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45화 (45/248)

EP.45 마탑-7

의식이 몽롱해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유일하게 또렷한 것은 몸의 감각.

아직 키스도, 책에 나온 것 하나 하지 않았는데, 온몸이 또렷하게 달아오른다.

눈앞에 저 남자를 만족시킬 만한 체온을 몸 스스로가 찾아내는 것 같았다.

이게 내 본성이구나.

나라는 건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여자였어.

본성, 기질, 생리, 충동, 본능

몸이, 모든 것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게 깊어지면... 정말...

“그럼... 이제 할...”

“하긴 뭘 해. 시발놈이.”

침을 흘리던 레오가 발차기와 함께 날아갔다.

“...어?”

몽롱했던 정신이 다시 또렷해진다. 아쉽긴 했지만, 그런 아쉬움이 잊혀질 만큼 눈앞의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레오...?”

“아가씨, 저런 놈 무시하고 얼른 나가죠.”

본인이 자기를 무시하고 나가라는 모순에 아리아스필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날아간 가짜 레오는 풀숲에서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걸어나왔다.

“...뭐냐? 너...? 생긴 것만큼 눈치가 없네...!”

“너야말로 뭐냐? 나랑 너무 안 닮아서 못 알아볼 뻔했다.”

같은 사람이 서로의 외모를 비하하는 기묘한 광경, 아리아스필은 황당한 당황스러움을 연속적으로 느껴야만 했다.

“누가... 아니... 왜 레오나르도가 두 명이야?!”

“두 명일 리가 없잖아요. 누가 봐도 저 새끼가...!”

“저쪽이 가짜야!!”

선수를 친 건 가짜 레오 쪽이었다.

“뭐 이 새끼야!?”

“잘 생각해봐. 아리아. 진짜라면 너랑 이어지는 걸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너 같은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궤변이라고 하기도 뭐한 개새끼 소리였다. 바보더라도 지랄하지 말라며 역정을 낼 말일 것이다.

봐라. 지금 아리아도...

“...그...그런가아...?”

아리아는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잔뜩 붉힌 얼굴, 갈곳을 잃은 눈동자, 꼬물거리는 손가락, 둔감한 레오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신차려요!! 함정이라고요!!”

“너야말로 함정이겠지. 어떤 녀석인진 모르겠지만, 날 상대로 폴리모프하다니... 간땡이가 어지간히 부었나봐?”

폴리모프고 자시고 여기가 꿈인 걸 최대한 숨기는 저 녀석이 누가봐도 가짜였다.

‘...그냥 죽여버릴까...’

레오는 검은 돌을 잡았다. 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아니. 그건 내가 불리해.’

이곳은 아리아스필의 꿈, 그렇기에 주인인 아리아의 생각이 절대적인 규칙이 된다.

저 레오나르도가 극단적으로 강해진 것도 아리아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엇다.

“허, 어이가 없네. 네가 진짜 아리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이곳의 법도에 맞는 방식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네가 진짜 나고, 진짜 아리아를 좋아했다면 이런 길바닥에서 그런 짓을 했겠어?”

얼굴의 근육을 최대한 경직시키지만, 화끈거리는 감정과 혈기마저 누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수치를 겪지 않는 이상, 아리아를 구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아리아스필은 귀족, 그것도 용사 가문의 영애야. 그런 아가씨한테 흙바닥, 그것도 풀숲에서 서로 몸을 섞는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참는다. 참아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여기서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난다.

“으으...! 그건... 분명 그렇지만...!”

여기 아리아가 동조하는 건, 분명 다행이었지만... 다른 의미로 참기가 고통스러웠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 가짜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마치 그 이상의 발언이 있는 것처럼.

“오히려 난 아리아가 그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뭔 말같지도 않은...!”

“그럼 왜 풀숲에 눕혔을 때, 반항을 안 했을까?”

아리아는 전신이 달아올랐는지, 허벅지와 허벅지를 배배꼬며 수치심을 참아내었다.

“야, 니가 짓눌러놓고 그게 무슨...!”

“그래? 오러로 치면 아리아는 내 이상이잖아.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코어가 부서진 것 아닐텐데... 왜 날 안 밀쳐냈을까?”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하지만... 그건 본인한테 물어보면 바로...!

“...그건... 그건 말이지이...! 난... 그런... 걸 원해서는... 아니고오... 레오가 누르니까아... 나도 모르게에... 그만...”

온몸은 땀투성이, 이젠 허벅지 뿐만 아니라 유연하게 전신으로 꼬여가며 대답을 느리게나마 뱉어내고 있었다.

“나한테 짐승처럼 당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사실 침대든 풀숲이든 함께하는 게 좋으니까. 나라면 아리아도 같이 짐승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데.”

“그게...! 그니까...!”

“하기 싫은가봐? 그럼 나야 강요하기는 싫으니...”

“아니이...!! 그런 게에...!! 아니고오...!! 조금은... 상냥하게...!!”

...이젠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째 불쾌하게도 저 가짜가 진짜보다 아리아의 심리를 더 잘 아는 눈치였다. 애초에 가짜는 아리아의 지식과 상상을 토대로 만든 것이니 이런 전략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리아, 내가 물어볼게.”

기세가 등등해진 것인지 가짜는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

“저런 놈이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그 말에 아리아는 극심한 갈등에 빠졌다. 솔직히 둘 다 좋은데...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같이 즐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참고로 난 널 살살 녹게 할 수 있는데... 어때?”

하지만 이젠 저 짐승 같은 레오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 저런 남자를 참는 것은 벅찼다.

“...하... 진짜...”

다른 레오는 머리를 감싸쥐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억 못할테니까... 그래.”

그러더니 양손을 내려놓으며 레오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살살 녹게 한다고? 아리아를?”

“그래! 너 같은 놈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나도 니 면상을 살살 녹이고 싶거든. 물리적으로. 근데 그전에 하나만 묻자.”

레오나르도는 질문 하기 전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온갖 번뇌와 고민, 고뇌와 고통이 녹아 담겨 있었다.

“첫 경험은 어떻게 했냐? 그거 해보고는 말하는 거겠지?”

“첫...경험...?”

1, 2, 3, 4, 5... 점차 시간이 지나며 10초가 넘어가고, 15초가 넘어가도 저 레오는 말을 더듬기만 할 뿐 명확한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리아가 모르는 것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내 첫 경험은...!”

대략 30초가 걸리고 저 가짜는 거짓말을 만들어낸 건지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진짜는 선수를 채 간 지 오래였다.

“없어.”

“...어...뭐?”

“난 한 적이 아예 없다고. 첫 경험도 없고, 여자랑 사귀어본 적도 없어.”

굴욕감이 온몸에 치밀지만, 레오는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리아나 저 가짜가 자신이 나잇살을 먹을대로 먹은 회귀자라는 걸 모르는 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그게... 무슨...? 너 동정이야?!”

“네가 나라면 바로 알겠지. 그게 네가 이 꿈 속 가짜라는 증거고.”

“그런...”

가짜 레오나르도의 몸은 점차 녹아내렸다.

“잠깐 이거 왜 이래...?!”

“잘 가라. 덕분에 살살 녹겠네.”

아리아의 마음은 이미 경험이 없는 레오에게로 기울었고,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끝으로 가짜는 녹아내리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레오...나르도...! 그게 말이야... 내가...”

아라아는 레오가 경험이 없다는 것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웃을 수는 없었다.

“...”

레오나르도는 유례없이 굳어있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내가 이런 꿈을 꾸고 싶어서가 아니라아...! 그보다...! 비밀은 꼭 지킬 테니까... 기분 풀어주면...!”

“...아가씨.”

딱딱한 정색으로 레오는 말했다. 한기가 서린 찬 목소리였다.

“...우선 탈출구에 가고서 말하죠. 여기에 오래 있으면 위험하니까요.”

“아... 그래...”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에게 처음으로 배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기술, 경험, 지식, 그리고 감정까지도.

그리고 지금 아리아스필이 처음 느낀 건.

‘...무서워...’

공포였다.

정적으로 자아내는 공포는, 비명이나 단말마가 짜내는 공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공포는 끝없이 부풀어오를 수 있었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울리며 레오나르도는 숲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잔디는 점점 바닥에서 사리지고, 나무는 점차 줄어들어갔다. 단순히 배경이 바뀐 것이 아닌, 세상의 채색과 밑그림이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주변은 흰 여백만이 남았다.

“...여긴...”

“저기가 탈출구입니다.”

문앞에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대문, 대문에는 투박하게 ‘시험 끝났으니 나와’라고 크게 적혀있었다.

“...그...그럼 나갈까...?”

밖에 나가는 것도 불안했지만, 이곳에 있는 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아리아스필.”

하지만 레오는 그 전에 입을 열었다.

“...솔직히... 멍청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무표정했다. 표정 뿐만 아니라, 어투나 기류 모든에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촌장인 아누스가 말했던 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아리아는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눈치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지도 몰라요. 단지 제가 보고 인정하기 두려워서 외면했겠죠.”

이어지는 자조적인 발언, 무심함에 슬픔이 깃든다.

“......”

“...이제야 다 이해되네요. 여태까지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왜 그렇게 곁에 있었는지도요.”

레오나르도는 이제 무심하지 않았다. 단지 깊고 찬 슬픔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아가씨, 아무리 정신에 내성이 있다한들 전 이곳의 일을 절대 기억할 수 없을 겁니다. 심하면 아리아 아가씨도 마찬가지겠죠. 그걸 전제로 이곳에 진입한 거거든요.”

이 개조된 텔레파시 마법의 부작용은, 기억 손실 및 정신 이상. 극도로 위험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레오조차 이곳의 일을 기억 못 하도록 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어떤 대답을 하셔도 전 괜찮아요.”

레오는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엔 기쁨은 없었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슬픔 뿐이었다.

“...혹시 절 좋아하시나요?”

“그...그건...”

아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저 레오나르도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 반응이 두려웠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역시... 이번에도 같군요.”

레오나르도는 문을 잡았다.

“미안해요.너무 부담스러운 질문이었...”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 말에 레오는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결국 아무도 몰랐다.

“레오나르도, 널 사랑해.”

그렇기에 소녀는 용기를 낸다.

“...그러면 상처받을 거예요.”

소년의 경고였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어. 그건 사랑하는 내가 감내할 문제야.”

소녀의 사랑이었다.

“전 그런 사랑을 받을 정도로... 가치있는 사람이...”

청년의 자조였다.

“상관없어. 가치 같은 걸 보고 사랑한 게 아니야.”

이건 그녀의 사랑이다.

“저에 대해, 제 과거와 죄에 대해 아시면 마음은 바뀌시겠죠. 전 생각보다 추악한 인간입니다.”

중년의 후회였다.

“너의 과거, 죄... 네 말대로 난 그거에 대해 몰라. 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네가 추악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의 목표이듯, 너도 내 목표가 되어버렸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해있었고, 어떤 이유를 붙여도 너에 대한 마음은 다 사랑으로 통할 거야.”

이게 그녀의 방법.

“...처음이라, 만약 이게 처음이...”

노년의 회한이었다.

“처음이 아니더라도 좋아. 난 널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 거야. 너도 나만큼 날 사랑하고 집착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든, 아무도 사랑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아. 그 이상으로 내가 너에게 사랑스럽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테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뭔가요? 저한테는...”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그의 모든 것을 틀어막기에 충분했으니까.

“말로 부족하면 지금부턴 행동으로 메꿀 거야.”

입술을 떼며 아리아는 말했다.

“...”

입술을 뺏긴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이건 내 마음을 멋대로 생각한 벌이야. 레오.”

그녀의 사랑은 경고나 자조보다 견고했고, 후회나 회한을 녹일 만큼 따뜻했다.

“이제 나가자. 다음에는 더한 걸 가져갈 테니까.”

“아가씨. 고마워요.”

레오나르도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꼭 기다릴게요.”

그리고 소녀의 몸을 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어......어어?!”

“이건 조금만 더 일찍 말하지 않은 벌이에요.”

그러곤 레오나르도는 문을 열었다.

정말 꿈 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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