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속도위반-2
멀미가 난다.
기차는 분명 순탄하게 전진 중일 테고, 좌석도 분명 특석으로 사서 앉았을 텐데.
어째서 가시 방석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아인입니다.”
“아빠는 누구고.”
“레오나르도 님입니다.”
한 촌락의 촌장은 그 말에 검은 머리의 손자를 노려보았고, 마을의 늑대 사냥꾼은 호탕하게 낄낄대기를 바빴다.
“오! 아빠가 힘을 많이 썼나봐?”
“네,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크핫...!”
갑자기 개과 동물에 대한 살의가 치솟았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옆좌석의 노파가 내보인 살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코빼기도 얘기 안 하더니, 애부터 낳은 거냐? 쯧...”
이게 낳았다는 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파이십니다. 그래서 전 엄마라는 호칭 대신에 아리아 언니라고 부르죠.”
맞는 설명이긴 한데, 그렇게 차가운 말투로 전후사정 없이 요약하니 자신이 엄청난 쓰레기가 된 것 같은 레오나르도였다.
“...야, 레오나르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꽈악
“너 양심 어디에 팔아먹었냐?!”
먼저 딘이 레오의 멱살을 붙잡은 뒤에.
퍽, 퍽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아누스가 레오의 등짝을 지팡이로 매를 날렸다. 흡사 어린 소년을 회초리로 혼내는 것 같았다.
“고정해주십쇼. 할머니. 삼촌.”
아인의 부탁에 증손녀가 생긴 아누스 할머니와 조카가 생긴 딘 삼촌은 잠시 그 초롱초롱하게 생기 없는 눈을 보더니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애는 잘못이 없지... 애는 잘못이 없어...”
누가 보면 자신이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도 쾌락 없는 책임의 피해자였다.
“애가 예쁘니까 봐준다... 으휴...”
누가 보면 자신이 쾌락에 미쳐 이러는 줄 알겠다. 하긴 자신이더라도 미혼에 여자친구도 없고, 경험도 없지만 친딸은 있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을 것이다.
“미안. 삼촌이 너무 아빠한테 화냈지?”
“아뇨. 괜찮습니다. 아버지도 수긍하시는 눈치였으니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대화가 정말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발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옷을 안 갈아입혔네? 괜찮아?”
책임만 있는 애꿎은 사람만 패느라 정작 아인에게는 제대로 신경쓰지는 않았다.
“옷은...”
어떠냐고 묻기도 전에 아누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음료를 엎지른 딘도 똑같이 경악으로 입을 벌렸다.
“...언제 말렸니?”
“처음부터 전 괜찮았습니다. 이 로브 자체가 특수 소재입니다.”
아인이 화려한 옷이 아닌, 수수하게 보이는 회색의 옷을 고집한 이유는 이 옷의 능력 때문이었다.
로브에는 혹시 모를 암살이나 습격에 대비해 각종 물리 방어 인챈트 및 속성 마법에도 내성을 겸비해두었고.
변신을 사용할 때도 옷이 찢어지지 않도록 아인 본인의 머리카락과 같은 성분을 추가해 변신과 동시에 변화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형상기억 소재로 제작되었다.
“...어...음...”
“물론 방수 및 건조 능력도 존재하기에 아까 그 음료에 대한 피해가 없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딱딱한 아인의 말투에도 다들 위화감을 느낀 것일까, 아누스와 딘 모두 황당하게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진짜 촌놈이고 몰라서 그러는데... 귀족은 원래 그런 옷을 입어...?”
귀족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로는 맞는 말이긴 하겠지만, 아마 황실하고 직접적인 연줄이 있지는 않는 이상 보지도 못할 옷이었다.
게다가 이건 직접 만든 수제품이기도 했고.
“일반적으로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암살 및 납치의 위험이 농후했기에 아버지 쪽에서 특별 조치를 내린 것이죠.”
“...암살에 납치라고...?”
“...알 만하군. 어린 나이에 벌써 가문의 암투에 짓눌리다니...”
...뭔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소설에서 나올 법한 권력 전쟁에 말려든 느낌처럼 말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사실 그편이 믿기 쉽기는 하겠지. 옆에 있는 아이가 초고대에 탄생한 사역마이자 내 친딸이라는 걸 누가 바로 눈치채고 믿겠는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힘들면 설명 안 해도 돼. 우리도 눈치가 없진 않으니까.”
의리로 똘똘 뭉친 표정으로 딘은 송곳니가 드러난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기는 한데, 그런 게 정말 아니었다.
“...내가 미안하네. 아가씨. 젊은 나이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어지는 아누스의 안쓰러운 눈빛, 아인의 외모는 적게 잡아도 10살 이하였으니까.
아마 어린 나이에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이겠지. 까놓고 말해 머리를 자른 것밖에는 한 게 없지만.
“...괜찮아요... 저도... 무척... 결혼하고... 싶었는데...”
왜 저기서 슬프고 안쓰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가, 마치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데 이 권력의 어둠 속에서 비극에 빠진 여주인공 같지 않은가.
왜 아누스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아의 등을 토닥여줄까, 처음으로 아리아스필이 불여시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솔직히 직접 낳은 자식도 아니고, 키운 것도 태반은 자신이었다.
“저기... 아무래도 설명해야겠죠?”
[뭐? 여기가 제일 재밌는 부분인데, 왜 멈춰?]
{루미네 수사, 저도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한 소녀의 사랑을 위해서는 침묵을 유지할 필요도 있습니다.}
저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새끼들은 왜 이런 때만 죽이 맞는 것일까, 이번 기회에 진짜 죽고 싶어서 그러나.
***
혼돈으로 가득 찬 막장에서 한 줄기의 빛처럼 내려온 신의 성인은 이 지옥과 같은 영겁의 가시방석을 끝내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깨달음을 저 중생들에게 전파했다.
그 중생들은 불신에 차있었으나 한 사제의 생생한 열변 덕분인지 점차 저 불신의 인간들의 숨겨진 사실에 경악하며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오해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게 말이 돼?”
아직 불신하는 건 여전하지만 말이다.
“이 좁은 객실 터지게 아예 와이번으로 변신시킬 수는 없잖아.”
하도 믿지 않는 눈치여서 아예 딘의 손톱을 살짝 긁는 것으로 아인의 모습을 늑대 인간으로 변신시키고서야 저 둘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니 그보다... 너, 생각보다 엄청난 일에 말려든 것 같네...”
“그런 셈이지.”
“...그렇게 태연히 넘길 일이야?”
사실 딘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지금 자신의 왼편에는 신전과 신을 대표하는 인사인 성인 루미네가 있었고, 오른편에는 신의 화신이자 인류의 영웅인 용사 아라아스필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용사하고는 기묘한 관계로 자식도 있었고.
“...용사라, 어렸을 때도 출중한 아가씨라고는 생각했지만 진짜 용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아... 그렇죠... 아무래도 신탁이라는 게 갑작스럽다 보니까요.”
하루 아침에 성검이 손에 쥐어졌을 때는 다들 난리도 아니었다. 다들 복잡해진 일을 정리하느라 바빴지.
“너는...마탑에 있었다고? 어디 마탑에...?”
“소속된 건 아니고... 정확히 마탑 사이마다 공식적으로 걸터앉은 거지.”
특수 마법 허가증의 조항과 현자의 유산을 찾는다는 명분을 이용해 레오는 어느 마탑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각 마탑의 수업을 원할 때 들을 수 있었다.
이 회색 로브를 만드는 것도 마도구학이 전문인 흑색 마탑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엄청 핀잔 받겠는데?”
딘의 추측은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당시 레오는 마탑의 회색분자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역으로 보호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각종 논문 및 고유 마법을 통한 성과로 논란을 종식시켰습니다. 반대로 각 마탑 간의 지식 교류 및 의견 조율도 맡기도 할 정도였죠.”
딱딱한 말투였으나 아인에게 칭찬을 들으니 나름 기분이 좋았다.
원래는 하급반 학생들 간의 지식적 불화가 심해 가끔 중재하는 정도였지만, 그게 제법 유명해져 아예 상급반이나 때때로 교수까지도 의견에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
“...어쩐지 집으로 보내는 돈이 두둑해진다 했더니...”
“그러면 그냥 워프 게이트 쓰지 그랬어. 생활비 쓰고 남은 돈이면 충분히 쓸 수 있는데.”
달마다 보내는 돈의 금화 수를 생각하면 그리 오랜 기간 모을 필요도 없었다. 아마 짧으면 한 달, 길어도 두 달만 모으면 충분히 탈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도 말했는데, 촌장님이 반대했어. 모아서 니 혼수라도...”
콱...
아누스의 지팡이가 딘의 앞발을 짓눌렀다. 통증에 딘은 비명 대신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어차피 수도까지 가는데 시간도 얼마 안 걸리니 아깝게 돈을 안 쓴 거일 뿐이다.”
“그래도 연세도 있으신데, 편하게 다니면 좋잖아요. 돈은 이런데 쓰라고 있는 건데.”
딱
“요즘 것들은 아까운 줄도 모르지. 그리고 너 정도 때릴 정도로 건강해.”
지팡이에 한 대 얻어맞았음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이게 추억적인 세뇌 겸 미화라는 건가.
“근데 수도로는 무슨 일로 가시나요?”
제법 거리가 벌어진 서로에 대한 정보가 메꿔지자 루미네는 대화의 진행시킬 겸 질문을 했다.
“그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나...”
딘이 복잡한 전후관계의 설명에 곤란해하던 사이, 아누스는 이 문장으로 설명을 요약했다.
“옛 친구가 죽는다더군. 그래서 장례식을 하러 가네.”
“...아...죄송해요...”
“괜찮네. 어차피 이 나이쯤 되면 죽는 게 편한지라.”
분위기가 반전되는 말에 다들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유일하게 무표정을 유지하는 건, 아인 뿐이었다.
“저기, 아누스 할머니.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예쁜 증손녀가 묻는데 대답 못 하는 할미가 있을까, 물어보렴.”
손자랑은 대하는 어투부터가 달랐다. 이거 대놓고 너무하는 거 아닌가.
“‘죽는다더군’은 마치 현재는 안 돌아가셨다는 의미 같군요. 혹시 지병이나 다른 문제가 있다면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고 보니 아인의 지적대로 아누스의 죽는다는 말은 미래형에 가까웠다. 그 말대로라면 아누스는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의 장례식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 증손녀가 아주 똑똑하구나. 누굴 닮아서 이리 똑부러질꼬.”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얘는 지 애비를 닮아서 칭찬에도 철벽을 치네.]
아인은 레오의 부탁에 따라 헛소리를 뱉는 괴이현상의 주둥아리를 붙잡았고, 현명한 말을 즐기는 노파는 손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녀석은 나이대에 비해 아주 건강해. 병도 없고, 무슨 변고를 당한 것도 아니지.”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더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장례식을 치른다는 괴이한 상황 밖에 떠오르지 않는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청부살인 같은 것도 아니니까 식겁해하지 말라고.”
사실 지금까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청부살인 정도야 음식점이 많은 골목에서 시식 제의를 받는 수준일 것이다.
“예언자거든. 촌장님 친구가.”
“예언자?”
아인은 새로운 정보에 흥미가 생긴 것일까, 일부러 의문스러운 톤을 내보였다. 어색하기는 했지만 평소 아인의 어투를 생각하면 나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녀석이 갈 때가 된 건지, 자기가 죽을 때를 예언하더군.”
“그럼 예언에 따라 방지하면 되지 않나요?”
“글쎄... 본인도 만족하는 눈치고, 이렇게 부럽게 죽을 수 있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군.”
아누스는 설명을 돕기 위해 넣어둔 편지의 쪽지를 레오 일행에게 내밀었다.
[내가 가장 편한 잠을 자는 순간, 내 영혼의 박동이 멈춘다. 그러니까 올 때 데킬라.]
심부름하는 내용만 빼면, 잠을 잘 때 노환으로 심장이 멈춰 죽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누스의 나이대와 비슷하다는 걸 생각하면 나름 편안한 마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가는 길에 외롭지라도 말라고 장례 준비라도 미리 하는 게다. 가족도 없어서 해줄 사람이 없거든.”
“...그렇군요.”
이제야 이 기행에 이해가 갔다. 예언가가 본인의 죽음을 예언하는 건 동화에서나 들어볼 법한 이야기였다.
“예언이라는 건, 잘 맞는 편입니까?”
“글쎄... 맞을 때도 아닐 때도 있지. 너무 애매하고 장황하게 꼬아서 말하는 게 태반이여서 급한 문제에는 도움이 안되는 편이지.”
그건 레오도 아는 편이었다.
“전에도 편지로 요상한 말을 보내던데? 뭐였더라...”
“[내가 준 밀가루를 가장 값어치 있게 쓴 사람이 다시 나에게로 오리라.]였을 게다.”
그 말에 레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맞아. 그거였죠. 근데 밀가루를 가치있게 쓴다고 해봤자 빵 만드는데 말고는 생각이 안 나는데...”
“엄청 유명한 요리사가 밀가루를 얻어간 거 아니에요?”
“그런가? 빵에 금이라도 칠했나?”
그 말장난에 다들 웃기를 바빴다.
유일하게 심각한 건, 일어나지도 않은 옛 추억을 곱씹고 있는 한 회귀자와 그의 현명한 수호령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