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하...”
[이봐.]
“...하아...”
[아리아한테 차인 게...]
<아니거든요.>
애시당초 고백도 안 했는데 뭐가 차인 건가. 한숨은 그냥 속이 텁텁해서 내쉬는 것일 뿐이었다.
[그래, 고백은 안하고 상상하면서 딸딸...]
“닥쳐요. 누가 그런 상상을...”
...본인 앞에서 한 적은 없으니 떳떳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다. 몸이 젊고 편안해지니 혈기가 솟아서 그렇지.
그런 더러운 감정을 품은 적은 없었다.
[...이대로 냉전 상태로 있을 거냐?]
현자는 사뭇 진지한 눈치로 레오에게 물었다. 솔직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예 모래 더미를 한 주걱 퍼서 입에 넣고 목에 얹힌 채로 수분을 뺏기는 답답한 심정이었다.
“...모르겠어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루미네나 아인한테는 잘만 설명했으면서.]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건 옆쪽에서 둥둥 떠다니고 한 늙은 유령 때문이었다. 저런 게 떠다니고 있는데, 아무 설명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으니 말이다.
[너 때문이지. 네가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지 않은 거니까.]
“...허...”
참 할 말이 없어지는 비난이었다. 그런 논리로 가면 무슨 일이든 상대 잘못이 될 것이다.
<그럼 뭐라고 설명합니까? 갑자기 친구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몇 십년을 역행한 회귀자였다고 말하라기도 하면...>
[상관없잖아. 애초에 그 예언쟁이 덕분에 아리아도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것 같더만.]
사실 현자가 보기에는 예언가가 주책을 떤 것이 오히려 호재로 보였다.
몇 년 더 입을 닥친 채로 목구멍이 답답한 꼴을 보느니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회귀에 대한 갈피라도 잡는 편이 현자에겐 나아보였다.
<...솔직히 어떻게 말해야 덜 상처받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런 사람인 걸 알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할지도 모르겠고요.>
도덕적인 척, 윤리적인 척을 하고는 있지만, 결국 자신의 알멩이는 수백, 수천을 망설임 없이 참살한 살인마다.
그런 자신이...
[꼴값을 떠네.]
바로 초를 치는 영감이랑 얘기해야하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었다.
[거 세상 다산 노인네마냥 아주 그냥 꼴값을 떨어. 지금도 머리에 안 마른 피가 뚝뚝 떨어진다 야.]
<저 이렇게 봐도 90년은 넘게 살았거든요.>
그것 때문에 드는 괴리감은 아직 여전했다. 감각은 젊은 몸이 몇백 배는 편안했지만, 전투력만 놓고 보자면 대강 70대 쯤의 몸조차 이 상태의 몇십 배는 강할 것이다.
‘...물론 계율을 새기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절대로.
계율에 레오가 몸서리를 치는 동안, 현자는 또다시 혀를 찼다.
[나한테는 나이 얘기는 안 먹히는 거 알지? 그리고 인생을 7할을 그딴 데에 꼬라박고는 나이 먹었다고 하기도 그렇지.]
<...허 참...>
저 노인의 연세를 고려하면 할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 일침이었다.
생각해보면 현자의 말을 어느 정도 듣게 된 데에는 나이도 한몫을 했다. 아마 그냥 노인 정도의 나이만 먹었다면 자신이 현자의 말에 귀를 담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넌 그냥 생각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아. 그래서 겁먹은 거지. 신중한 건 좋은데 적당히 해. 생각이 많으니까 핑계도 많아지잖아.]
<신중하지 않았다면, 이미 전 죽었겠죠.>
신중하고 신중했기에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 계율이 지나치게 잘 발동하는 까닭도 이 신중함과 원치 않는 상승 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산 거냐? 그건 죽지 못한 거야 임마.]
할 말은 없었다. 계율 덕분에 때때로 무지하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 생각 좀 정리 해. 난 밖으로 나간다.]
<웬일입니까? 이런 시간도 다 주시고.>
[지금 니 면상이 딱 네 딸내미 데리고 와서 죽빵 날릴 때 표정하고 똑같아. 이 새끼야.]
어이쿠, 티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다음에는 포커 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아인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한 레오였다.
솔직히 지금 아인이 자신의 편이 되어줄 지도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생각 잘해보라고. 내 쪽에서도 해줄 충고는 다 해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현자는 문을 통과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고백이라...”
만약 이 경험들과 사실들을 전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리아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뭘 설명하고, 어떤 걸 강조해야할까.
지금까지 느꼈던 감정을...
[야.]
“...!”
레오는 5분도 안 되어서 들어온 현자를 보며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들썩였다.
“...왜요? 나간다면서요?”
[...내가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는데 해볼래?]
“...갑자기요?”
나온 지 5분도 안 되었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른 현자였다. 지금 범위에서 느껴지는 사람은 ‘아인과 루미네’ 뿐이었는데, 아인과 루미네에게 무슨 말이라도 엿들은 것일까 심히 의심했다.
[아니, 그 비둘기 후계자가 고해성사라는 좋은 방도를 알려줘서.]
<...고해성사요?>
고해성사,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조언은 아니었다. 회귀에 대한 정보 발설만 조심한다면 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귀에 대한 건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지.]
<...그게 의미가 있나요?>
결국은 죄의 본질을 숨기는 건데.
[그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일종의 연습이라고 생각해도 좋잖아.]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성직자들이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인 건 확실했으니까. 특히나 감성이나 도덕과 같은 분야에서는 확실히 말이다.
하지만 아무 교회에 가는 것은 위험하니, 루미네에게 리스트를 추려서 안전한 교회로 간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후 레오는 크나큰 후회를 하게 된다.
만약 다시 회귀를 하게 된다면, 레오는 저 말 같지도 않은 궤변에 설득당하기 전에 현자를 아예 존재 자체를 소멸시켰어야 하고 깊게 다짐했다.
***
레오는 고해소의 안에 들어간 채로 현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저 양반이 이제와서 개인정보를 보호해준다는 것은, 그에게 받는 연애 조언만큼이나 믿을 것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현자님? 진짜 가신 거죠?>
대답은 없었다. 미약한 마나의 파동도 멀어지는 걸로 봐선 믿기는 힘들지만, 정말로 간 것 같았다.
‘...아까는 사생활 보호는커녕 신부가 있는 쪽을 보더니...’
저쪽에 있는 신부가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었나?
“...저기, 회개를 하기 위해선 고해를 제대로 성찰하시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 예.”
신부의 목소리를 솔직히 말해서 몹시 기묘했다.
여자 목소리 같기도 하면서도 성대를 눌러 강제로 변조시킨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 이곳의 신부 중에는 실력자는 없을 것이며, 레오 자신의 감지 능력에도 걸리지 않았으니 더더욱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
무엇보다 현자가 확인하기도 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적었다.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럼. 그렇고 말고... 레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이니까...’
물론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닌 기사가 정령술과 신성술을 혼합하여 기척을 죽이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 달라진 이야기의 뒷부분이 시작되었다.
“...계속 하십시오.”
레오가 사제라 생각하는 인물이 말을 재촉하자 그는 입을 열었다.
고해성사라는 것은 결국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죄악감을 해소하고 죄악을 마주하는 것, 그러니 자신은 고해소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행동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예, 저는... 제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를 속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말에 아리아의 표정은 떨렸다. 이 질문을 통해 드디어 감정에 쌓인 가면이 벗겨지고, 레오의 비밀과 감정이 들어날 것이다.
“...무얼 속였습니까?”
그 말에 레오의 표정도 떨렸다. 이걸 자신의 의지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상황에서 정보를 주는 것은 분명 이번에 처음일 것이다.
“...전... 아가씨를 첫만남을 속였습니다. 아가씨는 기억할 수도 없을 테지만... 전 아주 전에 그녀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아리아는 떠올린다.
레오가 자신과 검을 나누다가 가슴이 찔렀던 장면도, 그리고 자신이 레오와 싸워서 처음으로 패배한 것도 확실히.
“...어째서 속이셨습니까?”
사실 아리아에게는 그런 이유 또한 알아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미래와 과거 사이에 있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에 분명 단서가 될 것이었다.
“...아가씨가 믿지 않으실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니 말할 기회를 계속 놓치게 되고...”
레오는 입을 다문 채로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어째서인지 이 신부에게 말하는 것은 그녀 본인에게 말하는 것과 동급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본질의 부담이 적었기에 레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현자가 알리고자 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레오는 생각했다.
“...점점 말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저라는 존재를 추악하게 여길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제 가진 무능함과 살육에 경멸을 할까 겁이 났습니다.”
아리아는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감게 되었다.
지금 눈을 뜬다면 그녀는 흐느껴 울지도 모른다.
저 남자가 흉터가 많은 이유는, 스스로의 몸에 날붙이를 대고 그었기 때문이라고.
그걸 어루만져주고 말려줄 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가슴이 쓰라리며 마음에 연민과 사랑이 흘러내렸다.
“...추악한 이는 스스로를 추악하다조차 생각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죄를 인정하며 나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되 두려워하지 마세요. 어린 양이시여.”
이건 아리아 자신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다. 이곳은 가장 신성한 장소이지만 그 말에는 신은 관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리아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에게 죽은 사람들은... 결코...”
그 죄악들을 두려워 말라고.
“...그건 마주봐야할 일이지 두려워해야할 일이 아닙니다. 죄라는 걸 안다면 더욱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넌 추악한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의 추악함에 경멸하는 것보단, 그 죄를 겪은 사람에게 속죄를 하세요. 본디 죄책감은 죄의 책임을 지기 위해 있는 감정이니.”
아리아는 말하고 싶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과거의 자신을 올바르게 인정하는 게 먼저입니다. 죄를 사하는 건 그 다음입니다.”
레오는 잠시 침묵했다. 반박할 말은 없었다. 만약 아리아 본인에게 이런 말을 그대로 듣지 않았을까, 레오는 속으로나마 생각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지. 이렇게 용서할 리가 없으니까.’
이윽고 고해는 이어졌다.
“...그 아가씨와 처음 만난 것은 언제이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리아는 더 이상 떨지 않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이 남자의 삶이 신마저 용서하지 못할 대죄라고 해도, 자신은 용서해줄 것이다.
어떤 죄를 지더라도, 용서할 것이며, 그 속죄를 함께 지고 갈 것이다.
설사 그게 자신을 파멸로 몰지라도.
그렇게 용사 아리아스필은 각오를 다졌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레오는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아리아는 조금 성을 섞어서 그 행동을 강하게 지적했다.
“불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건 모고해입니다. 죄를 성찰하고 정직히 고해를 하십시오.”
차분했지만, 불호령 같은 어투였다.
불분명한 고해를 하는 것은, 고해성사를 모독하는 모고해임으로 따끔히 일러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개인사의 목적이 아니었다.
“...전...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오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말을 꺼내었다.
“...신부님의 말씀은...저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말 또한 레오의 각오이기도 했다.
“...아가씨께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됩니다.”
예상 외의 말에 아리아는 살짝 얼은 표정으로 고해소 바깥을 보았다.
“이곳에서 먼저 말한다면 전 그저 자기만족을 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고백을 먼저 들어야할 사람은 분명 아가씨일 겁니다.”
“...설사 두렵다 해도 말입니까?”
아리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일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이 입술에 호선이 그려졌다.
“...네. 그만큼 아가씨께는 당당해지고 싶습니다. 당당히 아가씨 곁에 서고 싶습니다.”
...너무 기특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저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바로 자신의 정체를 들어낼 만큼 충동이 몰아쳤다.
“...알겠습니다. 혹시 소죄나 다른 죄를 고해하고 싶은 마음 있습니까?”
형식 상의 말일 뿐이었지만, 레오는 잠시 입을 다물며 고민에 빠졌다. 이내 고민을 마친 레오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전... 때때로 충을 맹세해야할 주인에게 육욕을 품고... 자신을 몇 번 위로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 참 깊은 죄...로군요. 어떤 상상을 했으며, 횟수는 몇 번인지, 기분은 어땠는지... 다음엔 어떻게 할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아리아의 얼굴은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이건 꼭 물어봐야했다. 자기를 성적으로 위로하는 건 분명 죄 중 하나니까.
“...그렇게 자세히 말하는 건가...요...?”
“어린 양이여, 자신의 죄와는 깊게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스스로의 죄에 두려워하지 마시고 대면하세요.”
하지만 그 죄는 본인과 결혼하는 것으로 충분히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한다.
“...사실... 다른 여자를 안거나 떠올리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충을 지켜야할 기사는 한심하게도 계속 아가씨의 육체에 욕정을 갖더군요...”
“...그 말은... 혹시 이때까지 다른 여자와의 경험이 없다는 의미입니까?”
아리아는 경험이 있다 해도 용서할 생각이었다. 여자 쪽은 몰라도 적어도 레오만은 용서를 할 용의가 있었다.
설마 마탑에서 한 이야기가 정말로...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그 한마디에 아리아는 이곳에 벽이 있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아쉬움을 느꼈다.
아마 없었더라면 그녀는 즉시 달려들려서 옷을 뜯고 벗어 순결하고 성결한 낭군님의 몸과 바로 교접했을 테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깐, 저 새끼는 100년 넘게 경험 없으면서 나한테 고자라고 한 거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생의 일이 밀려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