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3주간의 휴가-5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누가 들어도 기가 뒤집힐만한 헛소리.
헛웃음을 내다가 호흡곤란이 올만한 거짓부렁이었다.
하지만 저 당돌한 박력 앞에서는 목소리 하나 낼 수 없었다.
“결혼...? 진심...인가?”
아누스 촌장도 저런 대답은 예상 못 했는지, 말을 잠시 떨었다.
“...그...게...”
말을 떠는 건 촌장만이 아니었다. 큰소리를 친 아리아도 말을 떨며, 얼굴이 달궈지는 양철처럼 새빨갛게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아니, 더 묻는 건 의미가 없겠지. 입만 산 놈들은 이 나이 먹도록 지겹게 봤으니까.”
아누스는 굽은 등을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기는 했지만, 그 거침없는 기립은 위압을 주기엔 충분했다.
“따라 나와라. 제대로 된 ‘대화’는 이런데서 하는 게 아니지.”
아누스의 발걸음이 앞서자,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이가 털릴 대로 털린 레오도 무의식의 힘을 빌려 밖으로 나갔다.
***
향한 곳은 녹림이 우거진 숲속의 중심부였다. 마을에서 떨어지자 주변에는 사람의 흔적이라 할만한 인공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숲의 빈터에 선 아누스는 뒤따라온 아리아 일행을 보며 말했다.
“여기가 좋겠군.”
“...뭘 할 생각입니까?”
불려온 아리아보다 옆에 있는 레오가 경계가 서려 있었다. 팔찌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은 그 날선 기세를 어림으로나마 짐작시켜주고 있었다.
“여자끼리의 대화니, 놈팡이는 끼어들지 마.”
그렇게 쏘아붙이며 아누스는 자신의 지팡이를 직각으로 들어 아리아를 가리켰다.
“너, 이리로 와 서라.”
“...네?”
“젊은 년이 귀가 먹었나? 늙은이가 두 번이나 말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단호한 독설에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누스의 앞에 섰다. 자신의 앞에 아리아가 서자 아누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난 말로 주절거리는 걸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 ‘대화’를 하겠다고 주장하니 이질적인 모순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가장 직관적인 수단으로 ‘대화’하는 걸 즐기지.”
그 순간, 아누스의 지팡이 중심으로 바닥에서 바위들이 원형으로 솟아나왔다. 순식간에 원형의 진이 완성되었다.
“마법...?!”
레오나르도와 유사한 형태의 마법, 그 광경을 보자 아리아는 바로 검을 발도했다.
“할멈! 뭐하는 짓이야!?”
레오도 검을 든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심히 격앙된 목소리로 그는 검을 겨누었다.
“남자는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낙뢰가 내리쳤다. 레오나르도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전기의 결계가 쳐졌다. 방음 효과까지 있는 건지 레오는 전격 너머 큰소리로 외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또 마법...!”
아리아가 놀란 건, 단순히 마법을 써서가 아니었다. 레오와 동일한 효과를 내면서도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졌기에 더욱 경계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할 수 있겠군.”
“...이게 대화인가요?”
원형으로 둘러진 바위와 번개의 벽, 조용한 담화를 원하다는 핑계로는 납득할 수 없는 기행이었다.
“네가 나를 상대로 날붙이를 든다면, 대화는 아니겠지. 다 늙은 노파를 상대로 꽤나 날이 서있군?”
“...마법을 쓰셨잖아요.”
아누스는 그런 기색이 맹랑하기라도 했는지, 비웃듯 헛웃음을 내었다.
“그래, 확실히 그건 맞는 지적이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누스는 다른 나무 막대기를 들어 아리아에게 집어던졌다. 아리아는 한손에 검을 쥔채로 그 막대를 잡아들었다.
“...이건 왜...”
“검 대신 그 막대로 싸운다면, 한 대라도 맞추는 순간 내가 한 말은 취소하고 사과하도록 하지. 결혼을 하든, 애를 낳든 상관하지 않으마.”
그 말에 아리아의 얼굴은 가을밭의 과일처럼 진하게 익어갔다. 새삼 자신이 뱉은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부끄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대신 레오 그 멍청이가 여기로 들어올 때까지 한 대도 못 맞춘다면, 연인이고 뭐고는 다 접어라. 가망도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아누스는 지팡이를 촉매 삼아 마나를 전개했다. 얼굴을 붉히던 아리아도 대답으로 검을 던지고 나무 막대를 양손으로 쥐었다.
‘마법의 대응은 레오 덕분에 어떻게 할지 알고 있어. 하지만...’
아누스의 마법은 레오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단순히 위력이나 속도의 차이가 아니었다.
‘...물 마법?!’
결정적인 마법의 본질은 확실히 달랐다. 마법진 없이도 수분의 칼날이 날아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고작 나무 막대기로 반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아리아는 좌우로 구르며 액체의 검격을 피했다.
“구르는 재주는 있군.”
지금은 조롱에 아랑곳할 시간은 없었다. 단전에 힘을 주며 이내 체내의 마나 코어를 활성화시켰다.
“호, 천재라는 게 과장은 아니었군. 그 나이에 3성이라니.
세 개의 별들이 빠르게 발광하며 그녀의 몸에 마나를 순환하기 시작했다. 2년간의 세월과 노력을 통해 아리아는 이미 코어를 3성까지 끌어왔다.
”하지만 소질에 비해 다듬어지진 않았어.“
이번에는 벼락이 난무했다. 전격을 머금은 섬광이 소나기처럼 아리아에게 떨어졌다.
‘...레오랑은 확실히 달라.’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사용되는 마법들의 위화감을.
“어떻게... 마법진도 없이...!”
지금까지 아누스는 영창도, 수인도 없이 하물며 마법진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말이다.
“예쁘장한 눈이 장식은 아니었군. 하지만 그걸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
콰지지직!!
폭음과 함께 번개의 장벽에 실금이 갔다.
“아무래도 대답해줄 시간도 없겠군.”
연속적으로 폭음이 울려퍼졌다. 갈라진 결계의 균열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그 폭음 사이마다 아누스는 연격으로 마법을 날렸다.
‘...냉정히 생각해야돼.’
그 혼돈의 격전지에서 아리아는 침착히 공격을 회피하며 생각했다.
분명 레오는 마법을 쓸 때 항상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건 자신의 오빠인 리오스도 마찬가지였으니, 대부분의 마법에는 마법진이 필요할 것이다.
보조 기술인 영창이나 수인은 생략 가능해도, 뼈대인 마법진은 빼낼 수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생각할만한 건 하나밖에 없어.’
아리아스필은 마나 코어의 마력을 눈에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시력의 격상으로 시야의 피로가 증가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나무 막대로는 오러를 최대로 집중시켜 공격하는 전략도 불가능했으니.
그녀는 반격 대신, 탐색과 공략에 집중했다.
[...요리조리 잘 피하는데~? 히히~]
[이쯤에서 봐주지 그래? 예쁜 애를 괴롭히는 건 가슴이 아프단 말이지.]
마나로 강화된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던 두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형상과 장소가 기묘했고,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하기엔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는 존재.
[저 애, 우리가 보이는 것 같아~!]
[진짜로? 이거 이직하기 좋은 기회인데.]
“조금은 조용히 해라.”
아누스의 말에도 마나의 말괄량이들은 아리아를 바라보며 꺄르륵거리기 바빴다.
“...저건...”
“봐버렸으면 하는 수 없지.”
아누스는 마나를 완전히 전개하며 주변에 있는 정령들을 실체화시켰다. 옆에 있는 두 정령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소정령들마저 전부 시야에 드러났다.
“...이건...”
“정령, 정확히는 도론에 정착한 정령들이지.”
정령, 마법에 문외한인 아리아도 들어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마나에서 태어난 생명이자 지성, 마나에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고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요정, 그게 정령이었다.
“난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다. 마나만 놓고 보면 너는커녕 지금 결계를 부수는 꼬맹이보다도 못하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누스에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용되는 마법의 위력에 비해, 아누스의 마력은 조촐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정령의 힘을 빌린다면, 철부지 아가씨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아. 그것도 내 고향의 숲이라면 더욱.”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의 아귀는 맞게 된다. 아누스가 마법진을 그리지 않은 것도, 강력한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 것 또한 설명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숲에서...’
아누스는 정령사로서도 중위권에 위치할 뿐, 정점이나 상위권에 위치한다고 할 순 없었다.
다만, 싸우는 곳이 자신이 태어나고 몇십 년 동안 함께 지내왔던 고향이라면.
그 지역의 정령들은 미운 정과 고운 정이 깊이 쌓인 아누스를 전력으로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디 정령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내 설명을 천천히 듣는 거로 봐선, 어지간히 포기하고 싶은가 보군.”
콰아아아앙!
맹렬한 파괴음, 그 소리를 방아쇠로 벼락의 방어막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아리아 아가씨!!”
“그래, 애써 날뛰는 것보다야 그렇게 좋아하는 연인한테 보호만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어지는 도발, 생각 외로 아리아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건 이 전투로 아니라는 걸로 증명하면 그만이었다.
“이니스, 님부스 이제 끝내지.”
[나참, 좀 봐주지. 박정하다니까.]
[그냥솔직하지 못한 거라니까. 저번에도 기우제 때...]
그러면서 사람 형상을 한 두 정령은 키득거렸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아누스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때론 노인의 감은 위기나 공포를 색적하는데 유리하고 유용했다.
노파의 경험은 말하고 있었다.
“...님부스...이니스...”
지금 저 소녀는 어떤 존재보다도 위험하다고.
-저기 님부스하고 이니스는 어떤 여성분이셔?
-글쎄... 걔들이 생긴 건 예뻐도...
저 두 정령이 레오나르도에게 감히예쁘다 칭찬받은 녀석들이었다.
겨우 운이 좋게도 자신보다 레오를 먼저 만나,
분명 자신보다 그런 칭찬을 먼저 들었을 방자한 것들.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뜨겁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뭐야... 저 애 갑자기 기백이 살기로...?!]
[아누스!! 빨리 막...!]
우지끈
아리아는 한 손의 악력만으로 나무 막대기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동시에
쐐액!
그 막대기 절반을 아누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
반응했을 때는 이미 안면에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급히 방어했지만, 차게 분노한 아리아에겐 그런 여유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연속으로 들리는 화살 소리.
화살 대신에 베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마치 호우처럼 쏟아졌다.
“방어막!!”
[전격 결계를 쓴 마나가 충전이 안 됐어!!]
“젠장...!”
저런 공격을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거다. 고작 해봐야 아픈 정도일 테지.
문제는...
‘저 중에 남은 막대가 섞여있을 텐데...!’
내기에서 승리하는 조건은 막대기를 맞추는 것, 저 소나기와 같은 가지들에 있는 막대가 스치기라도 한다면...
“...레오가 못된 것만 가르쳤군. 하지만...!”
주변에 있는 정령을 전부 동원해 전방위를 일일이 방어한다면, 숨겨진 막대를 막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주변에 바위, 풍압, 전격, 물보라가 일며 막대를 튕겨내었다. 결계에 비하면 연약한 방어였지만 나뭇가지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잠깐... 그 여자앤...]
투척물에만 집중한 나머지, 아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다른 정령들도 방어 때문에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어디에...?]
그 순간 모두는 상공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
아리아는 공중으로 뛰어들어 아누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급히 방어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저 일격은 단순히 잔재주로 던진 견제 공격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방어들이 전부 뚫리고 전장을 가로지른 역전의 투희가 공격을 날렸고.
공격은 이미 적중했다.
충직한 그녀의 기사는 그 아름다운 장관을 막바지에 가서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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