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85화 (85/248)

EP.85 계시-8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감정.

우울이나 슬픔보다도 절망적이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이며 복잡한 감정 중의 하나다.

죄책감을 없애는 방법은 죄의 본질을 참회하거나 줄이는 것.

그럼.

살아있다는 것이 죄인 존재는 어떻게 참회를 받아야하는가.

***

[아인이 니가 청탑의 명예니, 부모의 원수니 개지랄 떨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은 해봤어?]

자신이 존재만으로 타인에게, 그것도 보호자에게 민폐가 된다고 생각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저 여자는 모를 것이다.

알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까.

[...죄..송...]

파지지직

[끄아아아악...!]

골전된 손을 향해 전격을 흘리며 레오는 사과를 잘라내었다.

[아직 안 끝났어.]

너무 대충이었으니까.

[아까 전에... 청탑의 명예니 청탑주의 원수니 개지랄했지?]

사과를 듣는 쪽이 불쾌할 정도로.

[까놓고 말해볼까? 청탑주님과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개인적 원한 관계를 가진 건 아니야. 병신아.]

플라투스는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도 없었다. 레오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얕은 식견과 시선으로는 그게 한계였다.

[청탑주님은 마법사로서 본인의 본분을 다한 거일 뿐이야. 의견 대립으로 감정이 상할 진 몰라도, 너한테 갖는 원색적인 분노나 원망 같은 건 없었다고.]

이건 선악과 같은 흑백논리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청탑주는 청탑의 마법사를 이끄는 수장이자 현대 마법을 대표하는 입장으로서 마법사에 맞는 의견을 제시했고.

레오는 아인을 꺼내주고 지성을 준 보호자로서,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설득의 반론을 댔을 뿐이다.

개인적인 감정도, 원한도 없었다. 그게 사회였으니까.

[그리고 내가 부모의 원수라고? 청탑의 명예에 금이 갔다?]

정말 저년이 청탑주의 딸인지도 의심히 가는 발상이었다.

[청탑이 적색 마탑마냥 전투 마법이 목적인 마탑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사단마냥 힘이 본질인 집단인 줄 알아? 너 진짜 청탑 마법사는 맞냐?]

청탑주는 어디까지나 마법을 연구하는 것에 목표를 둔 학자, 연구가에 가까웠다.

물론 현 청탑주는 청탑에서는 드물게 전투 마법에 대한 여러 특허 마법과 뛰어난 실력으로 큰 명예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수라고 할 만큼 큰 책임을 지지도 않았다.

[이해하기 쉽게 말해줄까? 청탑주님이 만약 이 상황 보면 뭐라고 하실까?]

지금 상황의 원인은 레오에게는 많이 쳐줘도 1할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도면 나비가 날갯짓해서 난 태풍을, 전부 나비 책임으로 묻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신전 측에서 이걸 청탑 전체의 의사로 받아들이면 어떡할 거지? 그리고 마탑 내의 과격파가 이를 신호탄으로 날뛰면 어떡할 건데?]

노블레스 오블리주

직위에 따른 도덕적인 의무는 단순히 기부나 선행을 베푸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도 내가 직접 한 짓은 아니니까.’라는 병신 같은 변명이 통할까? 이젠 네가 귀족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데.]

레오는 다시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팔이 고정되어 있기에 발은 정타로 플라투스의 얼굴에 가격되었다.

[알아? 어렸을 땐 난 귀족이라는 족속이 싫었어. 고상한 척하는 돼지들 같았거든.]

부모는 10살 때 이후로 본 적도 없고, 용병으로서 2년은 넘게 무법 생활을 이어왔던 레오로서는 귀족들의 생활이 그저 배부른 돼지들의 유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근데 아가씨 곁에서 지켜보는 걸로 알겠더라고.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논리였다. 자신들이 봐왔던 밑바닥의 사람들 중에도 뛰어난 사람은 많았는데, 귀족이라고 아니라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아니 당연하게도 그 수는 더 많았고.

[귀족이 예의나 격식을 필요 이상으로 챙기는 까닭은 자기 행동 하나에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죽고 살기 때문이야.]

거렁뱅이 용병은 길가에 침 한번 뱉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귀족은 그런 짓 한번에 기사가 실리며, 본인 뿐만 아니라 가문 자체에도 피해가 간다.

그로 인해 실직을 겪는 사용인들도 빈번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귀족들이 나 같은 거렁뱅이들보다 힘들거나 불쌍하다는 의미는 아니야. 당연히 오늘 죽을지 모르는 밑바닥 인생보다야 귀족이 훨 낫지.]

하지만 밑바닥과 가장 위를 특등석에서 관람한 교훈은 전혀 값싸지 않았다.

[하지만 밑바닥이나 꼭대기나 서로 힘든 점과 이해할 여지는 있고, 어디에든 좋은 사람이 있듯, 쓰레기 새끼도 있다는 거야. 여기에 있는...]

퍼억

이번에는 정권, 물렁한 배가 주먹으로 더욱더 붉게 멍이 든다.

[책임은 나 몰라라 하는 멋대로인 귀족 아씨처럼 말이야.]

갖은 일침과 일갈, 그리고 폭력을 맛보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살고 싶다나 사죄도 안 나올 정도로 정신이 붕괴된다. 인과의 순서가 머리 속에서 뒤섞여 이제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커헉... 내가... 내가...뭘 그렇게... 잘못했...]

[그래, 백번 양보해서 옛날 일하고 지금 일만 생각해보자. 나중 일까지 생각하면 신전 앞에서 사람을 찢어 죽여야 하니까.]

섬뜩한 자비심에 물 둘 바를 모른 플라투스는 힘이 풀려 실금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황색의 물웅덩이를 보며 레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제나 종교를 무시하는 말을 마탑에서 하는 건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야. 까놓고 나도 그렇게 신실하거나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거든.]

저 말을 결계 밖에서 듣는 사람들은 지금 장면에 납득하면서 레오의 여태까지의 업적을 생각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근데 본인들 앞에서는 싸가지를 지켜야지 않아? 내가 이걸 설명하는 것도 웃기잖아.]

아까 그 태도에서는 사무적인 예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조차 그녀에게는 경어로 인사했는데 말이다.

[잘난 마법사인 댁한테는 종교는 단지 인민의 아편에, 신전의 능력은 신성력 판매단 같지? 졸업 논문에도 그렇게 적혀있더라?]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학위를 딴 졸업 논문에는 종교는 단지 신앙을 통해 민중을 통제하는 수단일 뿐이고, 종교의 유일한 장점인 신성력은

마법의 발전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난...그저 마법의 발전을...!]

짜악

뺨이 후려쳐진다. 공포로 이제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발전이고 나발이고 그게 싸가지 안 지키는 거랑 뭔 상관이냐고. 종교인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면서 돈 받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 지랄 떠는 거 아니야.]

레오의 발언에 그 자리에 있던 성직자들은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자신들의 이야기이자 믿음과 연결된 이야기인 만큼 집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좋아. 종교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예시를 들어볼까?]

레오는 다시 단검을 뽑아 목죽지의 날이 갖다 대었다. 그 행동에 본인은 물론, 멀찍이서 이걸 보는 이들마저 당황했다.

[지금부터 도덕과 윤리는 일절 얘기 말고 내가 널 살려야 할 이유를 말해봐. 말하면 바로 보내줄 테니까.]

그녀의 목에서 피가 한 방울 검날을 타고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날을 1cm만 더 가까이 움직이면 그대로 즉사할 것이다.

[...내가...죽으면 넌 살인죄로...]

[지랄, 그것도 도덕과 윤리로 만들어진 법안이잖아. 댁이 그렇게 신봉하는 마법하고 학문적 근거를 대서 설명해보라고.]

머리 속이 하얗게 된다. 단순히 공포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것 이외에는 레오는 자신을 죽여도 두려울 것이 없었으니까.

가문의 힘도, 물리적인 힘조차 눈 앞의 사내에게는 무의미했다. 레오는 항상 그걸 상회하는 결과를 내었다.

레오의 눈에는 그녀를 죽이나, 오크를 죽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없지?]

[제...제발...! 뭐든...지...! 사과...! 사과하게...겠습니다...!]

[사과? 그것도 결국 도덕과 윤리의 문제잖아.]

휘익

칼날이 내리꽃아진다. 성황 이외에는 모두가 경악하며 결계를 뛰어들었다, 정말 죽이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되었다.

“알겠지? 간단한 거잖아.”

레오도 그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나이프는 바닥에 꽂혔을 뿐이었다.

“이게 믿든, 믿지 않든 종교가 필요한 이유야.”

종교의 존재가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규합시키는 의미인 것을.

“그러니까 적당히 나대. 잘못하면 재깍재깍 사과하고.”

이 개년은 그것도 모른 채 스스로 염세주의라고 자위하며 이기주의에 쩔여진 자의식과잉인 것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허억...쿨럭...커헉...”

철저히 논리와 공포로 정신이 넝마가 되자 그녀는 말도 못 한 채 간신히 거친 호흡만을 유지했다.

“아, 그리고 말 안 했는데.”

레오나르도는 결계를 해제하며 말했다.

“난 너 같은 년 보기 전부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리고 아가씨는 너보다 훨씬 책임감 있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이 말을 끝으로 레오는 결계를 해제했다.

“그러니까 돼지 같은 주둥아리로 나하고 아가씨 앞에 얼쩡거리지 마. 주제 파악 시키는 데도 품이 아깝거든.”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자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그 원수 같은 여자를 붙잡으며 즉각적으로 치료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과잉적으로 대응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도 이 장면을 안 봐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

꽤나 과격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일은 수월히 해결되었다.

그건 처음부터 이 일을 전달받은 청탑 측에서 즉각적으로 사과한 덕분이 컸다.

청탑의 수뇌부는 이 사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 일들은 플라투스 블랑의 독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알 만도 한 것이 이런 방식은 마탑답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청탑과의 정보 공유가 있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고유 마법은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탑주를 포함한 청탑 전체에서는 사죄를 보냈고, 신전 측에서도 큰 피해는 없었으니 사죄를 제대로 받고 언론에 퍼뜨리지 않는 선에서 끝냈다.

이는 레오가 이 일로 퍼질 파장을 대놓고 원인인 그녀에게 일갈하고 신전 사람들도 봤기 때문이었지만, 레오는 그걸 몰랐기에 그저 운이나 인덕의 작용이라고 생각했다.

신전 쪽에서도 의외로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 말을 거는 사제나 전투 방식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성기사들도 종종 있었다.

성황 님께서도 여유 시간이 날 때면 가끔 자신과 아인을 함께 불러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인은 신전에서 사용하는 의식이나 검사를 한 결과, 정령체의 일종으로 인정되어 유사 정령으로나마 생존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로 인해 해부할 명분도 생기기는 했지만, 계약자인 레오나르도가 그걸 하거나 허용할 턱이 없었기에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한 가지 봉착되었다면,

“가지 마아아...!”

돌아가려는 레오와 아인을 울먹이며 붙잡는 한 용사님 때문이었다.

“아가씨, 저도 슬픈데요... 이제 있을 명분이 없어요.”

레오나르도도 가급적이면 아리아스필을 데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각종 마탑에서 얻은 지식을 대입해보거나 대련을 해보기도 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자신도 이대로 아인과 저택에 가면 라인하르트의 두 가장이 죽이려드는 것이 눈에 훤했지만, 당장 방도가 없었으니 지금은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아리아 언니. 아버지도 지금 드릴 물건도 그렇고,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계시를 받을 때 드릴 액세서리를 만들어...”

액세서리라는 말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플라투스 때를 기점으로 성기사와 사제들 또한 아리아와 레오에게서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인.”

“예. 아버지. 조용히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왜냐고 묻진 않는구나.”

인자하게 자식의 발전을 보는 게 부모의 기쁨이었다.

“안 가면... 안 돼? 진짜 조금만 더...”

거의 울 정도로

촉촉해진 눈가로 아리아는 레오를 붙잡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며 찢어질 듯이 고통스러웠다. 평소에도 귀엽고

아름다운 사람인데, 더욱더 성숙해진 얼굴로 눈물을 보이니 네 배로 감정에 치고 들어왔다.

‘...그래도... 참아야지.’

[고자 새...]

깔쭉대는 현자는 아인이 처리했으니 안심해도 되었다.

“...꼭 데리러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준비해둔 또다른 약속의 선물을 꺼내었다. 머리카락이 없어진 만큼, 다른 형태로나마 약속을 남기고 싶었던 레오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이건...”

묵빛의 작은 통, 투박한 포장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레오다운 배려라고도 생각되었다.

“한번 열어보시겠어요?”

“...응.”

그녀의 촉촉한 눈은 어느샌가 생기가 생기며 받은 선물의 포장을 열어보았다.

퍼엉

폭죽이 터지는 듯한 광경, 마나의 입자로 이루어진 흰색 깃털이 흩날리며 검을 지킬 방패가 주인에게 갔음을 축하했다.

“명색이 성검인데, 조금은 좋은 걸로 보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너무 화려하게 선물을 준 것일까, 걱정되었는지 레오는 조금 머쓱한 눈치로 아리아에게 부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리아스필은 이 상황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정말 의미있는 선물이었기에 반대로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정말... 멋진 검집이네.”

검은색을 바탕으로 흰 금속으로 장식된 검집은 성검이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섬세하게 미와 멋을 드러내었다.

“...지금 바로 넣어봐도 될까?”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 말에 아리아는 특수한 천으로 감싼 성검을 꺼내 검집의 입구에 갖다 대었다.

만드는 동안 한시도 자신을 잊지 않은 걸 증명하는 것처럼 성검은 검집에 딱 들어맞았다.

“...어?”

그 순간, 검에서 휘광이 몰아쳤다. 빛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괜찮으세요?! 마도구에오작동이...!”

“...왔어...”

섬광이 사그라들자 성기사와 사제, 그리고 정면에 있는 아인과 레오마저 앞의 아리아를 볼 수 있었다.

아리아는 맑게 흔들리는 눈으로 성검을 뽑아들었다. 성검은 아리아가 의식하지 않아도 신성한 빛을 자의적으로 흩뿌리며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계시가 왔어...!”

신은 용사의 간절한 부름에 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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