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86화 (86/248)

EP.86 속도위반-1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은 보류되었다.

사실상 표면적인 보류였다.

실제로는 ‘제대로’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어떤 계시를 받으셨습니까? 용사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계시를 받았나였다. 그에 따라 앞으로의 행동 방침이 정해질 테니까.

성황의 질문에 아리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둠을 만나 거악과 맞서라’...였어요.”

그 말에 다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생각했을 때는 어둠에 있는 거악을 상대하라는 의미 같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확실치 않은 게 많았다.

“...계시가 그렇게 자세히 나왔어요?”

먼저 루미네가 고려한 것은 계시의 이질성이였다. 지금 아리아와 역대 성인들과 그리고 초대 용사의 계시와는 차별적으로 달랐다.

“...예? 그게 지금 이 검집에도...”

그녀가 레오가 만들어준 검집을 내밀었다. 검집에는 마치 인두로 인각으로 새긴 듯이

[어둠을 만나 거악과 맞서라.]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이런 글자 형태의 성흔은 거의 성유물이 아니고서 남는 경우가 없었다.

“...어둠을 만나 거악과 맞서라...”

[왜? 전에 있던 계시랑은 달라?]

사람이 많은 순간에는 아인이 못 때리는 걸 노린 현자는 틈을 노려 영체를 내보였다.

<예. 조금 다르네요.>

분명 아리아가 회귀 전에 받았던 계시는 ‘악과 맞서라’였다. 분명 이것도 같은 맥락의 계시이긴 했지만, ‘어둠을 만나’라는 구절이 추가된 것이 확실히 신경이 쓰였다.

<...회귀의 여파가 신탁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글쎄다. 나도 신이 바뀐 미래와 과거를 감지하는지는 모르겠어서.]

지금 빛의 신은 단지 과거가 바뀌었기에 신탁을 바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도 전부 보았기에 이런 계시를 내린 것인가.

그건 문자 그대로 신만이 알 것이다.

“그럼 이 계시를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그건 용사님의 자유입니다. 본디 계시는 명령이 아닌 깨달음에 가까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신탁의 이례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여태까지의 신탁들은 대부분 한두 단어에서 끝났기 때문이었다.

“저와 같은 경우에는 ‘가르침을 배워라.’였죠.”

가르침을 배우다라, 모순적인 계시이면서도 한편으로 지금의 성황이 그 신탁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미네 사제님은요?”

“아, 저는 ‘낫게 하라’였어요.”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납득이 되는 신탁이었다.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루미네는 낫게 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제게 이례적이긴 하네요.”

조금 불안했는지 아리아의 목소리는 한 단계 내려가 있었다. 전례가 없는 만큼 불안하고 두려울 테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신탁에 대한 해석을 해야하는 건가요?”

두려울 때는 해야할 일을 알아두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하면 미지의 공포가 사라지고 해결 방식이 떠오르니까.

“아, 아리아스필 용사님께서는 처음 말씀드렸던 대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 바로요?”

고대하던 퇴소임에도 아리아는 너무 흔쾌한 허락에 역으로 당황해버렸다.

실제로 계시가 왔다고 사기를 치거나,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는 성황은 마치 신의 눈이라도 가진 것처럼 아리아를 잡아 붙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약속을 지키는 건 중요하답니다. 용사님. 안 그런가요? 여러분?”

그 의미심장한 조언에 아리아스필은 어색히 웃었다. 다만 레오나르도도 그렇게 어색히 웃는 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계시를 받은 순간, 아리아스필 님은 용사로서 입증을 받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개 대리인인 제가 어찌 빛의 화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겠습니까?”

맞는 말이었지만, 평소 성황의 성향으로 봐서는 은근히 찔리라고 하는 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희소식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송별회라도...”

“괜찮아요!! 얼른 가죠!!”

아리아는 송별회 따위는 접어두고 한시라도 이 신성한 감옥에서 빠져나가 욕망과 욕정의 파티를 머릿속에서 굴려대었다.

“아리아 언...”

“아리아 아가씨...!!”

“가자! 집으로!!”

그 파티장의 손님들은 아리아의 양손에 붙들린 채, 방에 뛰쳐나가졌다.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아주 보기 좋았으나, 루미네는 땀이 삐질거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제가 따라가는 걸... 말씀 안 드렸는데... 괜찮을까요?”

아리아스필이 정식으로 용사가 된 이상, 루미네는 성인으로서 아리아를 보조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행은 필수적이었고 말이다.

“사전에 신전에서 수업을 할 때, 몇 번 설명을 해드렸으니 괜찮겠을 겁니다. 아마도...”

괜찮을 거다. 아마도. 운이 좋으면 말이다.

***

“하아...”

한숨이 울린다.

“하아아...”

폐에서 깊게 차있는 한이 숨을 통해 빠져온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본인 앞에서 한숨을 자제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미안... 하...”

사과와 잘못을 하는 것도 이젠 흔한 재주처럼 보였다. 기예의 상향평준화에 놀랄 것도 없이 아리아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우리 가족들이랑만 사이좋게... 집에 가고 싶었거든.”

이제는 낯간지럽지도 않은 지, 아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우리 가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레오도 정정해주기 지쳤는지 지금은 루미네를 변호해주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건 감사한 말씀이지만, 루미네 사제님 입장도 생각해주세요.”

[내 입장은!! 이딴 개년이랑 24시간 붙어있으라고?!]

그에 반발하듯 [현명하게 개소리를 일갈하는 악령]은 화를 내었고.

{루미네 수사! 다시 한번 생각하세요!! 정말 이러다간...}

마찬가지로 {악하게 선행을 관철하는 천사} 또한 반발이 극심한 눈치였다.

“...음...”

루미네의 반응 보아하니 알만했다.

“아인.”

“네, 아버지.”

콰직, 퍽석

악령과 천사는 각각 한 대 맞아 안면이 함몰되며 형체가 사라졌다. 아마 복구하는데는 대략 1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다.

“루미네 님도 이해해드려야죠. 평소에 잠도 못 주무시고 얼마나 피곤하시겠어요.”

그 심정은 누구보다 레오나르도가 가장 잘 알았다. 자신 옆에도 지치는 감각도 없이 쫑알거리는 악령이 24시간 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염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마음에 덕분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아인의 반물리적인 철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를 숨기고 싶은 심정마저 이해했기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아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덤이었다.

“그럼 아버지, 출발 준비를 하겠습니다.”

짐을 모두 챙기고 나온 일행을 보며 아인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아무래도 일행들도 이걸 보면 기절초풍할 테지.

“그럼 시작할까?”

“예.”

레오는 주머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었다. 금속이나 나무와 같은 재질의 날이 아닌, 짐승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상아색 단검이었다.

“레오? 갑자기 왜 단검을...”

“제가 왔던 방법을 보여드릴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단검의 날은 아인을 향해 박혀들어갔다. 너무나 즉각적이며 생뚱맞은 행동에 루미네, 그리고 아리아조차 막을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이게...! 뭐하는 짓이야!!”

반응이 먼저 온 건 아리아였다. 아리아는 급히 레오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왜...! 왜 우리 딸을 찔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인이를...!!”

누가 보면 자기 배로 낳아서 몇 년은 기른 어머니처럼 보였다. 실상은 만나지 한 달밖에 안 된 관계였지만, 오해할 여지는 충분했다.

“아인 님! 괜찮으세요?!”

손에 박힌 단검을 보며 루미네는 급히 신성력으로 치료하려고 했다. 손을 완전히 뚫은 것도 아니었으니 치료는 쉬울 터였다.

“괜찮습니다.”

정말 그게 다친 것이었다면 말이다.

태연한 표정으로 아리아는 손에 박힌 단검을 쥐었다. 아인에게 있어 고통이라는 건 통증이라는 의미보다는 위험 신호에 가까워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공격의 의사도 아니었다.

“괜찮아...?! 우리 아인...!”

“괜찮습니다. 그러니 잠시 물러나 계세요.”

이윽고 아인은 오른팔을 내밀었다. 찔린 오른손을 시작으로 비늘이 타고 오르더니, 점차 체구 자체가 부풀어오르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게 되었다.

“아인....아인이...!”

“...이건...”

비늘로 뒤덮인 몸, 어갯죽지와 등줄기로 뻗어나있는 박쥐와 같은 날개, 그리고 거대한 도마뱀을 연상케하는 파충류의 얼굴.

“드래곤이잖아...!”

“정확한 종명은 실피드 와이번입니다. 드래곤은 아니며, 탑승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와이번종이죠.”

파충류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아인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덤덤히 설명했다. 그런 부자연스럽다 못해 부조화스러운 장면에 루미네와 아리아 모두 경악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래봬도 아인은 마탑 내에서도 인정받는 사역마입니다.”

현자의 유산

타입-디아트

타입 디아트, 아인의 능력은 생물의 유전 정보를 습득해 성분을 일시적으로 육체에 가져오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장기적인 보관으로 육체 정보가 손실되었기에 점액과 같은 형태였지만, 아리아의 머리카락과 자신의 피를 먹어 인간으로 형태를 변화시킨 것과 같은 원리였다.

“물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이빨과 같은 물질로 몸을 찔러야하지만요. 아직 계약과 이해도가 낮아서...”

“...레오.”

설명을 했음에도 아리아가 멱살을 쥔 손은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 갑자기 왜... 힘을...?”

“아인이를 그럼 탈것 대신으로 쓴 거야? 우리 딸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설명하니 자신이 정말 쓰레기 같았다. 자신도 결코 좋아서 이런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아 언니, 이건 제가 건의드린 것입니다.”

“...응...? 아인이가...?”

“저도 아버지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렸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탑 측에도 저에게 해부 이외에 가치가 있다는 것도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요.”

아리아가 불쾌한 기미를 보이자, 아인은 급히 와이번 변신을 멈추며 레오나르도에게 뛰어갔다. 아직은 통제가 어설픈 것일까, 손톱과 이빨, 그리고 뿔은 아직 와이번의 것이었다.

“그러니 화를 푸세요. 저는 사이가 좋은 가족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아인아...”

아인이 아예 레오를 감싸안자, 아리아는 멱살을 놓고 덩달아 자신의 가족을 껴안았다.

“그래... 우리 아인이도 도움이 되고 싶었구나.”

“네, 그렇습니다.”

“아인이는 언제나 도움이 되고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쉬도록 하자. 아직 엄마도 익숙하지 않거든.”

“...이해했습니다.”

아인은 엄마라는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불화를 없애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호칭에 레오의 심박수가 빨라진 것이 아인에게는 흥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게 기차입니까?”

그들이 차선책으로 택한 것은 기차였다. 워프 게이트도 고려해보았으나, 신전 측에서 마탑과의 마찰로 근처 워프 게이트의 가동을 잠시 중단했기 때문에 기차라는 남은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다.

“처음 타보지?”

“네. 지식으로 접했을 뿐, 탑승 경험은 없습니다.”

“옛날 생각나네. 이걸로 아인이 아빠 고향도 갔다?”

꽤나 오래된 추억임에도 아리아는 그때가 또렷히 기억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남편과 하룻밤을 한 침대에서 보낸 날인데 잊을 리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궁금하군요.”

“궁금하지?”

“네. 아버지 표정이 우울해보이는 것이 궁금합니다.”

“...음?”

아인의 예리하고 눈치없는 지적에 다들 시선이 레오에게로 고정되었다.

“괜찮아? 레오?”

“혹시 멀미라면 치료해드릴 수 있는데, 해드릴까요?”

“아아... 아뇨. 그냥 저도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라는 말에 아인도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

“어떤 일이었습니까? 아버지?”

“그게... 아가씨처럼 좋은 일은 아니고, 그냥 열차 사고에 말려든 게 생각나서.”

“...아... 그때...”

아리아가 떠올린 것은 아마 흑마법사 때의 열차 테러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레오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며 종종 테러나 강도단을 경험하기도 했으니, 썩 밝은 표정을 짓기가 어렵기도 했다.

특히나 가문에 돌아가서 어떤 변명을 해야할지를 생각해야할 때는 말이다.

“괜찮을 거에요. 오히려 의식해서 긴장하면 실제로 일어날 때 대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나름 합리적인 루미네의 조언에 레오는 조금이나마 표정을 풀었다. 설마 성인까지 같이 왔는데, 죽이기까지야 하겠나라는 흑심이 있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혹시 음료라도 드시겠어요? 제가 사올게요.”

“아, 전 괜찮습니다.”

“저도요. 가기 전에 차도 마셨거든요.”

“전 필요합니다.”

의외로 루미네의 제안에 승낙한 것은 아인이었다. 이것대로 놀란 눈치로 다들 아인을 바라보았다.

“생수도 구입하고 기차를 더 구경하고 싶습니다.”

드물게 보이는 아이다운 모습에 다들 흐뭇해하며 아인을 루미네와 함께 보내주었다. 설마 루미네와 함께 가는데 무슨 문제...

촤악

“어?! 꼬마!! 괜찮아?!”

“아, 괜찮...”

“뭐하는 짓입니까?!”

갑자기 들린 외침에 두 부모는 포탄이 발포되듯 좌석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인의 몸에는 노란빛의 음료와 얼음들이 묻혀 젖어있었다. 레모네이드의 주인은 엎어진 컵과 아인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리 애...한테...?!”

화를 내려던 순간, 레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오랜만에 기차를 타봐서...”

음료의 주인인 늑대 수인은 거구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내었고, 그 옆에 있는 노인도 마찬가지로 목례를 하며 아인의 상태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꼬마야... 다치지는...”

거기서 레오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누스 촌장님...? 딘 형...?”

“예...? 제가 아누스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우리 이름을...?"

서로 시선이 마주보이며 시간의 공백과 외모에 대한 간극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너 레오야...!?”

“...레오나르도니...?”

무릇 가족이란 그런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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