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원로원-3
원로회장은 무채색의 집합체나 다름없었다. 요새는 잿빛의 벽돌로 이루어진 칙칙한 성벽이었고, 그 주변은 백색으로 눈으로 뒤덮여있으니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게다가 지금은 하늘에 밤의 시간이 드리 누웠으니 더더욱 소름끼치는 분위기는 형성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자는...사실...비열하고...늑대는...파벌 문화에... 믿었던 백호마저... 하하...”
옆쪽에서 잿빛이 된 낯짝으로 중얼거리는 한 여성이 있으니 이보다 섬뜩한 장면은 따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러게 왜 주책을 부려선.]
<저라고 좋아서 그랬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잘못은 저 나이 먹도록 동화 속 환상에 빠진 크리스 님에게 있었다. 고작 그 한마디에 정신이 반쯤 붕괴돼서 아예 지금 바로 문을 열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근데 고작 그게 그렇게 충격이냐?]
따지고 보면 레오는 자연적인 사실을 학문을 통해 설명했을 뿐이었다.
<...알면 제가 위로라도 해드리겠네요.>
[매정한 놈.]
매도에도 레오나르도는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았다. 당초에 저러는 게 크리스 님의 체면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다...”
아예 이젠 하얗게 질린 크리스는 웅장한 대문으로 자신을 안내했다. 대문의 중앙에는 라인하르트를 상징하는 성검과 사자의 문양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그 문 앞에 서자 옛일의 감회가 되새겨졌다. 예전에는 이 문에 서기까지 몇 년은 넘는 세월을 겪어야 했었는데, 지금은 고작 2년하고도 몇 개월만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영광스러운 표정은 보기 좋다만, 그리 안심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런 감회에 젖은 표정을 보며 크리스는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조언했다.
“이곳에 있는 건, 라인하르트의 가장 깊은 곳에 말뚝을 꽂은 인물들이니까.”
어련할까, 자신이 그걸 가장 뼈저리게 깨달은 인물이었다.
“알겠습니다. 유념하죠.”
“그럼 들어가지.”
크리스는 양손으로 대문을 밀어 열었다. 열리자 보인 것은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원탁이었다.
원탁의 중심으로는 옛 위인들이 차례로 앉아있었다. 모두 라인하르트의 영광을 함께 했던 전사이자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크고도 두드러지는 의자에 앉은 노익장이 있었으니.
“원로원주 제이론 라인하르트님을 뵙습니다.”
라인하르트의 가장 큰 기둥인 제이론을 향해 무릎과 고개를 숙였다. 전통적인 예법에 맞는 인사에 다들 조금 예상 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날 알고 있나?”
제이론은 주름진 입술로도 무게있는 말을 낼 수 있었다. 그 무게에 그가 가지고 있는라인하르트의 이름이 감각적으로나마 짐작되었다.
“제이론 라인하르트 님의 존함과 그에 맞는 드높은 명예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주님이 이룩하신 역사와 위업은 제 미흡한 경험으론 헤아릴 수가 없군요.”
격조가 있으면서도 아부적으로도 보이는 발언, 그 낮은 자세에 원로원들은 보수적인 마음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릇을 어림으로나마 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레오나르도를 원래 알던 이들은 약간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레오도 다를 게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고개를 들어라.”
그 말에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들었다. 쏘아지는 시선들, 단순히 호의가 없는 것이 아닌, 마나를 넣은 위협의 의도가 다분한 눈빛이었다.
[나이는 내 반도 반도 못 쳐먹은 것들이 뭘 잘했다고 눈을 처부라려?]
사실 그런 시선에는 익숙했고, 늙은 노인들을 상대하는 건 옆쪽에 있는 유령 덕분에 원치 않아도 익숙해져버렸다.
“이제부터 청문을 시작하겠다. 질문을 하면 즉각적으로 답하도록 하여라.”
오자마자 시작하는 청문회, 여유를 안 주는 것이 아닌, 아예 숨통을 조여올 생각이었다.
이해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멋대로 질의를 시작했다.
“먼저 현자의 유산에 관한 것부터 대답해보도록 하지.”
청문회 시작은 항상 대상의 공처럼 보이는 것을 건드린다. 당연히 질의를 당하는 대상은 그에 대해 꿀리는 것이 없을 테니 무의식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말이다.
“우선 그런 중대 사항에 대해 즉각적인 보고가 없었는지 묻고 싶군. 어째서지?”
항상 원로원의
능구렁이들은 그런 의표를 찾고 헤집는데 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천천히 질의를 통해 공에도 잘못을 캐내는 것으로 대상의
정당성을 없애고, 업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전략, 졸렬하지만 의외로 잘 먹히는 방식이었다.
“보고를 하면 위험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의의 난전 또한 레오의 특기였다.
“처음 찾은 ‘평복과 평유의 반지’는 일종의 귀속 마도구, 한번 끼우면 착용을 해제할 수 없죠.”
사실을 전제로 하되,
“만약 그런 상황에서 보고를 하게 되면 몇몇 마법사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반지를 뺏으려고 했겠죠.”
뒤에는 추가적인 이유와 명분을 감싼다.
“그렇게 되면 반지를 착용한 동료 마법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라인하르트의 기사도의 따라 피해를 줄이고자 한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만약 전제인 사실에 죄 자체가 없다면 이유와 명분의 존재의의는 더욱 가치와 신뢰가 높아지게 된다.
“들키지 않고 보고하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말하는군?”
“제가 만약 현자의 유산을 찾기 위해 정식으로 제안과 계획서를 올리고 갔다면 그에 대한 문책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은 대부분 레오나르도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마탑의 허가서를 따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휴가를 사용한 것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잘못이라고 하기 부족한 내용들 뿐이었으니까.
“알프레드 집사장님과 가주님의 허가가 떨어진 휴가계가 있을 테니, 신뢰가 어렵다면 확인해주시죠.”
절차를 지킨 레오나르도 쪽에서는 밀릴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후에 얻은 현자의 유산은 멋대로 마탑에 맡기고 전시한 거지? 독단적이라 판단되지 않은가?”
보통이라면 ‘자신의 것’이여서라는 말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원로원과 자신의 관계는 아득한 갑과 을, 소유권을 주장한다한들 그 관계로 묵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가져왔다면 자격은 있되, 명분은 없고, 가치는 있되, 이익은 없는 상황이 생길 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제일 중요시 여기는 부분을 방패로 삼아야 했다.
“본디 현자의 유산은 마탑에 종사하는 마법사들을 위해 남겨든 현자님의 지혜입니다. 만일 제가 시험에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챙기려 했다면 마탑을 포함한 모든 마탑의 마법사들의 공공연한 적이 되겠죠.”
귄위주의와 선민사상에 찬 원로원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건, 그 귄위와 선민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원천.
“그리고 이는 라인하르트의 명예의 실추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 권리 때문에 라인하르트의 명예에 먹을 칠할 수 없는 노릇이었죠.”
라인하르트 가문 자체를 방패로 삼으면 그만이었다.
“적어도 상의를 하고도 결정할 수 있는 문제 아니었나? 내가 보기엔 단지 거기서 나오는 이익을 얻기 위한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나름 예리했지만, 그 정도가 저 노인네들의 한계였다.
“확실히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그럴 권리는 있습니다. 전 라인하르트의 명령에 현자의 유산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닌, 개인적인 휴가를 소비해 유산을 찾게 된 것이니까요.”
아까 그들도 수긍한 부분을 다시 이용해 강조한다.
“만약 제 판단 하의 행동으로 라인하르트 가의 지탄과 멸시가 생긴다면 처벌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지금 몇몇 세간에선 이 행동을 드높이며 라인하르트의 기사도 또한 높게 평가하게 되었으니까.
“...그럼 다음 안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지?”
이 말은 위협 같지만, 사실 일차적인 질의응답의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 건으로는 도저히 따질 게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마탑에 생긴 테러 상황에서의 대응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실례되오나 질문의 방향성이 정확하지 않군요. 뭘 설명해야하는지 말씀해주셔서, 어떻게 설명할지를 알리지 않겠습니까?”
정중한 말투와 질문이었지만, 저 늙은 능구렁이들은 여기서 숨은 의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나와서야 나를 처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늙다리들이 고수하는 얕은 수작으로 나를 처벌하는 것도, 문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의미이자 도발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좋다... 그럼 당시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를 혼자 두었지? 휴가 기간 동안 너의 직책을 망각한 것인가?”
“언동이 날카롭고 경박하군. 체통을 지켜라.”
의외로 자신을 두둔해준 것은 마르켄이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이였을지, 아니면 저 소년은 자신이 직접 후드려패고 싶으니 두라는 의미였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자리를 비운 건, 마탑에 있는 편이 아리아스필님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마탑 내부는 최신, 최선의 경비시설이 설비되어있죠.”
“질문의 요지를 이해 못 했나? 난 그런 장소라 할지라도 자리를 비운 너의 잘못에 대한 문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비운 것이지?”
[지는 대답의 의미를 이해못한 것 같은데?]
절묘한 요약이었지만 ‘격식과 격조’라는 쓸데없는 포장을 두껍게 할 필요는 있었다. 아랫사람이면 말 한 어절에도 꼬투리를 잡는 게 그들이었다.
“정확히는 제가 가는 현장에 갔으면 아리아스필 님은 더 위험했을 겁니다.”
“어째서지? 경우에 따라선 그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이젠 인내에도 한계였다.
“마인 제하드 다이논스가 민간인을 협박해 절 불렀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레오는 침묵에 싸늘함을 느끼기보단 기가 찼다. 분명 보고도 해놓고, 보고서에도 작성해 보내놓았을 텐데 제대로 보지 않은 눈치였다.
“제하드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민간인을 협박해 절 불렀습니다. 그때는 점토사와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죠.”
그랬기에 테러 상황 자체에 자리가 빈 것은 설명되었다.
“그랬기에 제하드의 제압과 민간인의 안전을 우선 순위에 뒀을 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것이 아리아스필 님의 안전과도 연결된다고도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점토사만 없었더라면 제하드 정도야 얼마든지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오만하군. 혼자서 마인을 상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하, 기가 차는군요.”
이번에는 크리스 쪽에서도 입을 열었다.
“실제로 상대했고 승리한 상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정녕 의미가 있습니까?”
“판단이 오만했다고 말하는 걸세. 만약 패배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지? 그로 인해 피해가 확산되었다면?”
쓸데없는 꼬투리에 크리스는 더더욱 어이가 상실했다.
그런 상황에선 경비를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레오는 제하드를 잡자마자 점토사와 괴인 토벌에 크게 조력했다.
문책을 한다면 제하드의 조사가 미흡했던 집행기사단과 그에 관해 수사를 어영부영 정지시켰던 원로회에 해야만 마땅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귀족 출신이었다면 벌이 아니라, 상을 주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가의 영애를 개인적인 휴가에 데려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군. 마탑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이는 처벌해야 하지 않은가?”
[개소리도 장황하니까, 개지랄로 들리네.]
현자의 말대로였다. 휴가 기간에도 주인과 호위 기사와 함께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애당초 레오가 데려간 곳은 ‘테러 도중’의 마탑이 아닌, 그저 유명한 마법의 도심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점토사와의 전투도 운좋게 리오스가 왔기에 해결된 문제일 뿐, 만약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그 젊고 오만한 혈기는 반성해야 마땅하네!”
“...그렇습니까?”
이중잣대, 그리고 오만스러운 위선으로 점철된 궤변을 들은 레오는 입을 열었다.
당초에 저들이 말로서 설득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관계상은 자신은 을, 원로회는 갑이었다.
관계로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럼 저를 어찌 처벌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방자한 것...! 그걸 스스로 묻는가?!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 자숙하도록 하여라! 원로회에선 상의를 통해...!”
“아뇨. 그건 옳지 않군요.”
간단하다.
“무슨 자격으로 옳고 그르고를...!”
“저의 과오는 지고하신 원로회가 처벌을 내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미천하며 방자했습니다. 저의 천려로는 라인하르트의 성결한 신념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원로회장의 모든 이들이 침묵했다. 반성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무언가 말의 초점이 틀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도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도록 하죠.”
“그게 무슨...”
“라인하르트의 기사직은 반납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겐 너무 무거운 자리였던 것 같군요.”
갑을관계 자체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그럼 과연 손해는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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