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 사랑의 고민-2
[내가 이젠 진짜 미안해서 묻는데...]
현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레오나르도의 인생을 좌우하는 한 가지의 문제에 대해 물었다. 설마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한 남성의 본능적 정체성을
없앴는지에 대해 심히 걱정되며 죄악감을 느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너 혹시 현자의 돌 꽂고 진짜 고자 됐...]
<닥치세요. 그리고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에서,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는데, 현자는 그런 재수 없는 소리나 해대며 떠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몽정을 한 날에는 한 달 동안 넘게 놀려먹었고, 현자를 일시적으로 없앤 시간을 잘못 계산해 성욕을 푸는 장면을 봤을 때는
6개월은 넘게 놀려먹은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참 어이가 없기는 했다.
[...너 진심으로 묻는 거냐? 어제 일은 코푼 휴지조각마냥 쓰레기통에 집어던졌어?]
<어제 갑자기 다들 이마로 박수친 거요?>
솔직히 그건 1년은 지나도 기억날 진기명기였다. 그건 분명 답답하거나 어이가 없어서 한 행동일 텐데 상황의 맥락을 살펴보아도 그럴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말한 건 회귀 전의 경험을 토대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예의를 지킨 것일 뿐이니까.
<그리고 대화 내용 자체는 훈훈했잖아요.>
[...그래, 목이 훈훈하다 못해 불살라 막혔구나.]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요?>
라인하르트가 멀쩡히 있고, 가문 사람들도 제대로 있고, 빌어쳐먹을 원로원은 이미 처리해뒀고, 적들이 될만한 인물들은 대외적으로 마탑에 있는 4년 동안 미리 처리해뒀다.
거기에 아리아마저 인간답게 살아있으니 이보다 좋은 상황이 따로 또 있겠는가.
[...허...참...]
<왜요?>
[...아니다. 그냥 알아서 생각해.]
레오나르도의 비유가 너무 극단적이며 암울했기에, 그리고 그게 단순한 비유 같지가 않았기에 현자는 차마 더 일갈하지 않았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레오나르도의 문을 두드렸다.
“아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버지.”
이제는 저 호칭에 괴리감도 없었다. 당초에 이미 가문 사람들도 아인에게 ‘라인하르트’의 성을 못 주어 안달이 났는데, 자신이 어색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들어와도 돼.”
“감사합니다.”
아인은 작은 체구로 손을 뻗으며 약간 높은 문손잡이를 돌렸다. 레오나르도도 일어나 문에 다가가자 아인은 고개를 올리며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버지.”
“그래. 근데 좋은 아침에 와서 갑자기 현자님의 주둥아리를 잡는 건지 설명해줄 수 있겠니?”
[읍...읍읍...!]
이제는 음파값을 본인을 스스로 계산해 현자에게 충격을 주는 경지에 오른 아인이었다. 부모로서 나름 자랑스러워해야할 구간일 지도 몰라도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운 만큼 물어볼 필요는 꼭 있었다.
“현자님께 해야할 게 있습니다.”
“...혹시 300년 철통 사건에서, 한번 안 찾아온 이유에 ‘까먹었어’라고 대답했을 때와 비슷한 경우니?”
그때는 오히려 자신이 주도해서 현자를 두들겨 패는 깽판을 냈지만, 당시 아인도 마찬가지로 제법 감정이 실린 듯 보였다.
일종의 충격 효법이라고 생각한 레오나르도는 그 이후에 현자의 영체를 구타하는 폭력 행위를 허가해줬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유사합니다.”
이때 아인은 처음으로 ‘거짓이 아닌 거짓’을 행동으로서 익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현자님, 잘 대화하고 오세요.”
“이 시브...! 읍! 개애브브...!”
콰직
자신은 나름대로
현자의 말에 귀를 기울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인의 격렬한 재촉에 현자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주먹에 주둥이가 함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 양반은 삐지며 입을 집어넣는 것이 특기이니 굳이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감정은 물론 없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니, 나도 나가기는 하려고.”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왔으니 신세를 졌던 기사 선배나 후배, 그리고 사용인들에게도 제대로 인사를 하려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기도 할 겸해서 말이다.
“아뇨. 아버지는 쉬셔야 합니다.”
“...갑자기?”
아인이 갑자기 명령과 같은 조언을 하자 레오나르도는 약간 당황한 어투로 물었다. 평소 아인의 태도를 생각하면 오늘은 일은 지나치게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아...”
아인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의 경우는 그건 심리적 ‘당황’이었으며, 기계의 경우에는 계산 착오에 의한 ‘출력 속도 저하’일 것이다.
그리고 아인은
“...늘 과로를 하셨는데, 가끔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판단해 말씀드렸습니다.”
‘선의의 포장’ 또한 배웠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가르친 처세술 중 일부의 진실을 서두로 해 거짓으로 문장을 마무리하면 상대방이 속을 확률이 높다는 조언을 아인은 잊지 않고 응용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예리한 질문을 던지자 아인은 순간적으로 다시 출력 속도가 저하되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런 술수를 가르쳤다는 시점에서 레오나르도는 그 수법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었으니까.
턱
“...그건...?”
[...읍?]
레오나르도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직접 생각한 거면 칭찬해주려고. 아인, 우리 딸한테 걱정은 처음 받아보는 것 같아서. 고마워.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자상한 행동에 아인은 ‘당황’하고 말았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왜 아리아스필이 레오나르도에게 집착하듯이 사랑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주둥아리 놓고...끄으읍읍...]
뭔가 벌레 같은 것이 말한 눈치였지만, 쉬려고 한 레오나르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벌레 이하의 것이 말한 것일 테니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편히 쉬고 계십시오.”
“너무 멀리 가지는 마. 내가 아무리 단련했어도 마나의 총량은 적은 편이거든.”
아무리 회귀 전의 경험과 단련을 겪는다고 해도 자신의 육체 자체에는 본질적인 재능이 없었다.
아인이 처음 자신의 유전자를 분석했을 때도, ‘계산과는 별개로 너무 평균적이어서 실제 능률과는 괴리가 있다.’라고 평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자신의 서클과 코어의 개수는 각각 4개, 평균적으로는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유서깊은 기사 가문에서는 그 정도의 노력을 같은 시간 지속하면 몇 배는 더한 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증거가 이곳 라인하르트에 뼈저리게 새겨져 있었고 말이다.
“...그럼 난...”
레오나르도는 마탑에서 챙겨온 마법서를 몇 권 꺼냈다. 그리고 동시에 안경집에 넣어놓은 안경을 눈에 썼다.
레오나르도는 당연하게도 시력에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단련을 통해 평범한 기사보다도 먼 곳을 볼 수 있는 천리안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그 안경에 도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균적인 안경보다 도수가 높은 고굴절의 안경알이 장착되었기에 시야에는 역으로 방해되었다.
하지만 그게 레오가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훈련을 쉬는 것도 그러니까...”
오러로 눈의 근육을 조절해 책을 내용을 읽는다. 안경의 도수에 따라 안구의 근육힘을 조절해야하기에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훈련법이다.
이를 통해 동체시력도 향상할 수 있으며,눈의 자체를 망원경과 같은 구조로 강화시켜 초장거리에서의 저격도 가능했다.
마법서를 읽는 것은 단순히 복습의 의미도 있지만, 복잡한 용어가 있음에도 정신을 흩트리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도 너무 내용이 익숙해지면 의미가 없기는 하지.’
이 서적도 이미 정독한 지 10번이 넘기는 했다. ‘마법진: 완벽한 원으로 도달하는 고찰’은 읽을 때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책을 편식하는 것은 여러의미로 좋지 않으니 말이다.
똑똑
오늘은 손님이 많은 눈치였다. 일어난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두 명이나 손님이 찾아오다니 인기가 많다면 많은 것이었다.
“...누구시죠?”
“나다. 레오나르도.”
묘하게 애매했지만, 어설프게 무게를 잡은 목소리로 그 음색의 주인이 누구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크리스 님이신가요?”
“...그...렇다.”
목소리가 떠는 것이 기묘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었으니 레오나로도는 문으로 다가가 직접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크리스 님.”
“...아침부터 독서인가? 4년 사이에 많이 지적으로 변했군.”
크리스는 정말 놀란 눈치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지금 들고 있는 책은 제목으로보나, 표지로보나 상당히 고학력의 책으로 보였고, 덤으로 쓴 안경은 그의 인상을 더욱 지적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아무래도 학문을 쌓는 것도 중요한 소양이니까요. 제법 흥미로운 이론인데, 빌려드릴까요?”
“...아니, 난 마법보다는 무술에 집중하고 싶다.”
사실은 독서가 싫고, 그림도 없는 책은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멀미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크리스였다.
“그런가요? 예전에 서재를 봤을 때, 같은 저자의 책이 몇 권 있었는데, 하긴 이 책은 너무 이론적인 경우이기는 하죠.”
“...그렇지. 이론도 중요하지만 결국 판도를 가르는 건 실전이니까.”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는 읽는 것이 목적인 책들을 겉멋을 위해 서재에 몇 권 꽃아두는 것과 같이 실전으로 옮기는 것이 그에 맞는 예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혹시 찾아오신 이유가 있나요?”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크리스가 평소 보이는 행동을 생각하면 질문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게...말이다...”
심히 우물쭈물하는 모습, 평소의 크리스치고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태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괜찮냐는 질문에도 ‘흑암, 그 이명을 지닌 자로서 너의 영혼에 있는 그림자를 살피러 찾아왔다.’와 같은 구울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도 모자른데 말이다.
“...혹시 연애에 대한 상담은 가능하겠나?”
“...연애 상담 말입니까?”
어투는
침착했지만, 군대식 말투가 된 시점에서 레오나르도는 당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크리스가, 그 흑암이 사랑에 대해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다니 현자가 연애 경험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충격인 말이었다.
“...저한테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씀 안 드렸나요?”
“...그게...”
<대본대로만 해요. 대본대로만.>
피어싱 너머로 들리는 리오스의 목소리, 그녀는 평소에 다는 귀걸이에 리오스가 만든 무전 마도구를 부착했다.
이거로 레오와의 대화를 방 반대편에 있는 일행들이 도청하고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알잖나. 우리 가문 사람들.”
굳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짧은 말 한 마디가 더욱 설득력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시리카 님은요?”
레오나르도의 말은 다르게 말하면 시리카 이외에 가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상담하기에 영 미덥지 못하다는 의미도 되었다.
도청에 참여한 시리카를 제외한 몇몇 사람들은 화를 냈지만, 마음 한편으로 납득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걸 노리고 대본을 짠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시리카 님은 이미 외출하셨다. 최근 들어서 새로 생긴 상단과의 사교 모임으로 바쁘시더군.”
새빨간 거짓부렁이었다. 지금 반대방에 있는 시리카는 상단과의 사교 모임 대신 도청단의 사교 모임으로 몹시 바쁜 상황이었다.
“그런가요...? 그래도 저, 연애는 영 소질이 없는지라 조언 같은 건 해드릴 수가 없는데요.”
<알긴 아네요.>
다들 도청기 너머로 레오나르도의 말에 한마디씩 덧붙이기는 했다. 종류는 다양했지만 내용의 대부분은 꼬시는 건 잘하는 주제에 완벽하게 철벽을 치는 녀석이라고 지탄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저 의견을 듣고 싶은 거다. 아무래도... 나도 이런 쪽에는 거의 처음인지라...”
부자연스러운 태도가 사랑과 연관되니 반대로 더더욱 크리스의 연기를 살려주고 있었다. 본심이 이딴 이야기가 쪽팔려서였지만, 크리스의 표정은 누가 봐도 늦게 찾아온 사랑에 곤란한 여성 같았다.
“...고민 상담과 같은 형태도 괜찮으시다면... 해드릴 수는 있어요. 마탑에서도 그런 쪽은 종종 한 적이 있거든요.”
과목에 대해 걱정하는 후배나 차후 전문적인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인 선배 등, 나름대로 레오는 인맥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그런 고민들에 자신만의 조언을 해주었다.
그 덕에 청탑주의 딸로 떨어진 평판은 다시 올라갔고, 다른 학생 간의 교우 관계도 좋아지게 되었다.
<그걸로도 좋다고 하면 돼요.>
“...그걸로도 괜찮다.”
“...차 같은 건 없는지라, 혹시 밖에 가서...”
“아니다! 대화는 여기서 하지!”
갑작스레 언성이 높아지자 레오나르도는 다시 당황했다. 사실 이건 아리아나 다른 가문 기사들이 이를 들으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크리스 나름대로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임기응변에 가까웠다.
“...아... 알겠습니다.”
<우선 진정하세요. 레오나르도 이런 쪽으로 감이 좋은지라 들키면 그대로 끝이라고요.>
그렇게 리오스는 경고와 주의를 주며 크리스에게 이야기를 진행시킬 대본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우선은 첫사랑 같은 내용을 꺼내기는 어려...>
“...그...혹시 레오나르도 넌... 첫사랑이... 있나?”
이 순간, 지시를
내린 쪽과 받는 쪽의 상황이 잘못 맞물렸다는 것을 인식했다. 대본에는 분명 ‘첫사랑’이라는 주제가 1번이었지만, 리오스가 원한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명줄실과 같이 섬세히 대화의 질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행실을 보면 분명 첫사랑 따위는 없을 것이...
“...첫사랑인가요. 아예 없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는 없네요.”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첫사랑이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뭐, 결국 대차게 까였지만요.”
...라고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웃음을 지었다. 그건 분명 자연스러운 미소였지만 기쁨에 우러나오는 웃음은 아니었다.
이건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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