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성검-4
원로회는 표면적 임시 동결의 형태로,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결정타는 역시나 레오나르도라는 와일드 카드 때문이었다.
청문회에서 나눈 문답 내용은 서기가 기록해 자료로 남아있었고, 원로회 측으로부터 가주의 권한으로 강제로 압류하게 되었다.
가주의 행동력으로 인해 원로회가 장난질 칠 시간도 없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마르켄과 크리스까지 보증했기에 신뢰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그 청문회 내용을 알게 된 라인하르트 가의 모든 사람들은 두 가지 성향의 일관된 반응을 보였다.
1. 원로회가 단체로 노망이 났구나.
또는
2. 저런 청문을 당하면 자신이라도 나갔을 거다.
사실상 원로원들이 한 행동은 충절과 신의를 지킨 기사의 공을 깎아내리고, 생트집까지 잡아 없는 죄값까지 물으려고 한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레오나르도가 변호나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레오나르도에게 호의가 없거나 반감이 있던 이들마저 인정할 정도로 논리적이고 타당한 변론이었다.
아무리 탐탁지 않아도 공을 못 줄지언정, 죄값을 물으려고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는 게 대중의 정론이었다.
결과적으로 분노한 여론에 힘입어 가주를 포함한 라인하르트의 중진들은 원로회의 모든 활동을 동결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때도 원로원들은 반발하고 이간질했지만,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르트의 한 마디에 상황을 일축시켰다.
-당신들의 노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희생해야 만족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원로원주였던 제이론 라인하르트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까닭도 한몫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미 동결시킬 준비를 마친 뒤였다.
그렇게 원로원은 공식적으로는 동결, 암묵적으로는 와해, 내부적으로는 매장 당했다.
***
한편 저택에서는 분주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원로회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언론에 새어나가지 않게 만들고, 원로회 없이도 가문을 이끌 체계를 정리하는 것은 그리 여유로히 끝날 일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경악스러운 사실은 레오나르도의 부상 치료였는데.
“...그게...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현재 사정상 치료 사제나 성기사는 부를 수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치료 마법사를 왕진시켰지만 저런 답이 나올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절했지만... 맥박도, 혈압도, 그리고 내상이나 외상도 없습니다. 단지 급한 소작으로 생긴 가슴과 복부 일부 부위의 흉터는 지울 수 없다는 정도입니만...”
방금 전만 해도 죽을 듯이 싸웠던 레오나르도였다. 아마 광전사조차 그 전투를 보면 기겁할 정도였으니... 부상이 아예 없다는 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법사인 제가 말하긴 뭐합니다만... 기적이 있지 않고서야...”
기적이라는 말에 다들 각자의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아리아스필이 보였던 성검의 힘은 정말 신의 기적과 같았다.
‘...초대 용사이신 루벤 라인하르트님조차 직접 성검을 뽑으셨는데...’
아리아스필의 경우에는 성검 스스로가 날아와 직접 손에 쥐게 해주었다.
그 정도면 용사의 전설을 잇는 것이 아닌, 새로 쓰는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우선 알겠네. 수고했으니 일찍 가보도록 하게.”
글라디오의 말에 치료 마법사는 그다지 걱정은 없는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며 나갔다.
“지금 투약하는 것도 마나 안정제하고 영양제이니, 기력만 회복하면 바로 일어날 겁니다. 일어나시고 문제가 있으면 다시 연락을 주시죠. 바로 오겠습니다.”
그렇게 치료 전문 마법사가 나갔을 때 즈음, 라인하르트 가의 전원은 그제서야 이 혼돈과 혼란의 도가니에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요...?”
먼저 입을 연 건 리오스였다. 때아니게, 그리고 드물게 피로와 부담에 짓눌린 표정을 지으며 리오스는 긴장한 질문을 꺼냈다.
“내 손녀딸이 용사가 됐고, 성검으로 저 시원치 않은 놈을 이겼다... 짧게 요약한다면 이 정도겠지.”
이 자리에서 가장 고령의 세월을 보낸 마르켄이기 때문일까, 그 노기사는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일은 한 줄로 요약해내었다.
“...분명... 처음에는 철검이었는데...”
이 일의 장본인인 아리아스필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의식적인 행동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본능적이거나 직감적인 행동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태풍이 불고, 바다에서 해일이 오는 걸, 대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걸.
자연을 일개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것처럼.
“그래, 어느 순간 성검이 날아와서 자리를 바꾸었어.”
일출이 시작되는 듯한 감각이 손에 새겨졌다.
“...성검은 다룰 수 있겠나? 아리아?”
크리스는 아리아가 든 성검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밀을 지키기 위해 우선 천으로 감싸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태양 같은 신성의 기운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그게...”
아리아는 천을 벗겨 성검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향해 강하게 찔러보였다.
“뭐하는...!”
다들 말이 안 나왔다. 뭐가 됐든 라인하르트의 전설 자체였고, 마왕으로부터 세계의 구한 신물이자 세상 그 어떤 검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명검이었다.
그런 성검이...
“날이 죽어버렸어요.”
마왕은커녕 손바닥 하나에도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완전한 인정을 받은 건 아닌가보군.”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정식으로 라인하르트 가의 보관소에서 성검을 뽑은 것도 아니었고, 신전 쪽에서 신탁이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러고 보니 신전 쪽에서는 연락이 안 왔습니까?”
“...그게 문제지.”
신전, 정확히는 빛의 신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왕국 최대의 종교 단체.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빛의 신이 하사한 성검을 받은 용사 가문의 후예.
이 두 집단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다.
“아마도 신전 측에서는 이미 움직였을 것이다. 저들도 신성력을 느꼈을테니 찾아오는 건 그리 먼 일이 아니겠지.”
본디 신탁을 받고, 계시를 말하는 것이 성직자의 일, 그것도 성검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르는 게 더 힘들 것이다.
“...그럼 용사로서의 수행을...”
“그 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나눠야겠지. 아리아, 지금은...”
“아, 그게...”
아리아는 지그시 쓰러져 있는 레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리아의 얼굴과 시선을 본 리오스는 거기에 있는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자자, 우선 저희들끼리 나가서 얘기하죠. 아리아도 많이 지쳤을 텐데, 쉴 필요는 있겠죠?”
“그럼 나가서...”
눈치는 겉멋과 등가교환한 크리스를 향해, 리오스는 눈에 강렬한 힘을 주며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럼 나가서... 우리들이 먼저 신전과 연락을 취해보도록 하지.”
“...알겠다.”
마르켄도 어렴풋이 진의를 안 것일까, 짧게 대답하며 수긍했다.
“확실히 리오스의 말도 일리는 있지. 그럼 먼저 가볼테니, 레오나르도 군이 깬다면 이야기 해주거라.”
의외로 레오의 진의를 깨달은 글라디오는 지금 상황의 뒷면은 모르는 기색으로 병실 밖을 나갔다.
“예. 알겠어요.”
아리아는 건조히 답하며 나가는 가족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발걸음이 점차 멀어지며 작아져만 가자 아리아의 눈에 있는 생기도 마찬가지로 점차 사그라들었다.
뚜벅뚜벅, 철컥.
아리아스필은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자, 문으로 걸어가 문을 잠갔다.
“...일어난 거 알아.”
“...”
레오나르도는 미동 하나 없이 숨만으로 편안히 내쉬고 들이쉬었다.
지금 현자마저 조용한 것은 뭔가 이상했지만, 오래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기절을 연기해야했다.
“지금 일어나면 덜 화낼게.”
흥정이 요소가 되지는 않았다. 상대적인 ‘덜’보다는 ‘안’ 화낸다는 절대적인 약속을 받아야지만 레오나르도는 용기를 내어...
“아빠! 저 마탑에서 레오랑...!”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가씨. 살려주세요.”
그래도 바로 죽을 수는 없었다.
“또 거짓말했네? 취미인 거야? 아니면 특기인 거야?”
“...그게... 그러니까...”
짜악!
경쾌한 타격음, 레오나르도의 얼굴에, 볼에 붉은 멍이 들었다.
“다쳤으니까 지금은 이걸로 넘어갈게.”
뺨을 친 것은 아리아스필, 레오나르도가 한 행동에 비하면 아주 싸고 인도적인 처벌이었다.
“...네...감사합...”
짜악
이번에도 뺨을 맞는다. 차라리 다른 곳을 때렸으면 좋을 정도로 같은 곳을 정타로 날린다.
“감사하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이야?”
그녀 말대로였다. 지금 말할 것은 감사 같이 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죄를 고해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기분은 여전히 불쾌했다. 레오가 한 잘못은 그 정도로 풀릴 것이 아니었다.
“뭘 잘못했지?”
잘못한 것은 수도없이 많았다.
멋대로 가문을 나가려고 한 것, 기사를 그만두려고 한 것, 결투에서 의도는 있었다고는 하나 계속해서 모진 말과 공격을 날린 것.
거기에 발정난 개처럼 계속 여자가 꼬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둔감히 있는 것도 큰 죄목이었다.
“...아가씨의 믿음을 배신했죠...”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그 한 마디를 통해 그녀의 불쾌감을 찝어내었다.
“...잘 알고 있네.”
그나마 화가 풀린 것일까, 아리아는 손찌검할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은 있었다.
“...그럼 왜 배신했는데?”
그에 대한 의문이었다. 배반한 의심도 특정하지 않기에, 의문의 답도 자신이 예상치 못한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
“대답해봐. 왜인데.”
잠시 망설이던 레오는 입을 열었다.
“...두려웠습니다.”
아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레오는 두렵다고 한 것인가?
어떤 적과 싸워도 항상 자신있게 이겨왔던 그 레오가?
“...매번 악몽을 꿉니다.”
이내 레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었다.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레오나르도의 가장 깊은 흉터였으리라, 아리아는 생각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가씨가... 사라지고... 그 불행으로 세상 모든 것이 결정되더군요...”
어째서인지 그 이야기는 과거에도 존재했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을 꿀 때마다 몸의 시간은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레오의 정신은 그 정지된 시간을 원치 않아도 끝도 없이 봐야한다.
“그럴 때마다 세상 모든 음식은 불로 달군 쇳가루 같고, 물과 공기는 황산처럼... 쓰라려서 토가 나올 것 같았죠...”
왜 자신은 몰랐던 것일까.
“사람의 손결은 사포로 피부를 긁어내는 느낌이고, 속삭이는 행복에도... 다음 불행을 암시하는 복선 같아... 대답할 수도 없더군요...”
레오나르도는 항상 무섭고 힘들어했는데.
왜 멋대로 강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전 뭘...”
와락...
아리아스필은 어느샌가 레오나르도를 안고 있었다.
아무런 인과도 없었다.
단지 이 소년이 울음을 참는 건 곤란하다고.
그녀는 생각해버렸다.
“...들려?”
서로의 가슴이 닿으며 심장 소리가 맞닿는다. 심장의 박동이 생명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무서우면 계속 안아줄게.”
이 소년이 행복해졌으면 했다.
“난 살아있다고 계속 알려줄게.”
자신의 행복을 당연히 여겼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가지 마.”
소년의 어깨가 간혈적으로 들썩인다. 울음이 눈물로만 나오는 건, 아마 소년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영원히 내 곁에 있어.”
그녀는 작게 그렇게 속삭였다.
서로의 온기는 각자의 몸에 오랫동안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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