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열차에서-1
기묘한 꿈을 꿨다.
엄마가 돌아온 꿈, 회귀한 뒤로는 거의 꿔본 적이 없었던 그립게 쓰라린 꿈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따뜻하게 몸을 안아주었다.
무척이나 기뻤는데, 영문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근데 엄마의 몸이 묘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딱딱하고, 어째 마룻바닥 같은 냄새가...
“...으으...”
그렇게 길몽인지 악몽인지 모를 꿈에 시달리자, 레오는 자연히 눈을 뜨게 되었다.
일어난 자리는 차디찬 침대 옆에 마룻바닥, 아무래도 간호하던 도중에 잠든 것 같았다.
“...나도 많이 물렁해졌구만.”
[말랑한 몸을 계속 부비부비하니까 그렇겠지.]
아침 알람 대용으로 현자의 상쾌한 지랄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는 짜증을 냈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화가 나진 않았다.
아마도 숙면 덕분에 피로가 풀려서 그런 것일 거다.
<...혹시 제 꿈을 봤어요?>
[뭔 꿈을 꾸든 좋은 꿈이었겠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안 좋은 꿈을 꾸면 넌 아주 그냥...]
뭔가 묘하게 대화의 방향이 맞물리지 않았지만, 의미는 대강 맞았기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엄마를 봤거든요. 아마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자서 그런가봐요.>
[...하... 그래. 좋은 꿈이었겠네.]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체념한 듯 순응하는 목소리, 그런 기행이 이젠 너무 익숙했는지 레오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아리아 아가씨는...”
아리아스필은 침대보와 이불을 완전히 뒤틀어놓은 채, 이 집과 어울리는 시골 처녀처럼 자유분방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 저 잠꼬대에 말려들었다면 레오도 어딘가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어지간히 피곤하셨나보네.”
배 부근이나 가슴 부위 쪽도 옷도 조금 벗겨져 있었다. 어지간히 난폭히 자지 않는 이상 저렇게 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면 감기 걸려요.”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시선을 뗀 체, 그녀에게 이불을 제대로 고쳐 덮어주었다.
[무슨 신혼집 남편 같구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대답하지 마. 각막하고 고막에까지 염증이 생길 지경이야.]
저 양반은 아침부터 신경질이었다. 그것보다 마을 사람들도 그렇고, 왜 생각이 다 그런 쪽으로밖에 안 돌아가는지 의문이었다.
“...아직 여유는 있네.”
시계를 보니 서너 시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 여유 있게 기차에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레오나르도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 걸려있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 주방용 앞치마에는 실력 발휘를 할 의지가 완연히 드러났다.
***
아리아의 눈꺼풀이 떨렸다. 여러 소리가 복합적으로 울리자 잠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불이 켜지는 소리, 기름이 튀고 계란이 익는 소리, 물이 끓은 소리.
그 이외에도 부드러운 콧노래가 그 소리를 엮어 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잠기운이 덜 가신 목소리에도 자신의 충직한 기사는 빠르게 반응했다.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일어난 그녀 앞엔 사랑이 있었다.
순수한 애정의 근원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향긋한 조찬의 향을 풍기는 사랑스러운 남자.
“...어... 침 흐르는데 괜찮으세요...?”
지금 입가에 침이 흐르는 건 허기가 져서일 거다.
절대 ‘앞치마를 두른 레오’의 모습에 욕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치마를 두른 레오’는 귀엽고, 애교스러우며, 사랑스러웠다. 그것마저 부정하는 건 불가능한 진리였다.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 우선 식사라도 하시죠.”
레오의 둔감함에 안심하며 아리아는 욕망의 침을 슬며시 닦았다.
“드셔보세요. 간단한 것밖에는 없지만, 영양보충에는 좋아요.”
아리아는 이번에는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식탁 위에 펼쳐진 식사들은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전문식 같았으니까.
“...다... 다 직접 만든 거야?”
“네, 아무래도 아침이니 도움을 받긴 그렇잖아요.”
아리아는 지금까지 어떤 진미도 먹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재력과 지위로는 세계 각국의 요리사들을 부르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금 깨달았다.
그건 우물 안의 개구리의 천려(淺慮)라는 걸.
“...안 드셔도 되겠어요? 다 식겠어요.”
저 사랑스러운 존재가 담은 정성만큼은 어떤 요리사도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잘 먹을게...!”
아리아는 입 안에 음식을 넣으며 생각했다. 이건 음식이 아닌, 사랑이라고.
‘...그리고 이건 조금...’
아침에 자신을 깨워주고,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를 함께하니...
‘신혼 부부 같아...!’
갓 결혼한 신혼의 부부, 같은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맛은 어떤가요?”
“맛있어! 매일매일 같이 먹었으면 좋을 정도로...!!”
그때 아리아는 당황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이건 어제 멋대로 ‘결혼 망상’을 되새기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조금은 우쭐하게 되는데요?”
레오나르도의 유쾌한 반응에 아리아는 걱정을 줄였지만, 당황스러운 감정은 여전했다.
“...그게... 어제...”
간신히 음식을 목으로 넘기며, 그녀는 사과를 입에 담았다.
“멋대로 그런 얘기를 해서 미안해... 너한테는 곤란한 얘기일텐데...”
“아뇨. 전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응? 히끕...!”
너무 예상 밖의 대답이었기에 아리아는 높은 딸꾹질 소리를 내었다.
설마 레오나르도도 자신과 같은 계획을 조금은 품은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이 머리를 스쳤다.
“제가 촌장님 앞에서 체면 세워주시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고마워요.”
이때 아리아는 몰랐지만, 현자는 온갖 쌍욕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건, 아마 순수한 그녀에겐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었으리라.
“...아...어... 그래...”
하지만 레오의 반응은 틀림없는 저주였으리라. 그녀에게도, 레오 자신에게도 말이다.
***
“벌써 가는 거야?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좀 더 있다 가지?”
딘은 송곳니로 미소를 지으며 슬쩍 제안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원래 나온 목적은 마탑의 허가서니까. 오래 있긴 힘들 것 같아. 변수가 많은지라.”
“그럼 잘 갔다와. 그런 허가서는 바로 따오라고.”
레오는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아누스 촌장이 걸어왔다.
“갈 거냐?”
“예, 오래 못 있어 죄송합니다.”
“오래 있어 봐야 밥이나 축내기만 하지. 얼른 가기나 해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누스는 아리아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분명 너도 마탑에 간다고 했지?”
“네? 예, 저는 마법 때문에 가는 건 아니지만...”
내민 손에는 작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봉투만 조금 좋았다면 편지라고 말해도 손색없었다.
“이걸 피시스 나트라라는 사람에게 건내라. 나한테 받은 것도 있으니 분명 잘해줄 게다.”
“...아, 감사합니다.”
아리아는 그 배려와 어젯밤의 일을 연속적으로 떠올리며 감사를 표현했다.
“그럼 썩 나가. 번개맞은 무릎 시큰거리니까.”
“예예, 분부대로 합죠.”
독설에도 나름 미운 정이 든 탓일까, 레오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목례를 했다. 아리아도 최대한 정중히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레오를 따라 걸었다.
“레오나르도!”
그 순간 아누스는 기차의 화통만큼이나 큰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그 아가씨를 울리면 다시는 마을에 찾아오지 마라! 그런 시원치 않은 녀석은 키운 기억이 없다!!”
레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은 채, 대답했다.
“네! 누가 키운 손자인데요! 할머니!”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가버렸다.
[얼굴 빨개진 거봐. 어지간히 기쁜가봐?]
“입 다물어라.”
[하긴 그러니까 일부러 번개를 맞은 거겠지. 원래 계획은 그걸 동정표로 할머니라고 듣는 거였잖아.]
저 대화를 듣지 못한 건, 다행이면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
다시 돌아온 기차역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파도가 몰아쳤다. 일등석 티켓을 사지 않았더라면 분명 저 인간 해일에 휩쓸려 오랫동안 표류했을 것이다.
“401호... 여기네요.”
레오 일행이 탑승할 객실은 401호, 문 너머에는 두 사람분의 이어진 의자가 서로 마주한 채 설치되어있었다.
[근데 너흰 아예 객실을 대여한 거야? 저번에는 아예 너희 둘만 객실에 있었잖아.]
저번 상황에서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비싸요. 원래는 모르는 승객도 같이 타는 편이죠. 저번에는 그냥 그 자리가 안 팔렸거나, 승객이 안 온 거죠.>
현자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의 옆 창가에 떠다녔다. 레오와 아리아는 서로의 옆자리에 앉은 채 기차의 출발을 기다렸다.
“여긴가?”
기다리는 동안, 다른 승객도 401호에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화사한 미소를 지닌, 또래의 소녀처럼 보였다. 자신의 체구보다 살짝 작은 큰 캐리어를 든 게 제법 인상적이었다.
레오 일행도 그녀에게 목례하며 그녀가 자리가 앉을 수 있도록 다리를 오므렸다.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키로 어떻게든 캐리어를 객실 선반에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애처롭게도 그녀의 체구는 선반의 높이에 비해 낮기 그지없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보다 못한 레오가 그녀의 짐을 올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행동에 소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레오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이내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천만에요. 숙녀분.”
숙녀라는 호칭에 소녀의 미소는 더욱 발그스레해졌고, 아리아는 조금 붉그레해졌다.
같은 현상처럼 보였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 교차하고 마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분은 어디로 여행가시나요?”
“여행이라 할 건 없지만, 마탑으로 갈 겁니다.”
그 말에 소녀는 약간 과장을 보태며 그 대답에 호응했다.
“연인 분들끼리는 마탑이 여행지로 인기가 많더라고요! 주변에 마도구나 마법 음식점이 많아서 인기가 좋아요!”
연인이라는 말에 아리아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가 싶었다. 그렇게 오해해주면 아리아의 감정은 응어리질 것도 없었다.
“하하, 연인은 아닙니다. 친한 친구죠.”
하지만 그 풀리는 표정을 레오는 굳이 다시 꼬여놓았다. 아리아의 표정은 붉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시군요. 친구끼리의 여행도 좋죠.”
소녀는 입을 가린 채 쿡쿡거리며 웃었다. 저 웃음에 아리아는 자연히 주먹을 쥐게 되었다. 아마 비웃음이라는 확정만 된다면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꽂아넣을 것이다.
“숙녀분은 무슨 일로 기차에 타셨는지요?”
레오도 거슬리긴 매한가지였다. 저런 꼬맹이가 어딜 봐서 숙녀라는 것인가, 정신으로 보나 몸으로 보나 자신이 더 숙녀에 가까운데.
“아, 저는 친구들이 불러서 탔어요. 오랜만에 만나자고 해서요.”
“그런가요? 친구들을 위해 그렇게 해주시다니 정말 상냥하시군.”
저런 게 뭐가 상냥한단 말인가.
고작 해봐야 유흥이나 즐기는 걸 텐데, 방탕하거나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호호, 고마워요.”
그 웃음을 보던 도중, 레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다가갔다.
“레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가까이 옮겼다.
“저기 갑자기 왜...”
레오는 그녀 머리에 묻은 작은 꽃잎을 떼어내었다.
“머리에 묻어 있었습니다. 이거 죄송하군요.”
“아...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좋은 꽃잎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제는 참는 것에 부아를 느꼈다.
저 불여우 같은 여자에겐 분노가, 믿었던 기사에게는 배신이 여실히 가슴을 찔러왔다.
주먹을 쥔 손은 점차 단단해졌다. 오러를 넣지만 않았을 뿐, 치기만 한다면 분명 이빨 한 두 개 정도는 나갈 것이다.
“숙녀분, 실례가 안 된다면 볼을 내밀어줄 수 있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만 확인할 게 있어서요.”
“아, 또 뭔가 묻었나요?”
소녀는 별 의심없이 볼을 내밀었다.
이제는 분노와 배신이 인계점에 도달했다. 아리아의 주먹은...
우드득
일순 주먹은 뻗어졌다. 소리로 봐선 코 또는 광대뼈의 골절, 심하면 턱과 이빨도 골절됐을 것이다.
"아뇨."
하지만 주먹을 날린 건 아리아가 아니었다.
“그래야 때리기가 편하거든요.”
레오의 주먹은 확실히 숙녀의 안면에 격돌했다.
아니, 숙녀라는 표현이 이제는 적절치 않게 되었다.
그녀의 피부는 점토처럼 녹아내리며, 수염이 듬성듬성 나있는 작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젠장, 그래도 아니길 바랬는데.”
열차 강도를 바라보며 레오나르도는 낮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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