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74화 (74/248)

EP.74 성인-1

오열과 눈물의 시간이 흐르고, 다들 어느정도 진정하자.

“어...저기...”

덤덤히 바라보던 이야기의 주체였던 레오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그래. 얼마든지 의지하렴.”

감사하지만, 그런 의도로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그게 아리아가 마지막에 든 검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

그제야 다들 울상을 지우며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다. 새삼 저 울보들이 용사 라인하르트의 후예인 것이 체감되었다.

“그건... 예상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검이네.”

역시나였다. 그렇게 강력하고 성스러운 기운을 품은 예식용 검은 성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근데 결투 도중에 성검이 날아왔다고? 전에도 그랬었냐?]

<그럴 리가요.>

전생에 아리아가 성검을 뽑은 방식은 전대의 용사처럼 지극히 정석적이었다.

정확히 스무살이 된 해에, 신전에서 내려온 계시를 받은 사제 그리고 성기사가 찾아와 아리아를 용사로 임명했고.

1년 동안 신전에서 수행을 마친 아리아는 라인하르트에서 성검이 안치된 장소에서 검을 뽑았다.

[신전 수행을 고작 1년에 끝냈다는 시점에서 전혀 정석적이지 않은데?]

<아리아니까요.>

[아, 그럼 인정.]

아리아스필이기에 납득되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사실 레오나르도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원래보다 5년이나 빨리, 그것도 수행을 받지 않은 아리아가 성검에 선택을 받는다는 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성검을 직접 뽑은 것이 아닌, 성검이 스스로 날아와서 손에 쥐어진 것 더욱 기묘히 느껴졌다.

[아리아니까 이해해라.]

<그렇죠. 아리아니까.>

그런 만능적인 방식으로 레오와 현자는 나름 이해를 하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아리아니까.

“그럼... 신탁이나 계시가 내려온 건가요?”

레오의 질문에 가주 글라디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측에서도 연락이 왔다. 정확히는 성검이 뽑힌 직후에 연락이 온 거지만 말이지.”

[...성검이 뽑힌 직후? 이젠 신도 맛탱이가 갔나 뒷북을 치네.]

지금 보이지 않는 한 망령이 불경한 소리를 했지만, 어차피 죽다만 망령의 헛소리이니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신전 측 사제도 오는 겁니까?”

“...그래. 신전 쪽에서도 이미 사람을 보냈더군.”

신전 측에서, 그것도 성검의 계시를 받을 만한 인물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성인...”

“그래, 정확히는 성인 후보이신 루미네 앙겔루스 씨가 온다 했네.”

루미네 앙겔루스

현 성인 후보이자 전생에는 진짜 성인이 되는 사제였다.

“혹시 알아? 레오?”

“예예. 소문은 들었거든요.”

소문 뿐일까, 사실상 아리아가 죽은 뒤로는 가장 많이 협력을 받았던 인물이 그 사람이었다.

[잘 아냐?]

<아리아가 죽은 뒤로 생긴 대공황 사태에서 유일하게 저한테 직접 협력해준 인물이거든요.>

갖은 부상을 입어도 군말 없이 치료해주고, 자신의 위치 및 정보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때론 위험 지역에도 직접 찾아왔다.

[가문 도움은 안 받았냐?]

<정확히는 못 받은 거죠.>

그런 상황에서 라인하르트 가문의 도움을 받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왜? 또 죄책감 때문에 혼자서...]

<원로회 전원을 몰살시켜서요.>

[...어...음?]

아리아의 죽음을 본 레오는 거의 분노에 미쳐 이 일에 연관된 인물을 차례 죽이기 시작했다.

원로회의 늙은이들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딱히 잘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로 인해 벌은 톡톡히 받았죠.>

라인하르트 가의 도움을 못 받는 것은 고사하고, 왕국 전체의 대대적인 수배령이 내려져 레오는 기사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추격을 받게 된다.

[...넌 네가 죽인 사람들한테 태연히 앞에서 무릎도 꿇고 물도 멕이고 그런다?]

<그런 식으로 하면 전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모두 삼보일배할 팔자인지라... 그리고 원로원 양반들하는 꼴 보면 그다지 미안하지도 않기는 해요.>

솔직히 미안한 걸로 따지자면 가문 사람들이 먼저지, 원로원 뒷방의 늙은이들은 안 죽이는 게 싼 거였다.

[무서운 아이...!]

<언제는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습니까?>

[그건 그렇다만.]

죄를 잊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묶일 생각도 없었다. 결국은 죄를 잊으면 굴레에 묶이고, 과거에 묶이는 순간 공포를 외면하게 되니까.

“...그 성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약간 궁금했는지 아리아는 조심히 물어보았다. 현자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눈치였는지 귀를 기울였다.

“...흠...천사 같은 사람이라던데요? 여러 의미로.”

“...천사 같은 사람?”

“확실히 정확한 요약이긴 하군.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천사가 강림했다고 착각했지.”

“아, 예전에 고모가 왜 자기는 성검 못 쓰냐고 신전 가서 땡깡...”

우드득

싸게 입을 놀린 대가는 싸게 호흡기가 꺾이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리오스에게는 나중에 대충 애도를 표하도록 해야겠다.

“...천사...천사 같은 사람이면 얼굴도... 예쁘겠네?”

아리아스필은 천사를 몇 번 중얼거리더니, 이내 슬며시 성인의 외모에 대해 물었다. 역시 아리아스필도 여자인 것일까, 그런 것에 흥미가 있었나?

“예, 저도 신문에서 한번 봤는데... 정말 예쁘시더라고요.”

“정말 천사 같더군. 인품도 무척 선량하며 훌륭하다고 들었네.”

“...그렇구나. 정말 예쁘고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뭐지, 이 싸늘한 감정은?

아리아의 미소에 미묘한 악의와 증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질투네.]

<...예? 왜요?>

왜 갑자기 질투한다는 거지? 그것도 루미네한테?

[그걸 알면 이 사단 자체가 안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해. 여러 의미로.]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질투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왜 성인을 질투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나보면 생각도 바뀌겠죠. 루미네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성검으로 칼부림이나 안 나면 다행이지.]

코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어떻게 성검으로 성인을 죽인다는 말인가?

‘에이... 설마...’

근데 불안감이 남는 건 어째서인가.

지금은 부상으로 피로해서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주변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늘 갑자기 오는 가문 사람들과 달리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그가 배려심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손님이 손님인지라 우리도 접대를 위해 저택 앞 정원에서 대기해며 기다렸다.

[근데 그렇게 착한 놈이냐? 꼭 성직자니 정의니 하는 새끼들은 항상 위선이나 떨고 지랄이던데.]

현자는 아직 영체를 만들 수 없었는지, 텔레파시처럼 머리에 소리만 울려 대화를 시도했다.

차라리 평소에도 이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욕망이 생각을 잡아먹었지만 우선 질문한 것에 답하기로 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용병 생활과 고생으로 마음이 꼬일대로 꼬인 레오에게는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전형적인 말은 씨알 안 먹히는 개소리로밖에 안 보였다.

<근데 의외로 만나보니 괜찮은 사람이더군요.>

그걸 알게 된 건,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일이었다.

<그때 웨이터가 실수로 뜨거운 스프가 담긴 그릇을 루미네한테 엎고 깨뜨렸을 때였죠.>

온몸에 뜨거운 스프 국물 흘러서 약한 화상을 입고, 깨진 파편까지 튀어서 살갗에 찔리고 베였다.

성질이 더럽지 않더라도, 바로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서 루미네는,

<일단 냅킨으로 눈을 닦고, 흐르는 스프를 미리 닦았죠.>

그 정도는 상식 선이었지만, 그 이후는 착한 걸 넘어 경악스러웠다.

<그러고는 웨이터에게도 생긴 상처를 치료해주고, 주변 정리를 도와주었죠.>

얼굴 하나 안 찌푸린 채, 인자한 성인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착한 걸 넘어서 소름이 돋는데?]

<그런 것치고는 끝은 나름 인간적인 결말이었습니다.>

나중에 식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본 웨이터와 그 일행들은 그런 자비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기미도 없이 개소리나 쳐지껄이고 있었다.

-아... 아까 그 여자 때문에 점장한테 엄청 깨졌잖아. 덕분에 월급도 깎이고...

-야야, 원래 성직자가 그런 거지 뭐. 착한 소리 몇 번 하면 다 떠받들어준다니까.

-돈도 많은 여자가 팁도 안 주고... 참나...

-근데 꼴리게 생기지 않았어? 나중에 한번 대달라고 해주면...

-‘오, 맞는 말 하네. 존나 쳐맞는 말.’

그리고 그들은 매우 맞았다.

대강 개소리의 대가로 레오가 직접 주먹으로 성형을 시켜주는 사이, 그 소란에 루미네가 골목으로 왔다.

[그러면서 뭐 성인군자 소리라도 했어?]

<아뇨. 패는 거 도와줬죠.>

[...뭐...?]

정확히는 팬 뒤의 치료였다. 화가 나는 것도, 그걸 처벌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으니 마음껏 때리라고 했다.

어차피 치료하면 신고할 수도 없으니 편안히 즐기라고 하는 건 덤이었고.

[...오, 성직자치고 괜찮은 인간일세.]

<저랑 같은 고아기도 해서 말이 잘 통했거든요. 단점이라고 하면 혼잣말이 심하다 정도일까요.>

그래도 그건 종교직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때때로 그런 식으로 계시를 받는다고도 본인이 말하기도 했고.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건가?]

분명 비꼬는 의도일테지만, 그다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레오도 그렇게 인정하는 바였으니까.

예의과 품격은 알프레드에게 익혔다면, 인성과 윤리는 루미네에게 배웠다고 할 정도였다.

[...너 설마 걔를 좋아서 아리아한테 찬밥인 거야?]

<...예? 저 여자 좋아하는데요?>

인간적으로 좋아하지만, 성적인 의미로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애초 전문 성직자인 사람한테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지도 모르겠고.

[...걔 남자야?]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단단히 오해한 현자는 당황스럽게 되물었다.

<예? 그런데요?>

루미네 앙겔루스는 성인이라는 명칭과 외모 때문에 자주 혼동하지만, 엄연히 남자다.

[...뭐야... 보통은 성녀 아니냐?]

<300년 동안 성자도 가끔씩 나타나서 아예 호칭을 통합했어요. 그 편이 차별적이지도 않다나?>

물론 그 중에서도 루미네는 특출난 편에 속하지만 말이다.

<현자님 시대 때 성녀는 어땠는데요?>

그러고 보니, 현자의 시대에도 신전은 있었으니 당연히 성녀나 성자도 있을 테니 연관 정도야 있을 테지. 인연이 있다면 나름 재밌는 이야기도....

[미친년이야.]

그래, 기대도 안 했다.

[그냥 욕하는 게 아니고, 진짜 미친년이다. 광신도에 마조...]

그 순간,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저택의 정문이 열리며 수수한 마차 하나가 들어왔다.

<오네요.>

수수한 마차에 다들 경계가 살짝 느슨해진 찰나,  호위 성기사가 마차에서 내린 뒤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날개?”

한 기사가 마차에서 내밀어진 날개를 보며 무심코 말했다. 팔이라고 하기에는 흰빛깔에 깃털까지 있는 것이 날개가 확실했다.

이내 그 날개의 주인 마차에서 완전히 몸을 내렸다.

“오셨습니까? 루미네 앙겔루스 성인님.”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긴 머리, 보석과 같은 녹빛의 눈동자, 무엇보다 눈에 띄이는 것은 등줄기에 당연하다는 듯 달려있는 날개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글라디오 가주님. 아직 후보이니 그리 무거운 호칭은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루미네는 날개에 향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정한 미소와 함께 라인하르트의 가주와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짜... 천사야...?”

아리아스필마저 놀란 것인지 루미네와 그의 날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류 수인이신 것 같네요.”

“조류... 새 수인 말이야?”

“네, 딘 형 때와 같은 경우라고 보시면 돼요.”

수인은 딘 형과 같은 늑대 인간이 보편적으로 유명하지만, 리저드맨이나 하피와 같이 파충류나 조류 같은 수인도 드물게 존재했다.

루미네는 격세유전으로 수인으로 태어난 케이스였고 말이다.

[...뭐야... 왜...]

현자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엔 여잔 줄 알았어요.>

사실 레오도 처음에도 그 모습에 남자라고 한 것에 충격을 받기는 했다. 같이 화장실에 갔다가 알게 된 것일 뿐이지.

[왜 저 새끼가 있는데...!]

<...예?>

레오나르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택에서 현자가 보지 못한 사람은 따로 없었으니, 그를 놀라게 한 인물은 저 마차의 외부인들 중 하나일 것이다.

<혹시 저 성기사요?>

루미네는 솔직히 말해 연관이 없을 것 같으니, 남은 건 호위로 붙은 저 성기사 뿐이었다. 그러니 굳이 추측하자면 저 성기사...

[아니, 그거 말고 날개 달린 년!!]

<...루미네를 안다고요? 어떻게...>

[걔 말고 다른 자식 말이야...!! 인성에 폭탄 맞은 년!!]

인성에 폭탄을 맞은 것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분하는가, 그보다 지금 날개가 달린 인물은 루미네 한 명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날개가 달린 사람이 또 어디에...>

[야, 눈 감아봐. 안 보이는 것 같으니 보여줄게.]

<...예? 예예... 그정도야 뭐...>

레오는 잠시 눈을 감으며 현자가 뜨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떠봐.]

<예. 어떻게...>

눈에 들어오는 건, 유령의 두 손가락.

평소에는 만져지지도 않는 영체가 확실히 눈에 닿는다. 이내 눈이 찌부러지는 감각과 함께 고통이 밀려온다.

“으아아아악!! 내 눈...!! 눈이...!! 아악...!!”

현자 이 미친 늙은이가...!!

“레오?!”

“괜찮은가?! 설마 후유증이 악화됐나?!”

가문 사람들이 레오의 비명이 급하게 달려오고, 마찬가지로 성직자였던 루미네도 달려왔다.

“괜찮으신가요? 눈에 문제가 있으셨나요?”

루미네가 손가락으로 레오의 눈꺼풀을 열어보며 물어보았다.

“...아니...그게, 갑자기...”

그 순간, 고통을 느낀 레오의 눈에는 또다른 날개가 들어왔다.

날개뿐만 아니라, 루미네와 달리 머리에는 금테까지 장식되어 떠다니는 것이 마치...

[...성녀야. 그것도 300년도 더 전에 나랑 만났던 성녀.]

<...성녀요?>

이미 죽은 지 몇백 년은 더 된, 그 성녀가 여기에 있다고?

[앤젤라 루키페르, 아까 말했던 미친년이야.]

루미네의 곁에는 천사가 된 성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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