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5 휴가의 끝-2
현재 마탑의 교통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테러로 인해 거주지를 파괴당한 사람, 물밀듯이 쏟아지는 부상자들, 그리고 이후의 테러를 두려워해 떠는 이민자.
기차를 포함한 워프 게이트조차 지금은 예약순으로 받아야 할 정도로 마탑의 교통은 포화적으로 분주했다.
그렇기에 현재 라인하르트 가문의 일행 또한 어쩔 수 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얼핏 봤을 땐, 문제는 없었지만...
“아리아 아가씨~”
그 대기 시간은 한 소녀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운 기간이나 다름없었다.
“어디 가셨을까~?”
지금 한 소년이 오러로 번뜩이는 눈을 한 채 돌아다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 추격전과 도주극의 시작은 ‘첫 키스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
“아가씨? 왜 그러시죠?”
아리아는 지금까지 나름 사선을 넘어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오크와 와이번을 잡을 때도,
발록과 싸울 때도,
점토사와 싸울 때마저도,
“저랑 그렇게 산책하기가 싫으신가요?”
저렇게 생글생글한 미소를 짓는 레오가 가장 무서웠다. 따지고 보면 발록과 점토사를 쓰러뜨린 것도 레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
“...아...그게 그러니까...”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른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명해야할지 모른다.
“아리아스필 님? 왜 이렇게 떠세요? 누가 보면 제가 화내는 줄 알겠어요.”
화내는 게 아닌가? 그래, 사실 레오도 웃고 있으니까 잘 설명만 하면...
파악!
그 순간, 레오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순간적으로 주변에 모두가 몸을 움츠렸다.
“어이쿠, 근처에 모기가 있었네요.”
레오는 손을 피며 잔악하게 터진 살육의 현장을 몸소 보여주었다. 모기는 그대로 찌부러진 채 빨아먹은 피를 진액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손에 터질 상대가 누구인지 너무나 자명해, 아리아스필의 머리에도 상상이 선명히 갔다.
“그래서 어디까지...”
덜컥, 쿵
아리아는 도망쳤다. 사랑이고 뭐고 지금 죽으면 남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후일의 사랑을 위해 지금의 생존을 온존하려고 했다.
“...왜 간단한 대답을 굳이 어렵게 하러 가실까? 참 귀엽단 말이지.”
분명 칭찬인데, 레오에게 분명 호의가 있던 아메리와 순애를 즐기는 리오스마저 소름이 돋았다.
“...저기... 아우...?”
“예. 리오스 님.”
레오는 얇은 실눈과 미소로 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자주 보이지 않는 레오의 표정에 리오스는 지나친 괴리감을 느꼈다.
“혹시... 그... 한 사람이 누군지 알면... 어떻게 할 거야...?”
“...설마...죽...죽일 건...”
아메리도 조심스럽게 묻자 레오는 가볍게 웃었다.
“죽이다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하아... 다행이...”
레오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누웠다. 음영 밑에는 살기가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아까운 짓을 왜 합니까?”
모두 뒷말은 못 들은 것으로 했다.
이때 현자는 동굴 속에서 잠시 쉬고 있느라 이야기에 전혀 따라가지 못해 곤욕을 치러야만 했고 말이다.
***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넌 사내 새끼가 뭐리 그리 쪼잔하냐? 그릇이 담배 재떨이만 해.]
오러가 담긴 눈으로 아리아를 이잡듯 찾아내고 있는 레오를 보며, 현자는 혀를 찼다.
<담배 재떨이가 그릇이긴 합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말하는 본새하고는,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을 하는 현자였다. 하긴 그런 장면을 듣기만 했으니 와닿지는 않을 테지.
<전 전속 기사로서 아가씨의 문란한 생활에 대해 문책할 권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가주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글라디오 라인하르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때때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지적해주고, 옳지 않다면 말려주게.
정말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이런 의도로 사용될 거라고는 가주조차 몰랐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전 제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근데 따지고 보면 너랑 있을 때가 제일 문란하지 않냐?]
현자 뿐만 아니라, 레오와 아리아의 관계를 본 모든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네? 왜요?>
정작 본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말이다. 둔감한 것도 이 정도면 눈치라는 개념이 상실한 수준이었다.
[...됐다. 하던 거나 마저 해라.]
“흠...없는 것 같네.”
숨을 죽인 채 아리아가 방의 천장에 몸을 밀착시킨 걸 모른 채, 레오는 방문을 닫았다.
“...하아...”
저려오던 팔과 다리에 힘을 풀며, 아리아는 다시 바닥으로 착지했다. 아직 그날부터 하루밖에 안 지났지만, 아리아에겐 한 달이나 쫒긴 기분이었다.
‘...그냥 말해버릴까?’
사실 거기서 자신만 키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레오 쪽에서도 대담하게 자신의 입술을 뺏었는데...
‘...으으으... 하지만...’
문제는 그 앞 장면에 있었다.
‘그런... 짐승 같은 짓을... 레오랑...’
꿈속에서 가짜 레오에게 덮쳐질 뻔한 것, 그리고 자신도 내심 거절하지 않은 것, 만약 키스 얘기를 꺼냈을 때 그것마저 기억하면 자신은 수치심에 그대로 평생 실신할 것이다.
‘...절대로 들키면...’
[아리아 숨어.]
아리아는 급히 탁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벌컥
“역시 없네.”
[이미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갑자기 아가씨 느낌이 나서요.>
[뭐냐 그거. 기분 더러운 직감일세.]
일종의 숨소리라고 해야할까, 냄새라고 할까, 그런 것이 종합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기분 나쁠 만도 한 육감이었다.
덜컥
레오는 잠시 둘러보더니 이내 다시 방문을 닫았다.
[...이번엔 진짜 갔어.]
<고마워... 살았어...>
탁자 밖으로 나온 아리아스필은 정령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태까지 추적과 색적의 달인 레오나르도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까닭은 전부 정령 덕분이었다.
마탑에 깔려있는 정령들이 미리 레오의 위치를 말해뒀기에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레오에게 안 들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럴 수는 없어...’
앞으로 평생 레오나르도를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돌아갈 때는 함께 가야 하는데 그때까진 어떻게든 화해해야 했다.
‘...정말...이 방법까지는 쓰고 싶진 않았는데...’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우릴 부른 거라고?”
리오스는 현자 연구부실에 앉은 채, 아리아를 약간 식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응...”
커피를 잠시 들이켜던 리오스는 옆자리의 아메리의 귀에 대고 아리아에게도 들리게 말했다.
“잘 봐 아메리. 저게 내로남불의 표본이란다. 순애 소설에서 아주 보기 싫은 유형이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리아도 짜증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화를 내었다. 오히려 리오스는 가늘게 뜬 실눈으로 얄밉게 물었다.
“그럼 만약에 레오나르도가 첫 키스 다른 사람한테 하고 너랑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봐. 화가 안 나겠어?”
“...그건... 아니지만...”
그 사이, 가만히 듣던 아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지. 리오스.”
커피를 가볍게 마시며 아메리도 그녀 나름의 지론을 펼쳤다.
“아리아스필 양도 따지고 보면 나이는 있다고. 고작 키스 정도에 그런 것도 쪼잔하지 않아?”
듣던 아리아는 기분이 묘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 묘하게 맞장구치기가 어려웠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아리아는 레오가 여자랑 손만 잡아도 칼부터 뽑던데? 잣대가 너무 편협한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아메리도 아리아 집착의 유경험자인지라 차마 거기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키스 가지고 처녀니, 뭐니 하는 것도 그렇다는 거지. 애초에 경험 있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어째서인지 상담을 받으러 왔는데, 자신의 인성을 평가받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린 아리아였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지.”
리오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이보다 진지하고 다방면으로 폭 넓게 바라보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리아와 아메리는 속으로 ‘평소에 좀 진지하지’라고 생각하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문제는 아리아 네가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도망친 거에 있다고.”
“그건 맞아. 아리아스필 양에게도 책임은 있어.”
아메리도 거기엔 이견이 없었다.
“생각해봐. 그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갑자기 빠져나가고, 설명도 없이 계속 도망치기만 했잖아. 화가 나고 말고를 떠나서 레오도 신경은 당연히 쓰이겠지.”
그건 아리아조차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일을 이렇게까지 키운 것은 아리아스필 본인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이런 추격전과 도주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레오도
화는 아니더라도 배신감은 상당할 걸. 네 전속 기사가 되고 나선 한시도 안 빠지고 네 곁을 지켰는데... 넌 레오도 몰래 외간
남자랑 키스를 한 거잖아. 레오 본인은 바로 안 것도 아니었고.”
사실 화도 많이 나기는 했을 테지만, 배신감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전속 기사로서 문책하겠다는 게 본목적은 아닐지언정 핑계는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차라리 잘 설명해봐. 솔직히 레오 성격에 너한테 손찌검을 할 것 같지는 않거든. 그때 그 병문안 온 여자한테 한 말 기억 안 나?”
확실히 그때 레오가 한 말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고서야 찾기 힘들었다.
“그래도...”
“뭐, 너랑 입맞춤한 남자는 죽을 각오로 도망쳐야겠지만. 아마 이민이라도 안 하면 진짜 죽을 걸.”
그 말에 아리아스필의 수치심은 인계점을 넘겼다.
“...그런 게 아니라고!!”
폭발한 감정의 물결, 이제는 숨기는 게 더 창피했다.
“...키스를... 한 건...!”
폭발한다. 그녀의 사랑이.
“레오가 처음이었단 말이야...!”
잠시 방 안은 조용해졌다. 아메리도, 리오스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수 분이 걸렸다.
“그러니까... 포션 먹였을 때는 아니었다며...?”
“...응... 그러니까...”
“...그럼 혹시... 그 전에...”
그녀는 더는 말할 수 없었는지, 아예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침묵을 부정으로 생각하는 바보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넌 왜 도망친 거니?”
“아니, 근데... 왜 레오나르도 군은 기억을...”
사랑 앞에서 모두 바보가 된다지만, 이 정도면 사랑이 학문적으로 인간의 지능을 저하시키는지에 관한 연구할 필요를 느낀 둘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몰래...는 아닌데... 어떻게 보면... 몰래인 게...”
‘그 일’을 배제하고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호로 키스는 오갔지만, 레오 본인의 기억이 삭제됐다는 걸 설명하는 건, 현자가 와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메리 씨, 저기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계신가요?”
레오였다. 레오나르도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기 어떻...)
딱
아리아가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어느샌가 눈 앞의 리오스와 아메리는 사라졌다. 리오스의 순간이동은 아리아의 반사신경을 아슬아슬하게 이겨먹었다,
리오스가 있는 테이블에는 펜으로 작은 글이 써져있었다.
[잘해봐~!]
“...장난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아리아, 그 소리는 당연하게도 밖에도 울렸다.
“아가씨!?”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레오가 아니었다.
숨을 타이밍 따윈 이미 놓친 지 오래였다.
“...그게...”
아리아는 그대로 방문 바깥으로 뛰어가려고 했다.
“미안...!!”
터억
“제발 그만 도망치세요.”
이내 그녀를 붙잡은 레오는 호소했다. 그러곤 아리아의 양옆을 팔로 막아 활로를 차단했다.
“계속 이러면 저도 진짜 화낼 겁니다.”
“...그게...”
레오의 얼굴이 가까이 있다. 억지로 진 미소가 아닌, 제법 화가 난 표정.
하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박력이 있었다. 계속 숨결은 느껴지고, 벽에 맞닿아있는 팔은 그녀의 진로를 방해했다.
마치 꿈에서 레오가 자신을 덮쳤던 것처럼.
“...정말 말할 수 없으면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그냥 믿을 테니까.”
“...어?”
“아가씨께서 숨기시는데도 이유는 있을 테니까요. 그냥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더는 안 캐물을 테니까요.”
아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그 사람이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남자면...?”
“...진심으로요?”
레오는 조금 그림자가 진 표정이었지만, 이내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택한 사람이라면... 저도 이루어지도록 협력하겠습니다. 집안이 반대하면 가주님을 설득할 거고, 가문 전체가 말린다 해도 설득해보겠습니다.”
저 진지한 각오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리아에게선 이젠 레오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레오나르도는 그저 서투를 뿐이었으니까.
“그 남자가 아가씨에게 적극적이지 않다면... 제가 아는 아가씨의 좋은 점을 한도 끝도 없이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레오는 여러 가지 감정이 혼돈으로 뒤섞인 표정이었다. 어느 쪽이 자신의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가씨를 위해드리고 싶었다.
자신은 그러기 위해 돌아온 거였으니까.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가 아가씨만 바라본다면요.”
그 대답에 어느샌가 아리아스필의 미소는 깊게 번졌다. 귀여운 소악마가 그녀의 입꼬리를 간지럽혔다.
“너야.”
“...너...그렇...아니,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레오의 팔힘이 완전히 풀렸다.
“당신이라고요. 레오나르도 기사님.”
아리아스필은 씩 웃으며 레오의 턱을 한손으로 잡았다.
“그럼 아까 말한 대로지?”
“...예? 아니, 그게 무슨...”
“왜? 거짓말이어도 믿겠다며?”
이젠 뻔뻔해지기까지 한 아리아는 어느샌가 레오가 친 결박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약속한 거지? 집안 전체를 설득하고, 나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하기로.”
“아니, 그런 내용이...!”
“히... 그럼 먼저 갈게! 덕분에 제대로 밥도 못 먹어서.”
그녀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채, 방 밖으로 나갔다. 정말 한점의 걱정 없는 상쾌한 미소였다.
[...내 생각에는...]
“안 궁금해요...”
현자의 말을 자르며 레오나르도는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방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아리아스필의 잔향이 남겨져 있었다.
그 말은 거짓이었을까, 진실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난 거짓말이길 바란 걸까... 아니면...’
조금은 진심이기를 바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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