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93화 (93/248)

EP.93 사랑의 고민-4

언제였을까.

그래, 12번째 결투에서 있었던 일이었지.

그때는 내가 처음으로 아리아에게 유효타를 성공한 날이었다.

일부러 검을

집어넣고, 공격을 유인한 뒤 칼날을 붙잡는 척을 하면서 박치기로 검날을 어깨쪽으로 빗나가게 했다. 당연히 어깨에는 상처가

생기겠지만, 그 뒤로 합장이 된 손으로는 반격으로 당수를 날린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대로 당수를 가격당한 아리아는 계획대로 완벽히 나가떨어졌다.

난 거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어때? 밑바닥과 한 첫키스는?’]

그 뒤로 떡이 되도록 처맞고 졌지만 처음으로 성공시킨 감각은 여전히 손에 남아있었다.

28번째 결투에서는 검합이 밀리지 않고 열 번 정도는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고.

40번째에서는 계획이 없어도 검을 스치게 하는 정도에는 도달했다.

그렇게 점점 아리아스필에게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한 번쯤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보였고 말이다.

‘내가 이겼네.’

그리고 그 실낱같은 희망은 백전백패를 통해 완전히 깨지고 갈려버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한번 정도는 이기는 게 정상이었지만.

상대는 고금을 불구하고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용사의 후예였다.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어...? 도대체... 어떻게...?!’

지금 생각해보면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드래곤에게 일개 까마귀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날 수 있냐고 묻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노력하면 되겠지. 언젠간 나를...’

그 순간 정말 자신은 폭발해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아리아스필은 강해지고 냉정해지며 성숙해졌는데.

하지만 자신은 항상 제자리걸음을 하는 어린애 같았으니까.

아무런 성장도 못 한 것 같았으니까.

열등한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무리하게 자존심을 끄집어 터뜨렸다.

‘네가 뭘 아는데...’

생각해보면 당시의 아리아도, 나도 너무 어렸다.

‘네가 뭘 아냐고!’

그런 괄목한 성장들이 아주 조금으로 보일 정도로.

‘...레오...?’

‘넌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는 상황을 알아? 자기 엄마가 혹시 창관 출신일까 걱정해본 적은? 아니면 자기의 핏줄도 거기에 섞여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있어?’

그만해. 더는 말하지 마.

‘밖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없이 홀로 살아본 적은? 동료인 줄 알았던 거한에게 강간당할 뻔한 적은? 믿었던 친구가 배신했던 기억은 있나?’

나도 알고 있었잖아. 아리아 잘못이 아닌 거.

‘그리고 손톱이 빠지고, 손이 온통 굳은 살로 박히고, 매번 조롱을 당하면서 무기를 휘두르는데도 매번 지는 사람 기분은 알아?'

...그 이상 말하면...

‘전부 불공평하잖아...! 가족도, 돈도, 명예도, 그리고... 재능도...’

더는 용서 받을 수 없는데...

‘전부 가진 네가 뭘 아냐고...! 아무것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 아무것도 잃어본 적이 없다.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자기 슬픔만이 가장 큰 상처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아이.

‘...그래. 미안해.’

친구이자 동료의 사과에조차 분노할 정도로 열등감에 찌들어있는 개새끼, 그게 나의 본질이었다.

‘...닥쳐...’

내가 닥쳐야만 했다.

‘너도 사람 새끼면 화를 내라고...!’

사람이었다면 화를 참아야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그런 식으로 후회하지는 않았을 텐데.

***

“...그래서 승패는?”

레오의 첫사랑

이야기는 절정에 향하고 있었다. 질투에 타오르던 아리아마저 그 이야기에 이미 몰입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건 자신의 일어나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니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감각도 존재할 것이다.

“이겼으면 여기에는 안 있었겠죠?”

“...그...그렇군...”

너무 당연한 말이었겠지만, 레오에게만큼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본래라면 이기지 못했기에 돌아오지 못했던 장소.

나약하고 부족한 자신으로는 와서는 안 되는 자리에 자신은 서있었다.

“운 좋게도 몇 번은 밀어붙였죠. 그래도 그 녀석한테는 닿지 않았어요.”

자신이 간신히 위로 향하면, 그녀는 그 이상을 날았다. 마치 레오의 성장에 아리아 자신의 능력을 곱하는 것처럼.

“결국 저는 그곳을 떠났죠. 그러다가 이곳에 오게 됐고요. 재미없는 이야기죠? 그러니...”

레오나르도는 자신도 모르게 너무 깊은 이야기를 했다. 이 얘기는 여러 의미로 좋지 않았으니, 부탁한 연애 상담이나 끝내고...

“그 사람과는 어떻게 됐지? 지금도 연락하나?!”

<고모! 너무 흥분하셨어요...!>

크리스는 이런 이야기에는 사족을 못 썼다. 리오스와는 별개로 크리스는 이런 류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는 사족을 못 썼으니까.

리오스도 이 이야기의 결말을 듣고 싶었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첫사랑은 좋게 끝나는 법이 없더군요.”

***

그 뒤로는 다시 방랑 생활이었다. 수도에는 있기 힘들었기에 각종 지역을 오가며 수련을 매진했다.

혹한의 북부 지방부터 시작, 척박하고 사막 지역이 많은 서부, 각종 해안 지역부터 섬들까지 빠짐없이 순례를 돌았다.

도중에 같은 전사나 방랑자, 그 지역들의 토착민을 만나며 여러 지식을 얻고, 숙식을 대가로 지역의 게이트나 마물을 처리해주는 것으로 전투 경험 또한 미루지 않고 쌓아두었다.

예전에 루미네한테 들은 것인데, 지금 자신이 다니고 있는 여행의 장소들은 전설에 남아있던 초대의 용사가 성검의 시련을 받고, 마왕과 마왕군을 이기기 위해 모험을 떠났던 지역들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용사의 삶이 잠시나마 느껴져 아리아와의 삶도 다시 되새겨 보았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편지를 쓰게 된 건.

몇백 통을 몇 년 동안 써서 보냈다. 모두 다 다른 내용과 인사말로 채운, 여정의 일지이기도 한 편지.

답장은 한 번도 안 왔지만 말이다.

용사의 숨이 닿은 순례가 끝나자 레오는 동방으로 잠시 넘어갔다.

어차피 제국에 미련은 없었다.

차라리 동방의 무술을 배워, 지금의 기술과 결합시킨다면 자신에게 부족한 능력을 메꿀 수 있다면 그것도 수지는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봤느냐?’

동방에서 자신은 나름 이름을 날리는 협객이 되어있었다. 서양에서 왔지만 검은 머리를 지닌 수라, 그 잡종 같은 이를 찾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비무를 청하며 세 가지의 검술을 보여주었다.

‘삼재검법, 이 세 가지 형에는 모든 검술의 묘리가 담겨있지.’

당연했다. 가로베기, 세로베기, 찌르기가 없는 검법 따위는 없다. 그런 논리로 가면 덧셈과 뺄셈만으로 수학의 모든 묘리를 알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으하하, 맞는 말을 하는군. 서방에서 온 협객이여.’

지적이 오히려 자신의 뜻을 긍정하는 것 같아 노인은 호탕히 웃었다.

‘자네 말대로세. 기본을 아는 것으로는 초심자에 불과하지. 하지만 이 기본을 행하는 것은 근본에 다다른 무인일세.’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은 기본의 심화(深化),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영혼을 태우는 마음의 심화(心火), 이윽고 검의 날이 갈라지며 각각의 형을 동시에 보여준다.

만화경을 보는 것과 같은 황홀한 광경, 추구하는 결은 아리아와 대칭에 있었지만 동류의 감동이 밀려온다.

청년은 물었다. 어투는 경어가 되어있었다.

‘어째서... 저에게 그런 검술을 보여주시는 거죠?’

공포나 위압 같은 하찮은 감정에 굴복된 것이 아니었다.

진심어린 존경, 기본이자 근본을 보여준 검객에게 어린 협객은 존경을 표했다.

‘너에게서 나를 봤기 때문이다. 부디 이 경험을 의미있는 곳에 썼으면 좋겠군.’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노인은 파벌 간의 전쟁으로 자신의 고향을 잃은 무술인이었다.

하지만 그와 자신에게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직접 고향을 박차고 나온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검술은 헛되게 쓰여서는 안 되었다.

아직 돌아갈 고향은 남아있었으니까.

눈으로 삼재검법의 의미는 지식이 아닌, 행동을 통해서만 유의미한 학습이 가능했다.

묘리 자체는 단순하다.

힘, 방향, 각도, 속도가 모두 기본에 충실한 검술.

그렇기에 어려운 것이었다.

‘마치 선인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 같은 추상적인 묘리.

실체하고 있지만, 본질에 다가가는 순간 허상이 되는 듯한 수련이었다.

이는 아리아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야 익히는 맛이 나지.’

그 뒤로는 산에 들어가서 무기만을 휘둘렀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늘 실전에 집중했을 뿐, 이론과 기술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가 없었다.

필살의 기술이라는 건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자신에게는 아리아는 물론, 크리스나 다른 유명 기사들과 같은 고유적인 기술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발상을 전환해보면 삼재검법은 아주 기본적인 검술.

기본에서 근본을 찾는 정도로 부족하다면.

거슬러 올라가듯 기초에서 근원을 찾는다.

검술 뿐만 아니다.

모든 무술은 이어져 있다.

검술에 그치지 않고 격투, 창술, 궁술, 암기술과 같이 이미 익혀놓은 모든 기술에 접목이 가능한 응용형 필살기.

시작은 검법이었다.

삼재검법을 기본으로 시작해 차례로 냉병기의 무술을 연결한다. 육체를 사용하는 기술인 이상 겹치는 부분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만을 골라 차례로 항렬을 나누고, 범용성과 활용도를 높인다.

그 결과로 나온 열 가지 형태의 기본 기술.

베기로는 할(割) 참(斬), 주(誅), 작(斫)으로 네 종류,

찌르기로는 충(衝), 척(刺)으로 두 종류,

치기로는 타(打), 격(擊)으로 두 종류,

투척로는 투(投), 발사로는 사(射) 두 종류.

이 열 가지의 기술을 모두 통달하는 것을 끝으로 산에서 하산한다.

그렇게 만족을 하고 제국으로 돌아갔을 때.

라인하르트는 파멸해있었다.

***

“죽었어요. 아주 전에.”

옛 추억을 회상하며 레오나르도는 크리스(를 포함한 도청꾼들)에게 각색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죽었다고...?”

<...이건... 설마...>

‘...죽었다는 건...’

여기서 모두 직감했다. 이건 레오에게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기억이라고.

“...편지도 전부 무시하고, 통 연락이 없었죠.”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알았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불가능했던 것이다.

“염치 불고하고 용병단을 찾아갔을 때는, 아예 용병단 자체가 망해있었죠.”

라인하르트 뿐만 아니었다. 제국의 대부분이 거대한 전쟁과 재앙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폐허가 되어있었다.

지옥이나 연옥이라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있었을 당시의 찬란한 제국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라인하르트는 가관이다 못해 얼굴이 피로 일그러질 악몽의 환상이 피어오르는 지옥이 그려져 있었다.

“...용병단이...”

“이런 업계에서는 흔한 일이었죠.”

이후에 알게 된 것으로는 갑작스레 제국에서는 거대한 게이트가 창공에 열렸다고 했다. 시간은 대략 자신이 오기 몇 개월 전, 그것마저 정확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도 살아남은 이들마저 전부 미쳐있었으니까.

라인하르트의 저택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어떤 사용인들도, 하물며 기사들도 아니었다.

‘...레오나르도...니?’

‘...시리카 님.’

찬란해던 시절이 모두 갔다는 듯, 무척이나 수적해진 몰골로 시리카는 자신을 맞이했다.

‘...미안해요. 집안이 많이 누추해졌죠...?’

부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인하르트의 본가는 마치 버려진 폐가처럼 조용했고, 기사의 가문에는 기사는커녕 사용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리아는 어딨죠?’

그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만 있다면, 다시 아리아를 볼 수 있다면...

‘...아리아는... 이미 죽었단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계가 부서진 감각이었다.

의심치 않았던 법칙이 어그러졌으며, 믿었던 질서는 불타 사그라들었고, 기대었던 진리가 전부 붕괴되는 감각.

‘...아리아는 당신이 살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한번도...’

라인하르트의 현역들은 스스로의 명예,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서 게이트의 마물을 제거했다.

그리고 아리아스필은 그 게이트의 원흉을 없애고, 성검과 함께 자신을 불살라 게이트를 닫았다.

라인하르트의 잔해는 후방이나 최후방에 있었던 일부 방계나 원로원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덤으로 알게 된 것은.

아리아는 단 한번도 내 편지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원로원에서 주장한 언론 통제가 원인이었다.

원래는 제이론 라인하르트가 최소한의 통제는 하고 있었지만, 이후 노환으로 병사한 뒤로 원로회는 불안감에 도를 지나치는 만행을 수없이 저질러왔다.

언론 통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오판이었고 말이다.

시리카는 라인하르트에 있어봐야 늙은 노인들의 장기말로 있을 거라며, 부디 나가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현자에게 말했던 대로였다.

시리카가 이후에 자살하자 원로원들을 전부 몰살시켰고.

자신은 제국과 방계에게 계속 추격을 당했다.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건 쉬웠다.

너무나 쉽고, 가장 바라왔던 것이 죽음이었다.

빛도, 희망도 사라진 영원한 밤에 바라는 건 한없이 잠드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 영원한 어둠 속에서 생존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리아가 자신을 살기를 원했으니까.

그녀는 이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몸을 던졌으니까.

그러니까 생존했다.

그랬기에 세계를 위협하는 악을 베어왔다.

그렇게

70년이 지났다.

레오는 어느 동굴에서한 현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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