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89화 (89/248)

EP.89 속도위반-4

세상에는 정말 갖은 고문이 있다.

육체적 고문부터 정신적 고문까지.

아마 고문을 하는 법과 당하는 법에 한해서는 자신은 아리아조차도 뛰어넘는 1인자일 것이다.

육체적 고문 중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닥의 온도가 1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유지된 뜨거운 방에서 감각이 유지될 정도로만 산소를 제거해 고통을 최대로 자극하는 방식이었고.

정신적 고문 중 제일 힘들었던 것은 창문도, 빛도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최대한 밥을 굶기고 잠은 잘 때마다 몽마와 약품을 사용해 이상 증세를 만들거나 악몽을 꾸게 만드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아인입니다. 글라디오 님.”

“...어...음... 그렇구나.”

말 한마디가 오갈 때마다 글라디오가 어안이 벙벙한 눈치로 계속해서 자신을 훑고 있는 것은, 매시간 인두로 화상을 내는 것보다 고통스러웠고.

“...아버지는 누구지?”

크리스는 평소의 겉멋은 온데간데없는 채로 체할 정도로 빠르고 많이 수면이 떨리는 차에 설탕을 가득 집어넣고 마시는 꼴을 보니 위장의 표피를 사포로 긁어대는 것 같았다.

“레오나르도 님입니다. 흑암 크리스 님.”

“...어머니 쪽은.”

“유대 관계 및 호적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나 생물학적으로는 어머니의 위치에 가까운 사람은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 님이십니다. 집행기사단장 마르켄 님.”

아리아가 뒤늦게 머쓱하며 얼굴을 붉힐 때, 자신은 내장이 내출혈로 붉어지는 기분이었고.

마르켄이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쉴 때마다, 자신은 눈을 대못으로 찌르고 각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아인 씨...?”

“경칭은 생략하셔도 됩니다. 시리카 부인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인이 가장 건조하고 냉정하게 선을 긋고 있는다는 것이었다.

“...리오스.”

마찬가지로 골머리를 썩는 눈치인 시리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리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전생에도 두어번 밖에 보지 않았다.

“예! 어머니!”

“알고 있었지?”

그리고 무인이 아닌 사람 중 유일하게 저 철없는 두 자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아리아가 온다는 건 몰랐죠? 계시를 바로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한지라...”

그 말인즉슨 아인이 어떤 존재인지, 온다는 건 알고 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레오의

인내심이 조금이라도 없었더라면 리오스가 고유 마법의 이름을 바꾸듯 리오스의 순애 소설들의 결말 부분만 전부 비극 전개나 연인

뺏기기 전개로 수정버렸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고유 마법을 멋대로 바꿔 등록한 것처럼.

“사과드려. 레오 군께.”

시리카의 말에 리오스는 실눈을 살짝 뜨며 미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입에서 사과를 꺼냈다. 평소의 행색을 생각하면 지극히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그게... 미안해. 아우... 나도 아예 안 꺼낸 건 아닌데... 아니, 이건 변명이네. 미안해. 아우...”

어차피 리오스에겐 큰 기대도 안 했으니 그리 실망도 안 했다. 차라리 대놓고 ‘레오랑 아리아 사이에 애가 생겼어요.’라고 안 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우선 상황은 정리해드린 대로입니다.”

아인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게나마 끝낸 뒤였다. 관계는커녕 전혀 평범하지 않은 속도위반을 몇 문장으로 짧게 요약하는 것은 아마 현자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솔직히 너무 요약하면 신뢰성이 더 없으니까.]

<누구 덕분에요.>

[...나라고 그렇게 될 줄 알았겠냐?]

현자의 설명에 따르면 만들었을 당시의 아인은, 아니, 타입 디아트는 생명체라고 부르기 어려운 고등 기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보관 상태에 오류가 있었는지, 아니고 장기간 동안 새로운 형질이 생긴 것인지 현자가 입력한 육체 정보는 소실되었고. 그로 인해서인지 인지 체계도 변화되어 있었다.

<그게 더 괘씸해요. 이 양반아.>

결국 매한가지로 양심은 사료로 갈아서 버린 개짓거리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생명을 유린한 죄는 무거운 법이죠.}

[생명을 유린한 게 아니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현자는 입을 열었다. 저렇게 보여도 나름 마법사로서의 철학은 있을지도 모를 것...

[기만한 거라고.]

이 정도면 쓰레기가 아니라 폐기물이었다.

부앙, 휙, 부웅

레오가 사념으로 신호를 보내자 아인은 현자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허공에서 삽질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아, 괜찮아요. 아주 옹졸하게 작고 흉측한 벌레가 있어서 아인이 직접 잡는 거거든요. 이미 잡았으니까 보이지는 않을 거에요.”

레오 자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인이 열심히 해주었는데 말리거나 자제를 시키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가, 그래서 마탑과 신전에서 아인은 어떻게 되었지?”

“우선 마탑에서는 신전 측의 의견에 맡기는 걸로 투표가 마무리됐고, 신전 측에서는...”

레오나르도는 신전 측에서 결정한 내용이 담긴 판결문을 꺼냈다.

“...유사 정령이라...”

“아마 마탑에서 토론의 자료로 사용된 ‘동방의 도깨비’와 ‘에고 웨폰’에 대한 논문에 착안해서 인증된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반발도 없었고요.”

동방에서 온 마탑의

후배가 도움을 준 내용으로, 오래된 유물이 마나에 스스로 자아를 가져 육체적인 형상이나 지능을 획득할 경우, 이는 정령체의 존재

형성과 동일해 유사 정령체로 불리는 게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마탑과 신전 모두 온건한 방향성으로 의견을 이해시키고 이끌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건가.”

마르켄은 턱을 쓸더니, 혀를 찼다. 혀가 아리고 써서 도저히 차지 않고는 못 배겼다.

“...너에게는 따지고 싶은 게 수도 없이 많다. 왜 내 손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가부터 시작해 마탑에 대한 중요 사실은 전부 가지치기해서 편지를 주기적 보낸 건지에 대해서도 말이야.”

마르켄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숙인 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원 때와 비슷한 감은 있었지만, 그 상황과는 결 자체가 달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이 화가 나는 건 단 한 가지다.”

그 말에 자연스럽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여기서 가장 크게 생각했던 고비는 단연 마르켄이라 말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보고.

보고를 하지 않았기에 끼치는 누를 생각하면 집행기사단장 입장에서는 충분히 처벌할 만한 명분이 있었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아리아의 관계.

머리카락에 대한 것도 그렇고, 지금 자신과 아리아스필의 관계는 꼬일대로 꼬여있었다. 도저히 기사와 아가씨라는 관계로는 해명이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

“...예?”

마르켄은 한숨을 내쉬며 레오나르도를 노려보았다.

“가문에 도움을 청할 기회도 많았는데, 어째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미운 것이 아닌, 미운 정이 배여있는 눈빛이었다.

“...그게...”

너무 예상 외의 질문이자 레오는 오히려 말문이 막혔는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떨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에 누가 되지 않나 싶어...”

“누? 라인하르트가 고작 너 한 명에게 누가 끼쳐질 것 같나?”

몇 년도 더 된, 마르켄과 무기고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말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햇병아리’에서 ‘너’로 바뀌었다는 점일까.

“바보 같은 놈, 네가 좋든 싫든 너도 가문의 중진이다. 지금이라도 자기 입장을 자각해라.”

레오나르도가 아무리 둔감해도 그런 말의 숨겨진 뜻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정말...괜찮겠습니까?”

“훗, 괜찮다 못해 이젠 영광이기까지 하지. 다른 가문에서 너와 같은 마검사를 모실 수 있다면 아마 전재산을 내도 모자랄 거다.”

흑암 크리스마저 이견없이 그 말에 동의했다. 아니, 지금까지의 행동과 말투로 봐선 마르켄이 크리스의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인이도 라인하르트의 피가 섞인 샘이니까. 우리들도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니잖아?”

위로가 감사하기는 했지만, 그걸 알면 빨리 말했으면 나을 뻔했던 리오스였다. 그런 리오스에게 눈빛을 쏘아대자 작게나마 ‘...미안...’이라고 말하며 실눈으로 레오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것도 없이 아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것 참, 가주로서도 민망하지 않은가. 레오나르도 군.”

가주 글라디오는 이내 나름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인을 바라보았다. 아인은 무표정했지만 눈에 생기가 깃든 것으로 보아, 라인하르트 가의 반응에 반감은 없는 듯 보였다.

“...혼자서 자식을 키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같이 고민을 나누는 것도 좋을 거에요.”

시리카도 자식을 키운 부모의 입장으로서 레오나르도의 마음을 편린으로나마 이해하며 어루만져주었다.

예상과는 판이한 반응에 레오나르도는 계속해서 눈을 끔벅이며 자신의 청력을 몇 번이고 재확인했다.

레오나르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라인하르트에 있는 모든 식솔들과 사용인들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그에게 빚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낮은 신분에서 시작해, 재능에 취하지 않고 노력만으로 이 자리와 위치에 올라온 것은, 더 이상 무시할 것이 아닌, 오히려 긍지높게 여겨야할 업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보다 리오스가 일찍 가문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레오나르도가 가문을 위해 해준 일과 지킨 도리와 의리, 그리고 현재 마탑에서

보이는 업적과 노력을 말과 실제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주며 그 위상을 더더욱 드높였으니.

라인하르트 입장에서는 그리고 직계 혈통의 입장에서도 레오나르도의 존재를 환영하면 환영했지 거부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래서 아우, 앞으로관계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오빠...! 그런 얘기는...”

아리아는 약간 붉어진 얼굴을 돌리며 힐끔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아리아의 감정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조금 부담스럽잖아...”

너무 티가 났으니까.

‘...부담스럽기는. 눈에서 이미 꿀순애가 떨어지고 있는데.’

‘...베개에서 레오 기사님 사진을 치우고 말하면 그나마 모르는 척이라도 할텐데...’

‘...강호는 강호와 이어지는 법이지. 아리아와 걸맞는 강호는 레오나르도 밖에 없어.’

‘...내 손녀딸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 저런 녀석이라니... 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역시...레오나르도를 곁에 둔 건 실수가 아니었던 것 같군... 딸이 사람다워져서 정말 다행이야.’

‘...아리아가 남자를 잘 다룰 수 있는 법을 알려줘야겠네... 특히나 밤기술은...’

{‘...루벤과는 다른 결말이라... 현자... 당신은 이걸 바란 것이었군요... 떠난 것이 조금은 용서는 됩니다...’}

[‘하...드디어 이 병신같은 고자짓이 끝나는구나. 까놓고 이걸 모를 등신은...’]

레오나르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부담스럽지 않게 처신을 잘 하겠습니다. 아인에게도 부끄럽지 않게요.”

짜악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의 이마를 쳤다. 그 중에는 아인도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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