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예언-1
흑암(黑巖)과 흑암(黑暗)의 격돌
그들에겐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크리스의 일격 하나하나는 전부 필살의 공격.
레오나르도의 일격은 시간과 육체의 한계를 넘어 압축된 연격.
흑과 백이 섬광으로 작렬한다.
그 섬광 아래에 결투의 승자가 서있었다.
“...허...이미 압도했다는 것인가...”
흑암 크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증식검을 떨어뜨렸다.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를 떨어뜨렸다는 시점에서 승패는 갈렸다.
이미 그녀는 공격의 충격으로 반 정도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말이다.
“압도가 아닙니다... 대련이 아닌, 전투였다면 지는 건 제 쪽이었겠죠.”
이건 예의나 의례적인 말 따위가 아니었다. 샤이닝 다크 오르비스인지 매직핫 슈퍼 나이프인지 어쨌든 그 기술은 닿은 것만으로 이런 갑옷 쯤이야 0.1초만에 절단이 가능한 신기.
그렇기에 반대로 이런 대련 형식의 결투에서는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술이기도 했다.
대련에서 생사를 가르는 건, 규칙 위반을 넘어도 한참 넘긴 것이었으니 크리스 입장에서는 한층 더 자연스러운 검술을 선보일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하... 겸손도 그정도면 기만이군.”
“그런 말은 많이 듣습니다.”
물론 회귀 뒤에나 그랬지만 말이다.
“...조금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 사랑해보도록 해라...”
어째서일까.
낡고 옛된 기억의 늪 속에 깊은 물 아래에 비슷한 기억의 파편이 있었다.
크리스를 갖은 꼼수와 계책으로 이겼을 때,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불신하는 레오에게 이렇게 격려해주었다.
‘...자신을 믿어라. 틀리다면 누군가 바로 잡아줄 테니.’
너무한 격려였다. 보고 싶지도 않은 흑역사가 담긴 앨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네, 그럴 자격이 있다면요.”
그래,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
“...근데...”
근데 정말 도저히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 있다.
“결국 크리스 님이 좋아하시는 분은 누굽니까?”
어느 정도 마음을 풀리게 해준 건 감사하다만, 본인의 연애 상담은 하등 진전이 없지 않은가. 이름은커녕 어떤 사람인지도 언질도 없었으니까.
“...아.”
크리스는 지금까지
지은 중후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얼빠진 눈치로 입을 벌렸다. 가주이자 오빠인 글라디오의 예상대로 크리스는 레오나르도의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본목적을 저 먼 곳으로 던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게...! 그러니까... 난 그저... 입을 풀기...”
“...그건...우선 나중에 말하죠... 저도, 크리스 님도 너덜너덜하니까요.”
레오나르도는 부서져 가는 흑암의 갑주를 다시 팔찌로 변형시켰다. 이미 체력은 한계였고, 마나는 크리스 이상으로 바닥나 있었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레오는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졌음에도 뒤로 쓰러진 레오의 표정은 퍽 상쾌해보였다.
크리스의 어설픈 위로가 한편으로 통한 것처럼.
“...이거 역설적이군. 패자가 승자를 부축해야하다니.”
아직 몸을 움직일 마나가 있던 크리스는 모든 마나를 쏟아부워 반쯤 기절한 레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승자의 특권입니다... 부탁 좀 드리죠.”
그 모순 같은 상황이 제법 웃겼는지 레오는 피식 웃음을 내며, 그 손을 잡으려고 했다.
찰싹
하지만 그 흑암 간의 유대가 있는 사이에, 순백과 빛의 용사가 패자의 손을 치며, 자신의 기사 손을 대신 잡았다.
“...아가씨...?”
레오의 아가씨이자 영원히 용사.
아리아스필이었다.
“내 손 잡아. 두 사람 다 멀쩡하지 못하잖아요.”
부드러운 미소와 말과는 별개로 아리아스필의 눈은 살짝 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자신이 피로해서 착각을 하는 것이라, 레오는 멋대로 착각했다.
“...아, 감사합니다.”
“고맙군... 사실 나도 한계였거든.”
크리스도 억지로 세우고 있던 몸에 두르던 겉멋을 치웠다. 사실 이대로 걷는 것만 해도 크리스 상태로는 한계였으니까.
“고맙긴요, 당연히 ‘고모보다 더 젊고 예쁘고 기운도 있는’ 제가 '제 레오’를 도와줘야죠.”
화사한 표정이었지만, 말내용은 지나치게 공격적이며 살기가 등등했다
“...어...음... 그래...”
이해할 수 없는 그 위압감 높은 견제에 크리스는 떨떠름한 눈치로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단순히 아리아가 두려워서가 아닌, 뒤에는 모든 가족들이 이상한 대꾸는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가주이자 자신의 오빠가 보낸 갖은 몸동작들은 마치 동생의 목숨이라도 부지시키기 위한 발버둥 같아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
레오는 마나 고갈 때문일까, 그대로 곤히 잠들었다. 자신의 고모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것은 몹시 건방지고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상쾌한 표정을 지으면 화도 낼 수 없지 않은가.
“...저기, 아리아... 이건... 사정이...”
“입 다무세요.”
아리아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기사를 침대에 눕혀놓으며 자신의 귀여운 레오의 사생활을 침해한 ‘죄인들’을 무릎 굽혔다.
“잘못을 하셨으면 벌을 받아야잖아요. 그렇죠?”
그중에는 자신의 오빠, 고모, 부모님과 할아버지도 있었지만 알게 뭔가. 지금 그 신전의 유명하디 유명한 성인마저 잘못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는데.
“그래서, 레오한테 그런 이상한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뭐라고요?”
“...아... 그러니까 솔직한...대화를 위해...!”
파창
섬광이 일었다. 무언가가 혜성과 같은 속도로 지면으로 투척된 것이었다.
“...어이쿠, 펜이 미끄러졌네요.”
날아간 것은 연필꽂이에 들어있는 만년필, 극히 평범한 만년필이었다. ‘미끄러졌다고’ 주장한 만년필은 유성이 낙하하듯 지면에 꼿꼿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대화라고요?”
그 신기와 기적과 같은 기술에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요즘은 대화를 주먹다짐으로 하는군요? 네? 고.모?”
크리스는 생각했다.
아마 결투한 그 자리에서 말 한마디에 겉멋이 있었다면, 즉시 겉가죽과 내장이 발라졌을 거라고.
“...우선 진정해라. 크리스도 레오의 고민을...”
“아빠.”
아리아는 실눈을 가늘게 뜬 채로 살기가 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가주 글라디오는 보았다. 자신의 어머니, 아리아의 할머니가 저승 저 너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그럼 저도 무척이나 솔직한‘대화’가 하고 싶네요?”
글라디오 뿐이었을까, 무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 시리카나 루미네마저 소동물처럼 부들거리며 떨기 시작했다.
“이걸 어쩌나, 1대 6이라니. 제가 너무 불리하네요?”
아리아는 쿡쿡대며
웃어댔지만, 주변 사람들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중에서 루미네가 제일 불안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리아가 신전에서 수련하는
동안, 보인 성검의 운용을 직접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벤도 그런 광선포를 만들지는 못했죠.}
드래곤조차 고작 생수통 정도의 크기로 보일 방대한 마나, 여기 6명을 죽기 살기로 덤벼야만 승산이 있을 재능이었다.
“정확히는 1대 7입니다. 아리아 언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회색 머리와 로브의 소녀, 또한 지금 이 대화의 잠들어있는 주제의 딸이기도 한 아이였다.
“...아..아인아...?!”
자신의 딸을 보자 아리아의 살기가 일순에 사라졌다.
"분노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감정을 고려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레오의 감정이라니?"
순식간에 살기가 사라지자 라인하르트 일가는 아리아에게서 자신들의 생명줄이 붙들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아버지께서는 가족은 늘 화목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씀하셨죠. 그를 위한 노력도 아낌이 없었고요.”
의외로 나온 아인의 말에 다들 조금 숙연한 분위기로 아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언니께서 화를 내면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노력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시체라도 찾겠다는 심정으로 10살에 칼부림에 뛰어든 소년, 어쩌면 아인을 자식이라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인하르트 일가는 생각했다.
사실 아인이 보기에는 레오가 정말 가족에게 화를 안 참았다면.
기차역에서 혼을 내던 아누스 일행을 즉사시키는 것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몇 명은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의미였으나 아무도 그 말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섬뜩한 년...]
{당신이 만들어낸 거니까 당신이 책임지세요.}
[차라리 저렇게 가르친 레오를 탓해.]
다만 두 망령들은 눈치를 챈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그 둘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루미네는 여러 의미로 기가 찼다.
“...저도... 그건 바라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신다면...”
“아니~!! 우리 아인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화를 풀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는 자신의 딸에게 달려들어 마구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는 죄인들은 그런 아리아에게 한심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저 괴물과 같은 용사를 진정시킨 아인이라는 존재에게 진심어린 경외가 느껴졌다.
“역시 아리아 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시는군요.”
“응! 당연히 레오를...”
아리아는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굳은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자신의 모든 가족이 있었으며, 자신을 몇 년 동안 도운 성인도 있으며, 기절하고 있었지만 이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남자도 옆에 있었다.
“...물론...! 물론! 친구와 동료로서...!! 파트너로서 좋다는 거지!! 그런 흑심은...전혀...!”
여태까지의, 그리고 지금의 행적을 생각하면 그딴 변명은 늦어도 한참 늦어서 변명은커녕 오히려 아리아가 사랑으로 지능이 저하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예, 인생과 성적 파트너로서 좋다는 마음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으...아아아...”
아인의 태연하고도 직관적인 요약에 아리아의 얼굴은 그녀의 타오르는 사랑처럼 붉게 익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자리에서 그런 대담한 발언을 뱉어버렸으니 이제는 어떤 낯으로 가족들을 봐야 한단 말인가.
“아인이 그런 이상한 말은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은 이런 데에 쓰는 게...!”
이제는 안타까운 코미디라고 봐도 무방했다. 저리도 발버둥치는 게 웃겼으나 한편으로는 보는 것 자체가 안타까워 리오스는 말했다.
“이미 다들 알아. 아리아 네가 레오 좋아하는 거.”
“...아...으아아아...”
아리아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넘어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작은 신음을 내었다. 만약 이 마음을 그대로 소리를 내면 레오가 완전히 깨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언제부터...”
리오스는 그걸 이제야 눈치챘냐는 투로 말했다.
“난 레오 만났을 때부터.”
크리스는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투로 말했다.
“흠... 난 아리아 네가 레오와 함께 합을 맞춰 발록을 잡을 때 즈음부터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부부는 저렇게 사랑에 빠진 딸의 눈동자에서 몽실거리는 사랑의 콩깍지를 보며 말했다.
“엄마 생일에 엄마한테 제일 먼저 드레스를 보여주지 않고 레오 군을 찾는 순간부터 알겠더구나.”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다만, 시리카 말을 들으니 도저히 그게 아니라 생각할 수는 없었지.”
루미네는 신전에서 갖은 기행을 보기 전부터 모를 수가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와 레오 기사님이 친해진 걸 탐탁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을 때부터요.”
“...별로... 그런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정말로?’라는 듯 눈썹을 구부렸다. 지금 상황도 따지고 보면 그 질투심이 원인이지 않은가.
마르켄은 이제는 더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에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레오의 결투로 성검을 얻고, 레오를 만나자 계시가 내려졌다는 시점에서 부정은 힘드니...휴우... 인정하는 수밖에.”
실제로 부정은 힘들었다.
당시 아리아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이정도면 하늘이 이어준 운명이 아닐까 헤실거렸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레오 본인은 모르던데...”
그 말엔 다들 전적으로 동의했다.
원점으로 돌아가보면, 그게 다들 이해가 안 가서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리아의 눈에서 지금 꿀처럼 흘러내리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역시... 첫사랑 이야기가...”
'첫사랑'이라는 한마디에 차가운 냉기와 살기가 주변에 감돈다. 정확히는 혹한의 미소를 그린 아리아에게서 뿜어지는 공포의 기운이었다.
“...칫, 내 레오를 두고 홀로 죽은 여자가 뭐가 좋다고...”
뭔가 레오의 마음과 고인을 능멸한 발언을 했지만, 아무도 지적할 수가 없었다. 그 중 루미네와 아인, 그리고 망령 둘은 복잡한 표정으로 결과적으로 자기혐오나 다름 없는 독설을 들었다.
“...그럼 그 사람을 조사...”
“그건 더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들 그 반론을 제안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인?”
의외로 반론을 제기한 것은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한 아인이었다.
“이 이상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어째서...?”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반론(을 빙자한 위협)이나 설득(을 빙자한 위협)을 보일 아리아였지만, 레오와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는 아인이 말했으니 그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인은 유례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었다. 이건 ‘당황’이나 ‘저속 출력’ 같은 귀여운 원인 따위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아인 본인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멋대로 전부 말하면 레오의 모든 것이 무너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손님이 왔습니다!”
저택 정문의 정보를 알린 라인하르트의 기사였다. 제법 놀라고 당황한 목소리였기에 글라디오는 신경쓰는 눈치로 기사에게 물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은 예정된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만... 왠 늑대 인간하고 한 노파가 ‘레오나르도 기사님의 가족’이라 주장하면서 약속 시간이 됐다며 왔습니다.”
“아! 그거 맞아요! 친가족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돈독한 사이에요!”
용사인 아리아스필이 그렇게 기사는 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여전히 놀란 눈치인 것은 여전했다.
“그러면 그들을 안내한 ‘에일린 템페리우스’ 마법사도...!”
“그 불여시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 가급적이면 내쫒고, 못하겠으면 제 손으로 직접 쳐죽... 아니, 먼 곳으로 보내겠습니다.”
연적의 등장에 뛰쳐나간 아리아를 보며, 그 먼 곳이 황천이 아니길 만을 빈 가문 일가였다.
“...우선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러는 게 좋겠네요. 루미네 사제님, 혹시 아우 좀 치료해서 깨울 수 있나요?”
방밖으로 나가는 리오스의 말에 루미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네, 알겠습니다. 먼저 다녀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루미네는 급히 레오의 가족과 아리아가 황천 여행을 보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달리는 라인하르트 일행을 배웅했다.
“앤젤라 성녀님.”
{예, 루미네 수사.}
라인하르트 일원은 물론, 아인마저 밖으로 나갔을 때, 루미네는 조심히 자신의 수호 천사를 불렀다.
“...말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건...”
말했더라면 분명 해결될 수 있는 문제, 라고 루미네는 말하려고 했다.
[아서라. 괜히 나섰다가는 레오한테 칼빵 맞아.]
{...말투가 경박합니다. 하지만 저 이름 뿐인 현자라는 노인 말대로 저희로서는 발설해서는 안 될 사실인 건 맞습니다.}
두 망령은, 가까이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품성과 능력대로 나름의 경험과 관록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루미네의 언행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원치도 않은 일을 당하고도 계속 자신을 용서를 못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이야기가 아닌가,그건 두 영걸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다만 그건 의견의 동의였을 뿐이었다.
[...그래, 레오가 그러는 게 안타깝고 텁텁하고, 질식사할 만큼 목구멍에 불로 지진 석탄 집어넣은 것만큼 답답하기는 하지. 근데...]
현자는 이 문장으로 난항을 일축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걸' 아리아한테 죄악감을 안 주고 설명할 수 있는데?]
근본적인 문제는 회귀에 있지 않았다.
레오가 그 회귀까지 걸린 시간과 고통을.
그 모든 걸 듣고도.
과연 아리아는 용서할 수 있을까.
레오를 용서하기 이전에.
70년이 넘도록 자신이 사랑한 남자를 죄악감에 홀로 둔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것이 진정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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