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92화 (92/248)

EP.92 사랑의 고민-3

이건 기도가 아니다.

하물며 목표도, 복수도 아니다.

더욱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무가치한

맹세일 뿐이다.

맹세가 약해질 때면 난 다시 처음을 되새긴다.

내가 ‘생존’에서 ‘삶’을 찾은 순간을.

그리고 모두를 잃은 끝을.

그걸 반복하면 텅 비어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무것도 잡지도, 지키지도 못한 나약한 손에 힘이 쥐어진다.

***

“...정말 있단 말인가?”

“...그렇게 경악할 일이에요? 어릴 때는 가벼운 첫사랑 정도는 있잖아요.”

물론 레오 자신의 첫사랑은 거기서도 가장 애매한 경계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그리움인지도 분간이 안 되기도 했고.

<우선 어디서 만났는지부터...>

생각지 못한 밑밥 질문에 입질이 걸리자 리오스는 황급히 플랜 A-2를 꺼내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만났는지 물어도 되겠나?”

“...어...그게...”

레오는 난색을

표하며 난감한 감정을 파도치듯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설명하기에는 인과의 관계며 회귀와 괴리가 심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얘기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분위기가 어색해질테니 나름의 타협책이 필요했다.

“...그냥은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크리스 님 준비해둔 첫사랑 얘기를...>

리오스와 크리스가 생각한 것은 교환 형태의 대화법이었다. 서로의 첫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대화의 신뢰도를 높이는 일종의 책략이었다.

“각색이 약간 있을 텐데, 괜찮을까요?”

그렇지만 레오나르도가 바라본 것은 조금 다른 곳에 있었다.

“각색이라...는 건...?”

“아무래도 그대로 말하는 건, 저나 그 친구 사생활에 조금 그렇다 보니까요.”

꽈악

문 너머로 아리아의 손이 거친 소리와 힘으로 쥐어진다. 아마 고도의 정령술과 신성술로 은신하지 않았더라면 방 너머의 모두가 알아챌만한 살기였다.

“...괜찮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말씀해드리죠. 어디까지나 각색이 많으니 너무 진지하게 듣지는 마세요.”

레오와 말과는 별개로 이 자리에서 직접 듣는 본인도, 엿듣는 사람도, 도청하는 인간들도 절대 가볍게 듣고 있지 않았다.

“...어...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하나...”

아무래도 가벼운 공감대만 형성하면 되니, 처음하고 약간의 과정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리 깊고 낭만적인 이야기도 아니니 길게 끌 것도 없었다.

“그니까 그 녀석을 만난 건, 제가 아직  용병 생활에 무렵이었죠.”

“...용병 시절의 동료인 건가?”

“동료... 그래요. 그렇겠네요.”

따지고 보면 각색된 내용이나 현실이나 시발점은 같았다. 내용의 용병 생활의 도중이나 용병 생활의 끝이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저 표정, 분명 거짓된 느낌은 아니야.’

각색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거기에 담긴 감정이 진실되었기 때문에 크리스는 레오의 말에서 쉽사리 거짓을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들어보죠!>

현명한 지시이기는 했으나 너무 흥분된 리오스의 목소리에 크리스는 심히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리오스는 이런 첫사랑 이야기에는 사족을 못 쓰는 기분 나쁜 로맨티스트였다.

“제가 용병일을 하고 있을 무렵, 도중에 만나서 싸우게 됐죠. 시비가 걸렸거든요.”

시비라면 시비였다. 따지고 보면 전후 설명 없이 나무에 사람 목을 따서 걸어놓고, 불량 경비원을 패서 허수아비처럼 걸어둔 자신에게도 책임은 컸지만 말이다.

“나름 기억에 남는 첫만남이었겠군.”

“남는 정도일까요. 기억에 박힌 정도였죠.”

빠뜩...으드득...

정령을 통해 시야를 공유해 보는 레오나르도의 표정은 정말로 추억에 빠진 애틋한 얼굴이었다.

자신에게조차 저런 얼굴을 자주 보인 적은 없었기에, 아리아스필은 질투심에 계속해서 이를 갈았다.

연적이다. 그년은 분명한 연적이었다.

“그럼 싸움은 레오 네가 이기고, 그후에 동료가...”

“그럴 리가요.”

너무나 당연스럽게 크리스가 레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자, 레오나르도는 바로 지적해 그녀의 전제를 수정했다.

“완패했어요. 완벽하게 졌죠.”

“...완패했다고? 네가?”

<...말도 안돼. 정말로...?>

‘...레오가...?’

그 확답을 듣자 직접 듣든 이도, 엿들던 이들도 전부 경악했다. 완패라는 표현을 그렇게 당연스럽게 쓰는 레오나르도는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저도 사람인데 지는 건 당연하죠. 그것도 나이도 어렸을 때인데.”

“...아, 상대방은 연상이었나?”

어렸을 때이니 연상의 상대라면 체급 차이로 레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크리스였다. 나름 괜찮은 추측이긴 했지만 상대방은 상식이나 규격을 숨쉬듯이 깨부수는 소녀였다.

“아뇨. 동갑이었죠.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고요. 처음이었거든요. 그렇게 완벽히 진 거는요.”

“...그...그런가? 정말 대단한 소녀였나보군.”

“그렇죠. 엄청난 녀석이었어요. 그 녀석은.”

너무 대단했고, 너무 빛나는 녀석이었다.

바라보다 못해 계속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

그 설명을 듣자, 아리아는 소꿉친구로서의 자신의 위치가 위협 받고 있는 것을 실시간을 체감했다.

위험하다.

거기에 자신은 가지지 못한 또다른 이점도 그 연적은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이긴 상대라... 순애 소설에서도 자주 나오는 전개죠. 이건 기억에 확실히 각인될 수밖에 없겠네요.>

뭔가 비전문적인 자료를 근거로 말하고 있는 리오스였지만, 크리스도 거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같은 또래에, 그렇게 압도적으로 자신을 패배시킨 이성이라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동료가 돼 같이 활동했나보군.”

“아뇨. 걔가 제 가슴팍에 어쩌다가 칼을 꽂았고, 전 치료 때문에 몇 주는 요양했죠.”

“...가슴에 칼을...?”

“나중에 아는 치료사한테 엄청 혼났죠. 1mm만 더 박혔으면 심장 혈관까지 상처가 나서 아예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라네요.”

역으로 그렇게 무식하게 응급처치를 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들었던 것도 처음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것도 쇼크사의 위험이 있으니 두 번 다시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라고 경고를 먹었다.

“...어...예상과는 한참 벗어나는 이야기군.”

“그러다 보니 기억에 남은 것도 있죠.”

아리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루미네에게 용사의 권리로 부탁해 레오에게 있는 모든 흉터를 없앨 수 있는지를 확인하겠다고 다짐했다.

심장 부근에 나 있는 흉터를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레오만큼은 자신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안 볼 줄 알았는데, 한 달이 지니고 가물가물해질 무렵 다시 보게 됐죠.”

<어디서 봤냐고 물어봐요. 그건 장소가 중요해요.>

리오스의 연애 회로는 과부하가 되기 직전까지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분명 식빵을 물고 아카데미에 가다가 부딪치고, 나중에 교실에 가서 전학생으로 만나는 전개와 흡사했다.

“어디서 봤는지...”

“그게 듣기에 따라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두 번째로 만난 장소는 흑마법사의 거처였죠.”

<...어?>

"...음?"

'...?'

흑마법사의 거처가 두 번째에 찾아온 만남의 장소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 그 다음의 이야기는 더욱더 놀라웠다. 마치 우연이 아닌,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극적이며 화려하고 반전까지 있었다.

“결국은 그 녀석 지인이 등장해서 절 구해주고, 저희는 안전하게 거처에서 탈출할 수 있었죠.”

“...흠... 그 지인은 분명 대단한 실력자겠군. 용병인 만큼 이명도 있을 게 분명해.”

따지고 보면 상황상 본인의 이야기였지만, 아는 눈치가 아님에도 본인에게 겉멋을 씌우는 게 여전한 크리스였다. 그건 분명 본능적인 자기애라고 레오나르도는 판단했다.

“그래서, 그 이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연애 상담이라는 표면적인 주제도 잊은 채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는 크리스였다. 각색이라는 걸 들었어도 몰입도가 높았기에 어느샌가

질투심에 살기를 날카롭게 갈고 있는 아리아스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이야기에 주의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전 그 지인과 그 녀석이 소속된 대형 용병단에 들어가게 되었죠.”

“...용병단이라...”

“그 후에는 거기에 적응하느라 바빴죠. 거기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잠시지만 잊을 수 있을 정도였죠.”

레오나르도는 회상했다.

라인하르트를 정말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를.

종자로서 괴롭힘도 당했고, 다른 기사들에게 멸시도 받았다.

199번을 싸우고, 199번을 졌다. 비공식적인 대련과 수련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이 많은 검합이 오고 갔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고 좋았다.

라인하르트, 그리고 용사인 그녀가 주었던 빛은 차게 얼어있는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힘들었어도, 홀로 용병으로 칼밥을 먹는 것보다는 좋았을 시절이었다.

간신히 그녀에게 한방 먹였을 때는 뛸 듯이 기뻤고, 기사로서의 성과를 냈을 때는 하늘을 날 것처럼 보람찼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군. 그럼 넌 왜 홀로 용병을 생활을 마친 거...”

<고모 잠시만요...! 그건...!>

리오스는 대화에 흐름에서 이미 눈치챘다. 이건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가장 안타깝고 애절하며 원하지 않는 결말일 거라는 것을.

“용병단에서는 한 가지 토벌 의뢰를 진행 중이었죠.”

갑작스럽게 고성 내부에 생긴 게이트를 처리하는 임무였다.

갓 성검을 내려받은 그녀로서는 적절한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에게만은.

“당시 저는 어렸기에 보조만 맡았어요.”

그때 청년이 된 자신은 고성 내부에 정찰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사실 그곳에는 최상급 마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이미 죽기 위한 미끼에 가까운 신세였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제가 사고를 쳤죠.”

자리 잡고 있던 것은 거대한 발록, 새끼 수준이 아니라 성체에서 한참을 벗어난 초대형 발록이었다.

정찰은커녕 거의 인사불성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은 죽기 살기로 싸우기 바빴다. 함께 정찰로 들어온 간신히 전우이자 동료가 된 기사들이 파리처럼 찢어졌기에 이성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고를 수습한 건 그 녀석이었어요.”

그 순간, 바깥에서 다른 마물을 처리하고 있던 그녀가 뛰어와 발록의 목을 일순에 베었다.

이미 시체가 된 4명의 동료, 너덜너덜해진 자신이 낸 잔상처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는 목을 쳤다.

“그 의뢰가 끝났을 때는 저는 일종의 처벌을 받게 되었어요. 용병업이 널널해보여도 빡빡한 구간도 있었거든요.”

그리고 자신은 원로회에 불려가게 되었다. 어설픈 정찰로 동료를 4명 죽게 만들고, 거기에 개인적인 관계를 빌미 삼아 용사인 그녀가 직접 나서게 만든 것에 대한 어이없는 문책이었다.

“저도 화가 난 나머지 용병단을 때려치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정말 화가 난 부분은 문책에 있지 않았다.

부모의 이름과 출신을 들먹인 부분에도 있지 않았다.

‘왜 네놈 같은 녀석을 구하기 위해 아리아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지? 설마 사적인 관계로...’

그 순간, 참아왔던 울분이 폭발했다. 기사의 명패도, 뭣도 다 집어던지고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붙잡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자신을 붙잡고 설득을 해보기 했다.

한 번의 화로 모든 걸 그르칠 셈인가.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모욕을 당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 모욕에 자신도 속으로는 납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스필에겐 그럴 이유는 없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오는 그 녀석에게.

제대로 찔려 본 적도 없는 그녀에게는.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중에 찾아왔을 때는 저는 물어봤죠.”

[...넌 왜 나를 신경 썼냐? 어릴 때의 인연? 아니면 불쌍해서? 나는... 너의 뭐야?]

다들 레오의 질문에 숨을 죽였다. 자신들에게 한 것이 아님에도, 자신에게 묻는 것 같았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답했지?”

“간단해요.”

[...동료야. 친구고.]

용사의 본보기다운 답변이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네.’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부족했고 갈증이 나는 대답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토를 달 자격 따위는 없었다.

‘그럼 간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서 더럽게 미안하게 됐어.’

날아온 건 용사의 장갑이었다.

장갑을 잡은 차강의 남자는 물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거지?

장갑을 던진 최강의 용사는 대답했다.

이게 우리가 납득하는 방식이잖아.

소년은 생각한다.

재수 없네. 한 번도 져본 적 없으면서.

한 번도 먼저 대결 신청을 한 적 없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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