, 바로 온 것이 아닌 아리아와 레오의 대련을 바라본 것 같았다.

“...누구시죠?”

레오나르도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 경계를 하면서,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존대하는 어투를 구사했다.

“난 라인하르트에서 일했던 기사란다. 지금은 은퇴했지.”

그 태도에 노인은 최대한 인자한 표정과 어투를 구사하며 레오의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오는 나름 공손한 태도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보다 상관일 경우, 약간의 무례는 실수가 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아까 보면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 데 물어봐도 되겠니?”

“네? 네. 상관은 없어요.”

살짝 노인의 눈살은 이완했지만, 이내 그는 느긋한 실눈을 뜨며 물었다.

“아까 아리아스필이랑 많이 친한가 궁금해서. 많이 친하니?”

“...예...뭐... 아리아...스필 님이랑 자주 대련하긴 하죠.”

그러자 노인은 대답이 나름 만족스러웠는지 입술을 꿈틀거렸다.

“내 소개가 늦었구나.”

레오라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디에고 라인하르트란다. 원로회의 원로원주 중 한 명이지.”

뛰어난 기사이자 용사 후보이며, 가주의 장녀인 아리아를 관찰하고 통제할 '감시자'로서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왜 회귀 후에는 안 그랬잖아?]

<회귀 후 즈음에는 이미 원로원이 망했고, 아리아는 신전에 4년이나 있었으니까요>

[노린 거냐?]

<반 정도는요. 나머지는 운이 좋았어요.>

{지각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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