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82화 (82/248)

EP.82 계시-5

성황의 직무실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엄숙하다거나 신성하다는 분위기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십자가나 묵주 등의 기도 도구가 없었다면, 성황의 직무실이라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편한 자리에 앉아보시겠습니까?”

“예.”

아인은 바로 앞자리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편한가요?”

“아뇨. 소파도, 목제 의자도 상관없었으나 소파가 더 가까이에 있었기에 선택했습니다.”

설명도 길고, 복잡했으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선택은 지극히 일반적이었다.

“...의식하고 한 행동인가요?”

“예.”

단지 그걸 전부 생각하고 인지하며 행동으로 옮겼기에 성황은 고민을 깊게 들이보았다.

“혹시 말을 편히 해도 될까요?”

“됩니다. 성황 님.”

격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문장을 그대로를 내기 위한 소리를 기계로 재생키는 것이기에 감정이나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니?”

“예, 제 처분에 대해 결정하고자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찻주전자를 든 성황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표면적은 그렇단다.”

“내부적, 혹은 암묵적으로는 다른 겁니까?”

“해석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구나.”

“어렵군요.”

“쉽지는 않은 문제지.”

성황은 찻주전자의 차를 두 개의 찻잔에 따라주었다.

“설탕은 필요하니?”

“아뇨. 괜찮습니다.”

성황이 찻잔을 내밀자 아인은 찻잔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성황이 차를 마시자, 아인도 차를 마셨다.

“맛이 어떠니?”

“홍차 맛이 납니다.”

“음... 취향에는 맞는 걸로 묻는다면?”

“전 식품에 대한 취향은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님과 마력이 연결되어 공급받는다면, 식사라는 행위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죠.”

원래라면 ‘아버지’라 불렀겠지만, 아까 레오나르도의 주의 때문에 아인을 일부러 호칭에 주의했다. 다만 그로 인해 자신이 기계적인 존재라는 걸 강조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마셨구나.”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도 아니고, 사과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단다.”

성황도 차를 마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를 마신 이유는 뭐였니?”

아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영양도, 하물며 맛을 위해서도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싫지만 않다면 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레오나르도는 음식을 만들어주며 식사를 거절한 아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죠?’

-‘책으로 얻는 정보와 직접 감각으로 느끼는 경험은 정도가 달라. 꼭 위아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차이는 있을 거야.’

아인은 타당한 지적과 조언이라 생각했고 그걸 받아들이고 감안해 행동을 수정했다.

“좋은 조언이구나. 레오나르도 님은 어떤 분이시니?”

“요약하기는 어려운 분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렇단다. 그저 생각이 나는 것부터 차례로 얘기해보렴.”

잠시 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그리고 초침이 열 번 정도 움직이자 아인은 답했다.

“아버지...라고 생각됩니다.”

***

“왜 흐름이 그렇게 되는데?”

설명해준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레오는 거기서 흐름을 끊었다. 당초에 방향 자체가 기이하게 뒤틀렸으니 끊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질문한 것에 답하다보니 그렇게 됐군요. 죄송합니다.”

“아이 기를 죽이는 건 좋지 않아요! 아인이 아빠!”

이제는 아예 팔불출이라는 개념을 넘어 딸 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버린 아리아스필이었다. 20대도 안 된 레오의 미간에는 주름만이 늘어났다.

“그거 좀 그만해요. 그래서 뒤는 어떻게 됐어?”

“그래서 전체적으로 대화해본 결과, 성황 님께서는 처음부터 저를 없앨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 성황이 아무리 개방적이라 한들 아인의 존재는 그리 편안치는 않을 텐데.

“아마... 아인이 아리아스필 님과도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 아닐까요?”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상황에서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루미네는 자신의 견해를 꺼내보았다.

“성황은 사람들이 결정한 신의 대리자지만, 용사는 신의 화신에 가까워요. 그러니 용사의 피를 이은 아인 님에 대해선 성황 님께서도 쉽사리 처벌을 내릴 수는 없을 거에요.”

확실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용사의 명예에 흠집이 나기 이전에, 역으로 생각하면 성황이 그런 상황을 좋게 판단할 리도 없었다.

잘 생각하면 알 수도 있는 반응이었는데, 너무 복잡한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니 머리가 조금 긴장해 굳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의 대화는...”

“추측이지만... 아마 성황 님도 아인 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었을 거예요. 다른 반대파 성직자들에게도 납득할 이유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될테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는 쉬워진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간미를 찾아내는 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도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성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대?”

“우선 현재에는 신전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리아 언니와 함께 나가는 것은 용사로서의 계시가 오기 전까지는 불가하다고 하셨고요. 그러니 결혼과 주례는 그때까지 미뤄질...”

“자자, 정리하자면 우선은 여기서 며칠 동안 쉬는 걸로 결정된 거지? 안 그래?”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에서 레오는 여기서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렇게 되는군요. 그럼 그 며칠이 끝나면 저희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 질문에 레오나르도와 아리아스필 모두 경직된 표정으로 정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아인이 아리아하고 연관됐다는 걸 알면...’

사정이고 사고이고 간에 레오나르도는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 또는 즉결 거세형이 처해질 것이다. 적어도 옆에서 아리아가 같이 해명해줘야 레오와 그의 자손들은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

‘...아인하고 같이 못 나간다면...’

이 신전에서 다시 몇 년을 썩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저 사랑스러운 딸과 남편(?)을 보지도 못한 채 기약도 없는 기러기 엄마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계시를 받아야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죠...!”

“드디어 두 분의 생각이 일치했군요. 다행입니다.”

“...정말 그런 건가요?”

상반된 반응이 이어지며 새벽이 끝났다.

드디어 좋은 아침이라 말할 시각이 찾아왔다. 어디까지나 시각만 그랬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

성기사와 사제들의 시선은 따가운 편이었다. 아마 대결을 신청했을 때, 압도적으로 제압하지 않았다면 분명 시비나 직접 싸움을 걸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 따가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분명 아인의 존재 때문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마법사 자체도 성직자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 마법사들은 도덕을 기만하고 윤리를 어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종교의 발전을 위해서 성직자들은 도덕을 강제하고 윤리를 강요하는 것에 죄악이 없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소수의 예외를 인지하고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마법사와 성직자의 골은 깊어졌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난 마법사라고 하기엔 애매하지 않나?’

현자의 직속 제자이며 청탑주를 단신으로 이긴 레오는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아리아의 말에 레오는 간신히 독백으로부터 대화로 시야를 돌릴 수 있었다.

“예? 아... 그냥 신전에서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지냈나 하셔서요.”

“음...”

그 순간,

아리아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신전에 있는 동안 꿈 속에서 벌였던 배덕적인 교미들이었다. 아예 그 꿈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까지 적어놓은 것을 생각하면 레오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열심히 기도와 신성술을 익혔지...! 하하...!”

“갑자기 심박수가 빨라지셨군요.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이건 절대 아인에게만큼은 들킬 수 없었다. 그럼 엄마가 되기 전에 수치심으로 쓰러질 것이다.

“아리아스필 님은 정말 열심히 수련하셨죠. 아마 성기사 중에서는 가장 강하실 겁니다. 신성술로만 놓고 봐도요.”

루미네의 칭찬은 단순히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재능과 경험의 밀도는 여타 성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격이 달랐다.

거기에 용사의 혈통과 성검의 선택을 통해 아리아는 신성 자체에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루미네의 보증에 나름 뿌듯하며 자랑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레오나르도에게 부끄럽지 않게 훌륭히 신성술을 익힌 것도, 그 사실을 사랑스러운 딸에게 전할 수 있는 것도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신성술은 마법과 구조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차이가 많이 큽니까?”

“아무래도 결이 많이 다르지.”

신성술은 간단히 말하면 신에 대한 믿음을 마나로 가공시켜 기술의 형태로 승화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이론상 부정적 감정으로도 흑마법이 사용이 가능하니, 역으로 긍정적 감정으로도 마법적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긍정적 감정은 이끌기도 힘들고, 유지하기도 어려우니 신성술은 자연히 어려운 개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도나 의식과 같은 형태로 믿음을 견고히 하며, 신도를 모으는 것으로 총량적인 신력을 키워 신성력은 현재의 입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쉬운 건 아니로군요.”

“마법과는 방향 자체가 다르지. 그래도 여러 이점은 있어.”

악마나 마인, 그리고 흑마법사과 같은 마기를 사용하는 작자들 상대로는 극단적으로 유리한 상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정화나 치유술에선 일반 마법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신성력이었다.

“신성력이 극치에 달하면 잘린 팔도 바로 돋아나게 할 수 있을 정도야. 단순한 치료 마법하고는 비교가 안 돼.”

옆에 루미네 사제가 그 예시였다.

“바로는 힘들지만, 레오 기사님 말대로 가능하기는 해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치료술을 지닌 루미네 덕분에, 회귀 전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렇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마법이나 검술보다 어렵겠습니다.”

“그건 그렇지. 재능도 많이 필요하고 노력의 범위도 모호해.”

그렇기에 단순히 힘이나 지식을 목적으로 한다면 무술이나 마법을 배우기 마련이다.

신성을 익히는 건, 진정으로 기도에 열중하고 싶거나, 사회를 위한 봉사, 또는 악마 타도에 몸과 정신까지 바친 도인들밖에 없었다.

“그러면...”

“저기...!! 레오나르도 기사님...!!”

그 순간, 한 사제가 레오나르도 일행에게로 뛰어왔다.

“무슨 일 있나요?”

루미네는 황급히 뛰어온 사제를 우선 진정시키며 상황을 물었다.

“지금 신전 입구에서 한 마법사가 날뛰고 있어요...!! 자꾸 레오나르도 기사님을 데려오라고 말하면서...요...!!”

“저를요...?”

“레오나르도 님이 부모의 원수라면서...! 저희도 지금 곤란해서...!”

부모의 원수라는 말에 레오나르도는 깊은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4년 동안, 레오는 부모는커녕 사람 한 명 죽이지 않았지만, 짐작이 가는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 우선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하군요.”

레오나르도는 일행들에게 허리를 숙이며 혼자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부모의 원수...?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레오나르도가 급히 뛰어나가자, 일행들은 따라가거나 붙잡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무래도 플라투스 블랑이 온 것 같습니다.”

부모의 원수라는 말에 감을 잡은 것인지 아인은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플라투스 블랑? 레오랑 무슨 일이 있었던 사람이야?”

“청탑주의 자녀, 여식입니다.”

그리고 청탑주는 레오나르도의 결투에서 완패했다.

“그리고 2년 전에 아버지께 공개 고백을 하고 거절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리오스 님께서 상종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년 어딨어?”

방금 전 만해도 신전 입구라고 말했지만, 그걸 망각할 정도로 아리아스필은 질투와 분노로 지능이 하락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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