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7 성인-4
“...농담이라면 너무한 거 알지?”
도피의 제안을 무겁게 여기고 싶지 않았던, 아리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진심이어도 너무하고, 진심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농담을 치부될 제안에 진심이라는 말뚝을 박아 고정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언제나 연 건은 레오의 진심이었고 말이다.
“...죽을 때까지 쫒길 거야.”
도주를 도우면 라인하르트 가문 뿐만 아니라, 신전에서도 대대적으로 추격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잡히기라도 하면...
“잡히면 가문에서는 영애와 야반도주를 한 죄로 사형, 신전에서는 용사를 홀린 죄로 사형이겠군요.”
운이 나쁘면 간신히 살린 채로 끝없는 고문은 받을 테지. 그래도 마땅한 죄이니까.
“그 정도는 돼야 열심히 도망치겠군요. 안 그런가요?”
하지만 목숨을 위협당하는 것도, 죽을 때까지 추적을 받는 것도 익숙했다. 지금까지 쓰러뜨린 기사나 죽인 현상금 사냥꾼만 세도 아예 군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빠나 할아버지가 들었으면 바로 기사직을 반납해야 했을 거야.”
이제는 아예 빈정거리는 어투로 아리아는 핀잔을 주었다.
“한번 하려고 했는데, 두 번이야 그리 어렵지 않죠.”
그렇지만 비아냥거리는 것에는 레오가 익숙하고 몇 배는 더 능숙했다.
“...왜?”
그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는 대답에 아리아스필은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지금은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저 소년은 태연히 대답한다.
그렇기에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그 결단은 어디서 나오는지.
“하고 싶어서요.”
지극히 일차원적인 말, 인과적으로 당연한 말이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럼 아가씨는 왜 절 붙잡았는데요?”
“...그건...”
역습 같은 질문, 그 질문에 아리아는 당황한 것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대답해야 한다면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다 고백해야할지도 모른다.
그 턱 막힌 대답에 레오나르도는 피식 웃게 되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인과적으로 단순한 요인의 표현.
행동으로 옮겨지는 지극히 단순한 욕망의 해석.
“진짜 별것도 아닌 건데, 때로는 그게 어떤 의미나 이유를 가진 것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더라고요.”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그 힘을 체감한 레오나르도가 하는 조언이었다.
“만약 용사가 되기 싫다면 되지 않는 게 좋다고 전 생각합니다. 억지로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그 책무와 의무의 결말은 레오나르도는 영원한 과정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세상이 위험해지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무책임한 대답.
이와 같은 대답이 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조금이나마 미래를 봤기 때문이라고.
회귀자는 조용히 독백했다.
“까놓고 말해서 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망할 세계라면, 그런 세계는 진짜로 망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회귀자는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품었으니까.
그 말에, 그리고 지금까지 한 말에 아리아스필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도저히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저 소년이 해주는 말에 진심으로 감사를 느꼈으며, 저리도 태연히 고민을 덜어주니 얄밉게도 보였으며, 망설임이 없는 선택에는 존경마저 실감할 정도였다.
“...그러면 왜 같이 도망치는데...?”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짧은 대답에 아리아스필은 이 감정이 뭐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아가씨 곁에 있고 싶어서요. 그러면 걱정도, 외로운 것도 덜할 것 같아서요.”
자신은 이런 레오를 사랑한다.
레오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대로 가문에 있으면 방조죄로 그대로 참수당할걸요? 저도 살긴 살아야죠.”
풋
“...뭐야, 그게.”
핀잔과는 별개로 그녀의 얼굴에는 구름이 사라졌다. 시답지 않은 농에 웃음이 터지며 고뇌의 사슬이 느슨해지는 걸, 그녀는 마음 속 깊이 체감했다.
“...그럼 만약...”
고뇌가 나슨해지자, 다른 미래를 떠올릴 여유가 생겼다. 아리아는 그대로 또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내가 용사를 하겠다고 하면?”
“그럼 세계 최고의 용사님을 모실 기사가 돼야죠.”
그녀에게서 다시 웃음이 터뜨려졌다. 저렇게 대답할 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직접 귀로 들으니 편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이로 아리아에게 남아있는 불안감은 마음을 비집고 흔들기 시작했다.
“...될 수 있을까? 내가...?”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가씨의 경우에는 하고 싶은가가 더 의미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아리아스필을 곁에서 가장 깊게 있었던 이인자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게 맞을까? 상식적으로는 반대잖아.”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을 다 깨부순 아가씨가 그리 말하니 참 묘한 지적이네요.”
차강(次強)이라는 자리는 최강(最強)이라는 존재를 가장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특등석이니까.
“아가씨는 제가 봐왔던 사람 중에 가장 특별한 사람이거든요.”
“...”
특별, 그건 보통과 다르다는 말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대화 맥락상이나, 관계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사용된 말일 것이다.
사랑, 그것 또한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이니 이는 같은 감정으로 연결되는 거 아닌가...!
“...저...정말이야?”
확 붉어진 얼굴을 고개를 푹 숙이는 걸로 가린 아리아는 일부러 차갑게 물었다.
“물론 좋은 쪽으로 가장 특별한 사람이죠.”
이건 확실하다. 아예 레오 쪽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분명 레오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지.’
분명 이런 흐름에서 레오나르도는 항상 한 발 물러나거나, 말의 흐름을 우정이나 충성심으로 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럼 약속해.”
티는 안 나게, 하지만 확실히 못은 박아놔아야지.
“나보다 특별한 사람은 두지 마.”
“네, 알았어요.”
명령하자마자 레오는 답했다.
“...정말?”
너무 즉답으로 나오니 오히려 아리아 쪽에서 당황해버렸다. 이렇게 바로 답할 만큼 가벼운 질문처럼 보이는 건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데요? 지금까지 그랬잖아요.”
생각해보면 레오나르도는 템페리우스 가문의 회유도, 에일린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조차 레오나르도는 본인보다 아리아 자신의 안전을 생각했다.
그러니 아리아의 말은 사실상 이미 2년 동안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으...”
행복의 웃음과 부끄러운 신음이 섞여 미묘한 화음을 자아내었다.
“괜찮으세요? 지푸라기가 간지러운가?”
이번에는 레오나르도의 둔감함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지금 이 표정을 들킨다며 신전에 있는 동안은 평생 이불을 차며 잠을 청해야할 것이다.
“그럼 가자.”
“어디로요?”
“사과하러. 그리고 제대로 용사가 되러 가려고.”
아리아는 옷을 털며 레오나르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혼에서 밤으로 넘가기 직전의 태양이 마지막 절정에 다다른 탓일까, 그녀의 머릿결은 황금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그럼 제대로 정돈은 하죠. 잠시 앉아보시겠어요?”
“...어? 어어.”
아리아스필은 레오가 깨끗이 치운 자리에 무릎은 꿇은 채 정좌로 자리에 앉았다.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의 각오를 지지하기 위해 본인 나름으로 방법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어? 갑자기 머리는 왜...!”
“아무래도 헝클어진 채보다는 깔끔히 정돈하는 편이 낫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아리아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빗은 검은 돌로 만든 것으로 대신 빗어주고, 고르게 결이 다듬어지자 레오는 손목에 묶은 가죽끈을 풀어내었다.
“어디...”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한손으로 잡은 뒤, 가죽끈으로 묶어 머리를 정리했다.
“...이건...”
“예전엔 마을 사람이나 엄마한테 많이 해드렸거든요. 간단한 머리 정도라면 할 수 있어요.”
아리아스필은 자신의 말총머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으면 바로 거울로 뛰어가 확인한 뒤, 모든 가족들과 사용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끈은 어디서 났어?”
“예전에 어머니께 자주 묶어 드리던 가죽끈이에요. 지금은 팔찌로 차고 다니고 있죠.”
계속 부적으로서 챙기고 있었던 가죽끈, 회귀 전에는 손목이 잘릴 뻔했을 때 아슬아슬하게 끈만 베여서 버려졌다.
“...그렇게... 중요한 걸 나한테 줘도 돼?”
“예? 중요한 거니까 드리죠. 오히려 돈은 없는지라 멋진 머리장식을 못 드려서 민망하네요. 별로이다 싶으시면 안 쓰셔도...”
“아니야! 엄청 예쁜데! 계속 이렇게 하고 다닐게!!”
혼자서는 머리 하나도 못 정돈하는 아리아로서는 포부가 넘치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런 포부에 레오는 진심으로 영광과 감사를 느꼈다.
“...근데 그러면 혹시...”
“네?”
“...매듭머리도 될까? 머리를 땋아서...”
아리아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잠시 고민하던 레오는 이내 대답했다.
“근데 시간도 별로 없어서 머리 전체는 벼처럼 땋는 건 힘들어요. 해봤자 끝머리 정도만...”
“그 정도면 돼. 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머리 손질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 것일까, 레오은 걱정과 달리 능숙하고 빠른 손길로 머리를 땋아 매듭을 만들었다.
“어떤가요?”
아리아스필의 왼쪽 머리는 흰 꼬리처럼 깔끔히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관리하지 않아도 윤기가 나던 머릿결은 다듬기까지 하니 후광이 빛나는 것 같았다.
“좋아. 무척...”
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성검을 살짝 뽑았다.
스랑
베여진 건, 땋은 머리카락.
열심히 땋은 머리를 갑자기 잘라버리자 레오나르도는 충격에 조금 당황해버렸다.
“...왜 머리를...”
“가지고 있어줘.”
아리아스필은 그 매듭으로 땋은 머리카락을 내밀었다.
“아마 몇년 간은 보지 못할 테지만,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의미야.”
머리카락을 만지며 레오나르도는 복합적인 표정을 지었다. 기쁜 듯하면서도, 한켠으로 감동을 느낀 것처럼도 보였다.
“...제가 가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저한테 이런...”
“중요한 사람이니까 주는 거야. 마음 같아선 더 좋은 물건을 주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기지개를 키며 햇빛이 내리쬐는 마구간 밖을 향해 걸었다. 햇빛 때문일까, 아리아의 머릿결이 금발로 보일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반찬이 늘었...]
<닥치세요.>
그런 감성을 시궁창으로 던져버리는 현자였다. 아리아가 수행하는 동안, 자신은 마탑에 가현자를 제거하거나 배제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레오의 최우선 목표가 된 순간이었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리아스필이 가문을 떠나기 전, 라인하르트에 소속된 모든 사용인들과 기사, 그리고 가족들까지 전부 나와 그녀를 배웅해주고 있었다.
“꼭 돌아올게요!”
그 말에 각자의 덕담과 응원을 아리아에게 전해주며 꼭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잘 꺼지고, 기회가 되면 다시는 만나지 말자.]
{양심적으로 저희를 떠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죠. 아, 양심이라는 개념이 없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닥치고 하늘나라나 가.]
{예, 당신은 연옥으로 꺼지십쇼.}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별의 순간은 재회를 기약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나아가.
4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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