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속도위반-3
기차 안에서의 회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누스는 레오가 아리아가 신전으로 들어간 뒤로는 오기 힘들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 역정을 냈다던가.
그래도 보내는 돈이 두둑하고 연락 소식이 세세해서 딘이 그런 아누스를 말리고 편지로나마 화해시켰다던가.
아리아는 아예 본인 쪽에서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해서 2시간 뒤에 땅을 치고 후회를 했다던가.
루미네 같은 경우에는 그런 아리아의 탈주를 말리고 달래주는 게 일상이었다고 나름대로의 한탄을 했다.
그 중 유일하게 입을 다문 것은 한 청년과 그녀의 딸 뿐이었다.
[그 예언자가 신경 쓰이냐?]
현자는 영체로 말하는 대신, 현자의 돌이 있는 내부에서 소리만을 내었다. 이걸로 바깥 사람들은 이 대화를 듣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요.>
만약 자신이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해서 예언자를 만났다면 이 현상에는 흥미 또는 호기심을 품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예언가가 예지한 일의 맥락은 회귀 전, 그것도 일어나기 전의 일을 연결한 예언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노린 것처럼 절묘해.]
지금 아누스와 딘을 만난 것조차 보이지 않는 인과율이 레오를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만나보는 게 답이겠죠.>
[그래, 답은 아니겠지만 푸는 공식은 될 테지.]
결단을 내린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저 늘 그랬듯 행동으로 옮길 뿐.
“촌장님.”
다들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위화감을 느낄 무렵, 레오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시선이 레오에게로 집중되었다.
“혹시 저희도 그 예언가 친구분을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왜?”
옆에서 대화를 주도하던 딘은 뜬금없는 레오의 말에 의문을 던졌다. 오히려 덤덤하게 이해한 것은 부탁을 받은 아누스였다.
“그래. 상관없을 게다.”
“근데 무슨 일로 부탁드린 거야? 혹시 예언 받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의 일이라던가...”
그 말에 아리아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은근히 레오의 대답을 기대했다. 아마 궁합이나 연애 운세와 같은 낭만적이며 풋풋한 생각을 품고 있을 테지.
“예언으로 계시를 해석할 수 있다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물론 표면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레오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 사무적인 태도에 실망한 것일까, 아리아는 조금 주눅든 얼굴로 홍조를 치웠다.
“확실히 계시하고 예언은 밀접한 연관이 있죠.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근데 괜찮아? 그 사람...”
“따지고 보면 합법이니 상관없겠지.”
‘따지고 보면’이라는 말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합법이라는 점에서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문제라고 해봐도 성인인 루미네와 용사인 아리아가 곁에 있다는 점에서 걸리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아누스는 점차 창문을 내다보며 시야에 들어오는 역을 가리켰다.
“그 라인하르트 가문을 가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어...”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민했다. 무례할 수도 있는 오해가 있더라도 바로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누스와 딘이 민폐라는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문 쪽이 대부분 제정신이 아닌데...]
현자의 말대로 문제는 가문 쪽에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광기에 찬 가문의 행동이 드러났다.
<훗. 제 이름은 크리스, 흑암의 이명을 지닌 기사입니다. 두 분의 이명은 어떻게 되시는지? 크큭...>
<저기, 레오나르도 옛날 얘기하고 첫사랑 얘기 좀 해주세요! 순애 만세!>
<너희 같은 놈들에게 내 손녀를 내줄 수는 없다!!!>
그야말로 혼돈과 광기, 아누스와 딘이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촌장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죠.”
그 전에 다행히 딘이 먼저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해주었다.
“지금은 용사가 돼서 돌아온 아가씨를 맞이하느라 바쁠 텐데, 갑자기 찾아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담스럽죠.”
지극히 상식적인 지적이어서 다행이었다. 마을을 나갈 때 비겁하게 쓰러뜨린 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다른 주소로 돈과 고기를 보내준 것이 여기서 빛을 발휘했다.
“아, 전 괜찮아요. 저택에 사용인도 많은지라 접대를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에요.”
하지만 아리아는 간신히 부지한 레오의 정신줄에 줄칼로 비벼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악의도 없었기에 자신 쪽에서 반박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아인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집안 뒤집어질 텐데, 거기서 끼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오해가 생길 것 같은지라...”
오해 정도가 아니라, 아마 없던 누명에 곤란하다 못해 혼란할 것이다.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집안이다.
“어차피 오랜만에 읍내에 왔으니 바로는 안 갈 거야. 예언자 분이 돌아가시는 것도 오늘이나 내일 같이 바로는 아니니까 적당히 여유는 가지자고.”
그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에 레오나르도는 진심으로 의형제의 인연을 느꼈다. 아마 지금 이어진 연의 무게는 사라진 어머니의 것과도 필적할 것이다.
“열차가 정차합니다. 내릴 준비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제동음이 울리며 기차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열차가 정지하며 차장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은 차례로 하차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아인아, 나중에 삼촌 없는 동안 아빠 말 잘 들어.”
딘은 레오의 옆에 있는 무표정한 아인을 쓰다듬었다.
이젠 아버지라는 것에 부정하는 것도 지쳤지만, 딘이 해준 행동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딘 삼촌. 삼촌 덕분에 아버지의 심박수가 많이 안정됐습니다.”
“...어...음... 말하는 건 조금 쉽게 하자. 삼촌 가방끈이 짧아서.”
그렇게 당황한 눈치로 아인을 쓰다듬으며 레오나르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일은 힘들지만, 표정은 훨씬 낫다 야.”
등을 몇 번 두드려주며 딘은 씨익 웃어보였다. 이제는 몸을 숙이지 않아도 등을 두드려줄 수 있을 정도로 커버린 동생을 보니 시원하면서도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고마워. 형, 나중에 비싼 밥 많이 사줄게.”
“...음... 밥보다는...”
딘은 옆쪽에서 아누스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루미네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역에 설치된 시계의 금속에 반사되어 루미네의 날개를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혹시 여자 소개되냐?”
이윽고 레오는 성인에 대한 교리와 루미네의 외모가 감춘 성별을 알려주었고, 딘은 자신의 순정이 바사삭 붕괴하는 걸 느꼈다.
나중에 마탑에서 알게 된 선후배들이라도 소개해줘야겠다고 짧게나마 다짐한 레오였다.
“그럼 가마. 참한 아가씨 고생시키지 말고.”
“예예, 여부 있겠습니까.”
약간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레오는 아누스에게 대답했다. 단순히 건방지게 놀리는 것이 아닌, 오랜만에 만난 편한 상대에게 편히 말하는 것이 기뻐 장난기가 생긴 것이었다.
“말은 잘하는군.”
“이젠 능력도 있답니다.”
뼈가 있다 못해 근육과 신경마저 있는 농담이었다.
그 흰 농담에 피식 웃으며 아누스는 딘을 옆에 두며 갈 길을 갔다. 그러고 도중 문득 걸음을 늦추며 아누스는 걸음을 멈췄다.
“...지루하지는 않나? 찾고 싶은 건 찾았고?”
거의 정지한 것 같은 느릿한 걸음에 레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찾았어요.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네요.”
“...그럼 됐다. 늦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
뒤를 돌아본 채 앞으로 걸은 아누스는 시원섭섭한 마음을 나지막이 느꼈다.
“괜찮겠어요?”
“뭐가 말이냐?”
섭섭한 감정이 시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레오가 계속 위험한 일 한다고 한 소리 하려고 벼르셨잖아요.”
“용병질하다가 객사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 말을 안 꺼낸 것 뿐이지.”
하지만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그 섭섭한 상황에 한편으로 안심되었다는 걸.
“잘 컸네요. 레오나르도는요.”
“...다행이지. 저렇게 웃을 수 있어서.”
본인이 나름대로 깨달았기 때문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시원섭섭한 건 안타깝게도 아누스와 딘 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으로 가는 레오나르도에게는 초점이 ‘시원’이 아닌 ‘섭섭’으로 중점으로 묶여있었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왜 그렇게 죽상이야?]
<진짜로 이게 ‘죽을 상’이 될 수도 있어서요.>
작은 고비는 넘겼지만, 다음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같은 시련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르켄은 물론이고, 가주 글라디오도 칼을 씻고 갈고 있을 것이었다. 크리스나 시리카는 아마도 괜찮겠지만, 복병인 리오스의 존재를 생각하면 간과할 수 없는 요소였다.
“...도착했네...! 정말 오랜만이야...”
감회가 새로운 표정으로 아리아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레오나르도는 몇 번을 봐도 거대하고 웅대하고 느낀 저택이었지만 아리아의 눈에는 항상 친숙한 자신의 집이었다.
“근데 괜찮을까요? 제대로 연락도 안 보냈는데...”
사실상 계시가 내려오자마자 돌아온 것이어서, 전보가 가문에 전해졌는나 모르겠다.
청탑주 딸의 미친짓 이후로 워프 게이트 사용은 일시적으로 동결된 것이나 다름없어서 현재로서는 기차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이동수단이었다.
“괜찮겠지. 오히려 파티나 환영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그것대로 곤란하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인데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레오 본인으로서는 아인에 대해 설명할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드디어 왔군.”
저택의 정문에 서있는 것은 쓸데없이 길고 검은 롱코트를 입은 채 불도 피지 않은 시가를 물고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크리스 님.”
“...아리아?”
물고 있던 시가가 떨어지며 크리스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아리아를 바라봤다. 옆에 있는 루미네를 보더니 이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설...설마 계시를 받은 거냐?”
아리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제대로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성검을 들어올렸다. 성검의 신성한 빛은 주변을 뒤덮으며 귀환한 용사의 영광을 알렸다.
“...정말 아름답군...! 자랑스럽구나! 아리아!”
“아직 부족해요. 레오는 마탑에서 수행해서 마법검을 자유롭게 다루거든요!”
그 말에 크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화려한 것에 끌리는 동심을 지닌 순수한 여성이었다.
“리오스가 말한대로군.”
“예? 리오스 님이 설명하셨어요?”
이런 것까지는 설명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였다.
“물론. 네가 ‘무예와 마법의 아리아’를 완성하고 마탑에서 소탑주로 불린 것까지 빠짐없이 말하더군.”
“...잠깐... 제 고유 마법 이름을 그렇게 알고 있어요?”
“맞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마탑 고유 마법 사전에 등록돼 있습니다.”
리오스를 살려둘 이유가 하나 줄고, 죽여야할 이유가 확실하게 하나 생겼다.
“그 아이는 누구지? 처음 보는군.”
역으로 아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인지, 크리스는로브를 뒤집어 쓴 아인을 보며 물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전 아인입니다.”
“...아인...? 부모가 어떻게...”
여기선 최대한 자연스럽고 건조하게 설명해야...
“저랑 레오 딸이에요! 귀엽죠!?”
[끝났네.]
내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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