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8 계시-1
신전에 도착한 지 1일째.
신전에서 도착하자마자 받은 것은 수도복과 최소한의 생활 용품이었다. 더 좋은 물건을 받거나 구할 수도 있었지만, 내 쪽에서 직접 거절했다.
성검의 인정과 빛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검소한 생활과 겸허한 사고를 우선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믿어주듯 나도 자신을 가지며 나아가면 된다.
난 레오의 가장 특별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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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서 수련한 지 30일째.
신전에서의 수행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쉬운 쪽에 가까웠다.
경전을 외우거나 기도의 방식은 가문에서 배운 교육과 예절 덕분인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수도자로서 전투의 훈련은 더욱더 쉽게만 느껴졌다. 신전에 있는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실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레오에 비하면 다 별 볼일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몸에 흐르는 용사의 혈통 때문인지, 체내에도 기본적으로 신성이 흐른다고 축복이나 신성 주문을 사용할 날도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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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검을 다루기 시작한 지 1년째.
신성술과 기도를 익힌 지 1년이 지나자, 성검의 날도 점차 살아났다. 처음엔 날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성기사들조차 성검의 빛 앞에서는 그런 기미조차 보일 수는 없었다.
다들 새로운 용사의 강림이라 말했지만, 난 확신했다. 지금 자신은 단지 성검의 신력을 사용한 것일 뿐, 제대로 된 계시도,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보다 얼른 레오나르도가 보고 싶었다.
예전에는 편지를 주기적으로 보냈지만, 그러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일부러 편지나 소포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못 박아놓았다.
하지만 마음 한 켠으로 무시한 채 보내줬으면 하는 모순된 생각도 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편지에서 느껴지는 레오의 냄새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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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를 보지 못한 지 2년째.
성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기도를 아무리 올려도 계시는 오지 않는다. 신을 원망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상황만큼은 원망스러웠다.
레오를 보지 못한다는 건, 가족들과 못 만나는 것보다도 슬프고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레오 생각에 밤을 지새우는 사이, 짧은 꿈을 꾸었다.
꿈에는 레오가 나왔는데, 꿈 속의 레오는 마탑에서 보았던 때와 비슷했다.
꿈 속의 우린 옷을 벗으며 서로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이윽고 몸과 손은 겹쳐지고, 몸이 닿는 부위는 점차 은밀하고 민감한 장소에 다다르고 있었다.
달콤하다. 조금만 더 이 시간이 길었으면...
“...하으...!”
그렇게 꿈에서 깼다. 일어났을 때는, 잠옷이고 속옷이고 이불까지 전부 다 땀과 같은 체액으로 뒤덮여있었다.
진심으로 민망한 나머지 그 밤은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그 다음날, 드물게 난 신전의 서고에 찾아가 책을 찾아보았다. 설마하니 하지만, 이런 신전에 몽마가 찾아왔나하는 걱정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자료를 보자 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욕구를 안 풀면... 자연적으로 이런다고?’
저술된 자료에 따르면 욕망을 참지 못하고 분출하지 못하면, 인간의 육체는 이런 음욕에 찬 꿈으로나마 해소한다고 전해진다.
이는 몽마가 온 것도 아니고, 교회의 교리 상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나...
‘...여기서 욕구를 어떻게 푸는데...!’
신전에서는 성욕을 푸는 ‘위로’ 행위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물론 자율성이 늘어난 현재의 교리는 암묵적으로나마 행위를 허용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자신이 용사의 후보라는 것에 있었다.
만약 그런 배덕한 행위를 즐기면 계시를 받을 확률이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다른 방법은...’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와중, 성몽에 대한 교리적 해석이 나왔다.
[이는 교리에 따라 고의적인 행위가 아니기에 고해성사의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대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말에 아리아스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지만, 꿈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순간적으로 레오와 찍은 사진 몇 장이 생각이 났다. 개중엔 어릴 때의 레오 사진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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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은 지 4년째 되는 날.
오늘 레오는 꿈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번에는 아끼고 참았던 어릴 때의 사진을 베개 아래에 놓고 잤는데 꿈은 기억나지조차 않았다.
답답하다. 차라리 이번에는 가지고 있는 모든 사진을 베개 밑에 넣을까를 고민했다. 운이 좋으면 한 명이라도, 잘만 따주면 두
명이나 세 명의 레오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을 일이었지만, 결국은 허무하다. 이럴 바에는 아예 레오와
결혼하고 싶었다. 신전의 교리는 어디까지나 성행위를 낭비하지 말라는 것에 있으니 결혼하고 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도, 고해성사의
대상이 아니다. 계획도 전부 짜놓았다. 약혼을 말함과 동시에 몇달 동안 연애생활을 즐기며 레오나르도 쪽에서도 애가 타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이 절정에 달할 때 결혼식을 하자고 제안을 할 것이고, 레오가 만약 거절하거나 망설이면 덮치는 것으로
책임이라도 지게 만들 것이다. 어차피 레오도 날 좋아하는 눈치이니 그럴 일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난 뒤,
자신이 미리 잡아둔 별장에 레오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강제로 폭설을 내리게 해 교통을 막고 문도 걸어잠가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생활을 최대로 늘릴 것이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고 눈이 녹을 때까지 계속 레오와 함께 밤을 보낼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크고 건강하니 하루에 열 번도 넘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애들도 잔뜩 만들어 아예 아이들만으로 기사단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저기... 들으셨어요?”
“...예?!”
그렇게 혼돈과 욕정의 망상에 아리아스필이 멍하게 침을 흘리는 사이, 비공식 성인이 된 루미네는 그런 아리아를 보며 조금 당황스러움을 표출했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입가에...”
아리아는 급히 입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루미네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최근에 잠을 설친 지라...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그런 아리아스필을 바라보며 전 성녀이자 천사인 앤젤라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욕구불만이 심한 모양이군요. 실로 보기 좋은 얼굴이에요.}
“...음?”
아리아는 무언가 들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 왜 그러세요?”
“...누가 말한 것 같아서요. 루미네 사제님 뒤에 누가 있나요?”
그 육감적인 반응에 루미네는 당황한 눈치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천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체내의 신성력이 극단적으로 발달해 루미네에게 있는 수호천사인 앤젤라의 사념파까지 조금이나 감지하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계시가 내려올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아직까지도 아리아스필에게는 기도 중에도 계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지금도 이른 때였지만, 아리아의 성장과 능력을 고려하면 계시가 오지 않는 건 분명 기이했다.
“아무도 없네요. 아무래도 피곤하셔서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가요...? 근데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자, 루미네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 대답했다.
“그게 마탑 쪽에서 사람이 온다고 성황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성황님께서요?”
성황이라는 직책이 나오자 아리아는 당황했다.
성황에게 직접 연락할 정도면, 마탑주에 버금갈 만큼 고위 마법사의 위치인 상대가 왔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로요?”
“저도 듣기만 했는데, 마탑에서 나온 현자의 유산 중 숨겨져 있던 사역마가 발견되었거든요. 그래서그 사역마에 대해서 신전에 대한 조사 및 견해를 듣고 싶다는 이유로 찾아오겠다네요.”
이해할 만한 논리였다. 생명과 빛의 정수인 신전, 그것도 대신전이라면 사역마에 대한 검진과 조사도 도울 것이다.
사역마에 대한 윤리 논란이 종식시킨 장소 또한 대신전이었으니, 명분으로서도 적합하다 생각되었다.
“현자의 유산?”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단어였다. 자신도 거기서 유산을 찾는데 일조했고, 거기서 레오와... 첫키스를 했으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엇다.
“...그러면 누가 온다고 하셨나요?”
“그게... 저도 계속 여쭤어봤는데...”
-허허, 만나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라는 기묘한 대답만을 남겼다.
“그러면 저희랑 면식이 있는...”
아리아스필은 추측을 하던 와중, 시선과 말이 멈추었다. 방향이 천사인 그녀가 있는 쪽과 미묘히 비슷하니 루미네는 조금 눈치를 살폈다.
“저기 뒤에...”
“뒤에요? 뒤에는 아무도...”
“있습니다.”
암기로 던져진 칼처럼 단호하고도 기습적인 대답에 루미네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신지?”
천사, 성인, 그리고 용사마저 그 사람이 후방에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리아는 단지 시야에 들어왔기에 알 수 있었을 뿐.
“저 말입니까?”
회색 로브를 입은 아이는 물었다. 저런 딱딱한 말투에도 아이라고 생각한 까닭은 키에 있었다. 루미네와 머리 하나는 넘게 차이가 나는 키에 일행들은 그 사람을 아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응, 혹시 길을 잃어버렸니?”
아리아의 상냥한 말투에 아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자주색의 눈빛은 아름다우면서도 생기가 없다고 느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길은 기억하고 되돌아가고 있었으나 도중에 당신이 ‘저기 뒤에...’라는 말과 ‘뒤에는 아무도...’라는 말에 저를
부르는 줄 알고 대답했습니다. 오해를 불렀다면 죄송하군요.”
국어책과 논문을 대본 삼아 읽은 것 같은 딱딱하고 기계적인 말투, 군인조차 쓰지 않을 격식이 담긴 어투였다.
“...아... 그렇구나.”
그런 기묘하게 논리적인 대답에 아리아스필은 조금 당황했는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신전에 같이 온 보호자는 혹시 있나요?”
“있습니다.”
아이는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저 방향으로 직진했을 때 나오는 신전의 연무장에서 몇 명의 사제 및 성기사와 의견을 대립 중이십니다.”
“...대립?”
대립이라는 말에, 둘은 더 당황했는지 질문을 더 던져보았다.
“...저기... 이름을 알려줄 수 있니?”
“아인입니다. 본래 이름은 디아트였으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목 하에 아버지께서 변경시켜주셨습니다.”
기이한 집안 사정과 어투에 질문은 조금 더 세밀해진다.
“그럼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요?”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라 부르는 걸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유전학적으로는 아버지이나, 아무래도 부담이라는 명목에 그 호칭은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행동과 상황으로 봤을 때는 제 아버지에 가장 가까운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 말에 그 둘은 서로 아인이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대화를 했다.
“...아무래도 가정사가 복잡한 것 같죠?”
“...예... 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요...”
설명만 들으면 안타깝고도 무거운 가정사가 그려졌다. 보호자와의 관계는 사생아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복잡한 인과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사가복잡하다는 기준은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알고 있는 대중 상식에 기반을 두자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다 들렸다는 것에 놀란 것인지, 성인 후보와 용사 후보는 더욱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신전에 오신 까닭은... 무엇인지...?”
“대표적인 사유는 제 상태 분석 및 유전학적으로 어머니인 인간에게 제 존재를 보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머니? 엄마도 신전에 계셔?”
“아버지는 어머니께 저에 대한 설명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사전의 설명이 없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사가 어지간히 배배꼬인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는 작전 타임.
“...신전에 유부녀도 사제가 될 수 있나요?”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이혼을 했고 기도와 맹세를 하면 신전에 입교할 수는 있거든요.”
아무래도 저 아이의 아버지는 그렇게 성직자가 되어 떠난 어머니를 찾아 신전에 온 것 같았다.
“...그럼... 아버지 이름은 어떻게 되니?”
아인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레오나르도, 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
{...}
싸늘한 침묵, 신전의 따스한 빛은 그림자에 잠겼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한 원인인 아인이었다.
“혹시 어째서 심박수가 높아지고, 살의가 담긴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우선... 네 아빠가 있는 곳까지 같이 가줄 수 있을까?”
입에 혀를 강하게 씹으며 간신히 살의를 누른 아리아는 극한의 인내를 발휘해 부탁을 구했다.
“어려운 부탁입니다. 그런 상태로 가면 당신이 아버지를 위협해 살해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나도 네 아빠랑 무척이나 친한 사이여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리아스필이라는 사람인데, 혹시 들어봤니?”
그 순간, 아인의 자색 눈동자가 커졌다. 무감각한 감정이 조금 놀란 것처럼도 보였다.
“이해했습니다. 이야기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서 함께 동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야지...”
미소에는 살의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그득하게 차있는 악의와 살의, 분노는 인간의 것을 초월하고 있었다.
“...아리아스필 님, 혹시... 죽이실 건 아니죠...? 우선 사정을...”
“죽이다니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죽이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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