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6 원로원-1
마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것에 비해 심히 빨랐다.
아무리 빠른 열차더라도, 공간과 공간을 잇는 워프 게이트의 순간이동을 능가할 수는 없었으니까.
원래라면 기차를 타고 올 수도 있었지만, 기차에서도 썩 좋은 추억은 없는지라 워프 게이트를 택하게 되었다.
가문으로 돌아오자 모든 걱정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수배령까지 내려진 흑마법사 점토사에, 가문에서 퇴출당한 마인 제하드였으니 걱정을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무용담까지 되어 왕국 전체에 퍼졌다. 용사 가문인 만큼 그에 대한 전설은 위용을 떨치기 충분했다.
정작 본인들은 썩 달가운 눈치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
[왜 그리 죽상이야?]
현자는 레오의 주변을 부유하며 슬며시 물었다.
<그럼 웃을 일이 어딨습니까? 지금 가고 있는 곳을 봐요.>
지금 자신이 가는 곳은 글라디오 라인하르트의 방, 라인하르트 가주의 방이었다.
[그게 왜? 예전에도 가본 적 있잖아.]
<상황이 그때랑 같지가 않잖아요.>
당시 자신은 어렸고, 자신의 기준에선 그리 큰 소동도 벌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하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네.]
개인적인 휴가로 아가씨를 따라오게 한 것도 모자라, 점토사와 맞붙게 해버린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보상이든, 처벌이든 어떻게든 문책하러 올 테지.
[자기 딸하고 키스한 외간 남자를 살려두는 아버지는 없거든.]
<...>
저 인간을 한심스럽게 보기엔 자기 꼴도 만만치 않은 레오였기에, 소년은 그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 가주 양반은 융통성은 있어 보이던데. 칼빵 몇 번 맞는 걸로 넘어가지 않을까?]
<...가주님이 융통성이 있더라도, 그 꼰대들은 아닐 겁니다.>
지위상으로는 가주는 가문의 주인이다. 가문을 이끌고 위상을 지키는 건 가주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그런 가주가 엇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직도 가문에게는 존재했다.
<이번에는 원로원도 움직일 테니까요.>
[...어느 시대에든 있단 말이지. 나이 좀 먹었다고 세상 다 안다고 착각하는 늙은이들.]
<...>
맞는 말인데, 말한 사람이 사람인지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치기 묘했다.
[그런 눈깔로 보지 마.]
<아, 네.>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원로원의 어른이들을 한심히 여기는 고대 시대의 살아있는 화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내쫒기라도 하냐?]
<사실 귀찮은 거 빼면 하등 의미가 없어요.>
그런 지위의 원로원조차 레오나르도에게는 그다지 위협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은 여러 가지 있었고, 히든카드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틈틈이 준비해두었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원로원이 그렇지 뭐. 노인정이랑 다를 게 없어.]
<항상 느끼는 건데, 왜 저희는 뒷담화할 때만 말이 통할까요?>
[그게 뒷담화의 존재의의니까.]
연륜에 따른 훌륭한 답변이었다. 듣자마자 인정할 만큼 관록있는 해석이었다.
[어쨌든 잘해보라고. 어차피 늙은이들이 거기서 거기지.]
여기선 맞장구를 치는 게 무례한 것일까, 아니면 반론을 제기하는 게 무례한 것일까.
희대의 난제가 있다면 이런 모순이 분명 당당히 1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레오나르도는 가주의 방 앞으로 도착했다.
심호흡을 시작한다.
무의식에 있는 긴장마저 풀어놔야 만전의 상태로 앞으로의 일에 대응할 수 있었다.
“실레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레오는 가주의 앞에 대면했다.
“왔는가? 레오나르도 군.”
가주님은 자리에 앉은 채, 가볍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선 알프레드 집사장님은 그와 같은 향이 나는 차를 끓이고 있었다.
“레몬차, 한 잔 마시겠습니까?”
“네, 감사히 마시도록 하죠.”
그 말에 알프레드 집사장은 친히 레오나르도의 찻잔에도 차를 따라주었다. 진하게 피어오르는 레몬의 상큼한 향은 심호흡으로도 풀어지지 않은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야기는 들었다네. 마탑에서 여러 일을 겪었다고 했네만, 괜찮은가?”
“가문의 은혜 덕분에 안전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어투, 굉장히 각이 잡혀 있으면서도 자신감이 아래에 숨어져 있는 말투였다.
“현자의 유산을 2개나 찾아내고, 거기에 특수 마법 허가증까지, 가문의 은혜가 닿는다고 해도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다만... 그저 자네라는 이유만으로 납득이 되는군.”
지금은 흑마법사의 테러 사건을 묻혔을 뿐, 사실 그 전에 일어난 일들마저도 마탑이나 다른 가문에서도 전례는 없었다.
“마탑에서 성실히 자신을 갈고닦은 대학원생님의 덕이 컸습니다.”
마탑주들에게도 이렇게 아메리에게 공을 돌렸기에 자신은 그런 관심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말이다.
“아메리 양이로군. 리오스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 기억에 남았지.”
“나중에 제대로 감사인사라도 전하려고 합니다.”
“그건 나도 고려해봐야겠군. 마탑에 있을 때, 리오스의 말썽을 말리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네.”
대강 상상은 되었다. 그 아메리 에스프가 허물 없이 대하는 상대가 리오스인 것도 그 까닭일 것이다.
“마탑의 테러 사태 때 입은 부상은 어떻지? 괜찮은가?”
“부족하나 저도 라인하르트의 기사입니다. 그런 일로 가문에 먹칠을 할 수는 없죠.”
“자네가 부족하다 말하면 곤란하네. 그게 사실이면 기사의 절반이 직장을 잃을 테니까.”
과한 겸손은 오히려 기만이라는 의미인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오히려 약간 자만해서 말하면 라인하르트 직계나 방계가 아닌 이상, 가문에서 일하는 기사들이 전원이 와도 레오를 이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아가씨를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그리 당당하게 있을 수는 없군요.”
그 말에 글라디오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군. 부끄럽게도 자네의 말을 듣자 안심해버렸네.”
레몬 향이 진하게 나지 않았더라면 긴장했을지도 모르는 발언이었다. 여기부터가 본론이었다.
“원로원 측에선 자네에 대해 청문을 할 생각이라네. 흑마법사와 마인에 대해 자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간단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사실 이 일을 전부 진압한 건, 레오의 공이 컸으니 사실 상을 주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가문이나 전통이니 하는 건 그런 게 통용되지 않는 문제이니까요. 받아들여야죠.>
[마탑이 썩었다고 생각해는데, 그냥 전체적으로 고루고루 썩었구나 아주.]
<뭘 바라든 세상은 그 이하를 보여주는 법이니까요.>
예를 들어서 마법의 시초이자, 홀로 드래곤을 잡고, 정령들을 모아 섬을 정화한 한 현인의 정체가 옆에서 쌍욕을 애용하는 나르시시즘의 노망난 늙은이라는 사실 같은 게 대표적이었다.
“아무리 설득해보려고 해도 원로들의 의견을 바꿀 수 없었네.”
“아뇨. 괜찮습니다.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직감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레오는 레몬차를 마셨다. 달콤한 레몬의 따스함은 때론 차가운 주스보다도 상쾌했다.
“그럼 청문회는 언제 하는 건가요?”
“갑작스럽겠지만, 원로원에선 여유를 줄 기간조차 용납하지 않았네.”
글라디오의 손에는 검은색 통이 쥐어져 있었다. 그 통의 뚜껑을 열고 꺼낸 것은 양피지 한 장, 마법에 견문이 있는 레오로서는 그 종이에 대한 정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스크롤이군요.”
그것도 순간이동의 마법이 저장된 스크롤이었다.
“원로원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갈 수 있는 방법은 이 스크롤 뿐이지.”
원로원은 라인하르트의 베일 너머를 알고 있는 옛 영걸들의 집결지, 설사 라인하르트의 기사로 소속되었더라도 그 장소를 아는 건 소수 뿐이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자신 있군. 망설임이 없어.”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가주님은 피식 웃음을 내었다. 비웃음이 아닌, 자신의 걱정이 쓸데없다고 생각된 안도의 미소였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부탁하네. 알프레드.”
스크롤을 집어든 것은 알프레드, 그는 흰 장갑이 껴진 손으로 스크롤을 폈다.
“시작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군.”
스크롤의 문양에선 빛이 흘러나왔다. 빛과 색은 마치 워프 게이트에서 본 것과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운반용으로 제작된 스크롤인만큼 그리 상냥한 순간이동은 기대하지 않았다.
지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빛이 몸을 감싼다. 몸이 뒤집히며 사방으로 던져지는 듯한 감각, 이정도면 배려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괴롭히는 의도가 아닌가.
“아이고...”
퍼석
떨어진 곳은 푹신하고도 차가운 눈밭, 떨어질 때 충격을 완화해주긴 했지만, 때때로 섞여있는 얼음 알갱이들이 피부에 쓸려 거슬렸다.
[쌀쌀해지긴 했다만... 벌써 이정도로 눈이 내린다고?]
착지한 부분 뿐만 아니라, 이곳 주변 전체는 눈으로 깔려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생각하면 현자의 말대로 드물게 이질적이었다.
<원로원으로 가는 길은 원래 이래요. 그래도 이렇게 먼 곳에 던질 줄은 몰랐지만...>
원로원이 있는 지역은 결계가 쳐져있기에 쉽게 찾을 수도, 나갈 수도 없었고.
주변은 북부처럼 항상 눈이 내렸기에 이동하는 것도, 쉬는 것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알았으면 옷 좀 두꺼운 걸로 입지 그랬냐?]
<이정도면 나름 참을 만합니다.>
번개로 지져지는 것보다야 이게 당연히 나았다. 그리고 불 마법과 바람 마법을 약간 응용하면 간이 온열기도 만들 수 있었고.
“그럼...”
레오는 슬며시 반대쪽을 바라보았다. 반대 방향에는 설원과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럽고 품격있는 집사복을 입은 노후의 남성이 있었다.
“이미 예상하신 것 같군요. 레오나르도 군.”
알프레드가 장갑을 벗자 흉터 투성이인 손이 드러났다. 다도나 청소 정도로는 도저히 날 수 있는 형태였고, 양으로는 놓고 보자면 레오나르도보다도 수가 많았다.
[...저 영감, 그냥 집사는 아니었구만...]
집사장 알프레드 세바스찬
전직은 라인하르트 가의 6성 은퇴 기사.
“그런 손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겁니다.”
“이거 부끄럽군요. 평소에는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신경 써 항상 가립니다만.”
그의 양손은 단단히 쥐어졌다. 그 찰나의 동작으로 확신했다.
만약 저 손아귀에 자신의 머리가 있었다면 두개골은 바로 으스러졌을 것이고, 저 주먹이 머리에 맞았다면 머리는 형체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리지 않는 것이 더 예의겠죠?”
격투가로서의 긍지가 그의 흉터에 베여있었다.
[...초장부터 싸우는 거야?]
갑작스러운 전투 현장에 당황한 것일까, 약간 어긋난 톤으로 현자는 물었다.
<예상은 했어요.>
가주님이 저렇게 걱정하는 티를 내는 것도 그랬고, 회귀 전에도 비슷한 상황은 있었다.
<...시험한다는 핑계로 기 좀 죽일 생각이죠.>
원로원으로 처음 불러지는 기사는 일종의 시험을 받게 된다.
자격이 없는 자는 가문의 원로회에 발을 드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자격을 보이려면 그에 응하는 시련을 뛰어넘으라는 취지의 시험이었다.
보통이라면 이 혹한의 추위와 숲에서 원로원까지 살아서 도착하는 게 내용이겠지만.
<특별대우가 심하시네...>
레오나르도는 평범한 기사를 넘어선 지 오래이기에 특별한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싸울 거냐? 너로서는...]
<제가 미쳤어요?>
현자의 눈이 눈보라보다도 차게 식지만, 사실은 이게 제일 현명했다. 6성 격투가를 상대로 정면 승부는 제하드 때보다도 무모했다.
코어가 거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오러의 양 뿐만 아니라, 전투 센스, 기량, 경험마저도 한 분야의 달인으로서 성취를 이뤘다는 의미였으니까.
<가장 현명한 건, 적당히 상대하다가 숲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저들은 레오가 이곳의 지리를 모른다고 오판하고 있다. 그 점을 역이용해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면 도주 및 대응에도 이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닙니다. 생각 외로 저에겐 이점이 많아요.>
알프레드는 정권을 준비하며 전투의 전초전을 걸었다.
“레오나르도 군. 그저 치고 박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하나 조건을 걸도록 하죠.”
노집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에게 일격이라도 성공한다면, 가주님껜 아리아스필 님과 입맞춤한 것을 숨겨드리...”
카앙!!
[...야... 너...]
아까 말한 계획은 전부 취소됐다.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몹시 불리했다.
“...속전속결로 끝내겠습니다.”
말 끝나기도 전에 기습한 레오는 검을 양손으로 쥐며 말했다. 검의 기습은 주먹의 방어에 맥없이 튕겨나갔다.
[...추한 거 알지?]
그딴 게 알 바인가. 지금은 전투에 집중할 뿐. 자신의 검에는 그런 긍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레오의 검엔 각오만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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