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3주간의 휴가-2
현자
어질고 총명하며 성인에 다음가는 인물.
모든 마법의 시초, 현대 마법 서클식의 창시자.
이 대표적인 업적을 제외해도 인간이 세울 수 없는 위업을 태연히 세워온 현인.
이건 그런 그가 현자(賢者)에서 은자(隱者)가 된 이유는,
[세상도 정도껏 더러워야지, 기분 더러워서 때려쳤다.]
세상의 비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법하네요.>
마찬가지로 염세의 시선을 가진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납득하냐? 뭐 더 안 물어봐?]
<세상이 썩은 건 사실이니까요.>
고작 10살에 가족의 품 없이 혼자 살아온 레오였다. 그것도 약육강식을 맨살로 느끼는 용병으로서 살아왔으니 속세에 대해 그리 낙관적인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뭐...기왕 얘기 꺼내는데 더 물어봐라. 오랜만에 썰이라도 풀게.]
<...그럼 여태껏 봤던 것 중 인상깊게 더러웠던 건 뭡니까?>
[그건 말이지...]
오랜만에 옛얘기를 꺼낼 수 있는 게, 현자는 혀에 기름칠을 한 채, 빠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름다운 모험과 환상이 아닌, 무거운 분위기와 잔인한 전개가 담겨 있는 비극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레오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뭐... 그런 것도 있었지. 기껏 광산 개발용 폭발 마법을 개발해줬더니, 그걸 테러니, 반역이니 그딴 거에 쓰질 않나. 그 땐 참 말세였지.]
<지금도 개판이긴 해요. 이젠 아예 골렘에다가 마법 폭탄을 집어넣어서 원격으로 폭사시키기도 하죠.>
[하... 개자식들, 마탑 놈들은 뭘 하는 거야? 고작 1서클 쓸 때는 게거품 몰고 쳐들어왔잖아.]
2년 전 일이었지만, 그 두 마법사의 횡포는 아직까지도 여실히 기억에 남았다. 지금 허가증을 받으러 가는 것도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해요. 전 만만하고, 그 폭탄마들은 건들기 무서운 거죠. 법이란 게 원래 그렇더라고요.>
[마탑에 가면 탑 부러뜨리고 기강부터 잡아겠는데? 이것들이 300년 사이에 빠져가지고.]
<그전에 신문사부터 부숩시다. 오늘도 아침에 개소리부터 쓰던데.>
현재 레오에게 파괴 1순위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신문사였다. 그리고 특히 ‘농담 암살자’라는 단어의 창조자는 확실히 척살해야 마땅했다.
그게 순리고 정의인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썩은 짓도 몇백년씩 보니까 눈깔이 썩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산에 틀어박히고 대충 뒤졌지.]
자신의 죽음을 저리 간단히 두 줄로 요약한 것도 지혜라면 지혜였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했을 때는 무언가 기묘한 점이 있었다.
<그럼 현자의 돌은 왜 남겼습니까?>
[...]
속세에 불쾌하다 못해 경멸하는 그가 어째서 유산이나 다름 없는 물건을 남겼지, 심히 의심되었다.
<그렇게 빌어먹을 세상에 무언가를 남길 이유는 없잖아요.>
[...그래도 믿고는 싶었다. 누군가가 이 빌어쳐먹을 세상을 바꿔줄 거라고. 그래서 남겨준 거야. 이런 귀신이 되가면서까지.]
그 말을 듣고 레오가 떠올린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녹을 먹고 있는 가문의 시초.
인류를 지킨 구원자.
‘...루벤 라인하르트.’
초대의 용사가 현자의 마지막 믿음이었을 거다.
[...뭐 너무 부담갖지는 말라고. 루벤만큼은 기대도 안 해.]
<그럼... 왜 절 고른 겁니까?>
[그건 이미 말했잖아.]
현자는 짧게 말했다. 그 언어의 감정은 천박도, 가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넌 천재라니까.]
저 지혜의 현인에겐 당연한 진실이었으니까.
<...으...>
근데 조금 오글거리긴 했다.
[왜 칭찬해도 지랄이야.]
<미안하고, 그럼 부탁한대로 마탑에나 가보죠.>
[싸가지 없는 새끼.]
그래, 이러는 게 현자지.
나름 만족스러운 대화였다.
***
[그런데 마탑에는 어떻게 갈 거냐? 워프 게이트?]
<그건 제 월급으로 안 돼요.>
마탑과 저택의 거리를 생각하면, 깨지는 비용은 상당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계산하면, 한 달 동안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기차를 타야죠.>
[...기차? 뭐냐? 그건? 먹는 건가?]
현재 레오의 지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상식 외의 발언이었다.
생각해보면 현자는 300년보다도 더 전에 은거했을 테니, 현대 문물을 알 리가 없었다.
<보면서 설명해드릴게요. 그러니까...>
“레오!!”
갑자기 누군가가 레오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저런 가까운 호칭을 쓰는 사람은 가문 내에서도 드물었다.
“아리아 아가씨?”
드물다기 보단, 아리아가 유일하다 말해도 무방했다.
“오늘...! 휴가를 쓴다며...?!”
방금 전 다녀온 곳은 집사장실, 알프레드가 업무를 보고 있는 집무실이었다.
알프레드를 보고 온 이유는 휴가 사용에 대한 통보 때문이었다.
“아, 네. 아가씨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당연히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도 말하는 게 순리였다. 하지만 우선 집사장에게 말하는 것이 휴가를 허락받는 것이 효율성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왜...?! 왜...! 휴가를...! 3주씩이나 써?!”
다만 2년 동안 깊게 묵혀놨던 휴가들을 몰아서 쓴다는 점에서 아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기왕 외출하는 김에 들를 때가 많아서요. 이 시기에는 할 일이 제법 있거든요.”
레오가 워프 게이트를 택한 대신 기차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금전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목적지가 한 곳이라면 워프 게이트가 몇 배는 편안했지만, 들러야할 곳이 여러 곳이라면 기차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그래도...! 이러는 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그런가요? 하지만 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갑자기 빠질 수는 없는걸요.”
마탑의 허가증 정도야 미룰 수 있었다. 어차피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1~2주 정도는 여유를 둬도 되겠지.
하지만
“성묘하러 가야 해서 그다지 여유는 둘 수 없는데요. 일주일 안에 고향까지 내려가야 하거든요.”
“...성묘? 도론으로 간다고?”
자주 말하지는 않았는데, 용케 그런 촌구석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천재.
“부모님 성묘하러 가야거든요. 저번 해에도 갔잖아요.”
“저번 해에...?”
하긴 아리아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저번 해에는 워프 게이트 써서 바로 갔다왔죠. 그 때문에 지갑이 완전 비긴 했지만요.”
저번 해에는 워프 게이트 덕에 하루는 넘게 걸릴 성묘는 2시간 정도로 단축할 수 있었다.
[아, 저번에 고향 내려갔을 때?]
현자는 어쩔 수 없이라도 따라가게 되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옆에서 계속 쫑알거리라는 것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지.
“그럼 이번에도 워프 게이트로...!”
“그건 안 돼요. 돈도 없고...”
레오의 표정이 조금 우울하게 변했다.
“마을 촌장님이 편찮으세요. 며칠 전에 전보를 받았거든요.”
“...아...”
[아까부터 너무 가불기 아니냐?]
부모님의 성묘, 지인의 병환.
이걸 말리는 건, 어지간한 독기로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말리는 것 자체가 인간 말종이었고.
“...그...그럼... 잘 갔...”
레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리아는 떨어지는 눈물을 간신히 오러로 붙잡는 실정이며 심정이었다.
2년이나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레오나르도가 3주씩이나 사라진다는 건, 아리아스필에게 있어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아! 차라리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갔다... 같이?”
그 제안에 참지 못하고 떨어지려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무래도 기차로 가는 거다보니 혼자 가는 건 재미가 없거든요. 마을 사람들한테도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순간, 아리아의 머릿속에는 기차를 타는 상상마저 끝나있었다.
***
기차역은 워프 게이트 이상으로 사람이 붐벼있었다. 본디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중산층 및 저소득층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교통수단인 만큼 그에 비례한 인파들이 밀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오, 이게 기차야?]
기차는 마치 거대하고도 긴 원통을 잘라 몇 번이고 연결한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만 놓고 봤을 땐, 동양의 용이라는 생물과도 유사했다.
[...흠...]
기차를 처음 본 고대인은 의외로 초연한 표정으로 그 웅장한 몸체를 바라보았다.
<왜요?>
[이건 내가 예전에 고안했던 거랑 비슷한데?]
<...진짜에요?>
보통이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일갈할 테지만, 저번에 들은 업적이 하도 인상적이었기에 약간의 믿음이 샘솟았다.
[당시에는 역을 설치할 장비도, 전국에 레일을 깔 비용도 없는지라 안 된다고 퇴짜 맞았거든. 참 시대가 좋아지기는 했어.]
<근데 그럼 현자님 발명품 도용한 거 아니에요?>
[야, 300년도 더 된 일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하는 건 너무 쪼잔...]
<이거 만든 마법사, 특허하고 사업으로 3000억 골드는 넘게 벌었데요. 지금은 25살의 연하인 미인을 아내로...>
[죽여버려도 되냐?]
마탑에서 허가증 받기 전까진 자제해주세요.
“레오! 이쪽인 거 같아!”
아리아는 승강장에서 손을 흔들어대었다. 귀족가의 영애님께는 이런 경험할 일이 많지 않으니 흥미가 돋을 수밖에 없을 거다.
“우선 매표소에서 표부터 사야해요! 따라오세요!”
레오가 큰소리로 외치자, 아리아는 민망하게 얼굴을 붉히며 매표소로 뛰어왔다.
“...미...미안.”
“괜찮아요. 그럼 두 장 살게요.”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매표소 직원에게 표주문을 했다. 직원은 묵직한 레오의 주머니를 보자, 흔쾌히 일등석 칸 두 장을 내밀어주었다.
“잘 가지고 계세요. 중간에 직원들이 표를 끊을 테니까요.”
“...그...그정도는 알고 있었어...”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의심을 불렀지만, 레오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때때로 주인의 부족한 점을 가려주는 것이 기사의 충심이 아니던가.
“그럼 타죠. 곧 있으면 기차도 출발할 테니까요.”
역무원들은 기차의 입구 앞에서 승객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레오 일행도 입구에 들어서 열차에 올라탔다.
[마차랑은 다른 느낌이네. 훨씬 넓고 쾌적하구만.]
현자의 말대로 열차 내는 마차와는 격이 다르다고 말할 정도로 편안했다. 그건 물론 지출이 큰 일등석 칸을 구매한 까닭도 컸다.
아무래도 비싼 만큼 좌석을 제값을 할테니까 말이다.
[그럼 잠깐 갔다올게.]
<네? 어디로요?>
[그냥 기차 내부나 구경하게. 구조를 파악해야 이게 표절이 모방인지 구분할 거 아니야.]
설마 아까 말한 거에 아직도 뒤끝이 남은 걸까, 그런 걸 물을 새도 없이 현자님은 멀찍이 날아갔다.
<근데 이거하면 마나 소비가 커진단 말이에요.>
멀찍이 떨어진 현자와도 태연히 통신하며 레오는 투덜거렸다.
[좀 참아라. 이것도 다 익숙해지라고 하는 거야.]
몸의 마나 코어와 서클이 2개로 늘어났을 때 즈음 알아낸 것인데, 마나 코어와 서클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현자와 떨어질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게 된다.
지금은 대략 원래 거리에서 2배로 늘어났지.
‘뭐 괜찮겠지. 조금은 졸리기도 하고... 잠깐 조용히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최근에 쉬지 못하고 일한 탓일까, 레오나르도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갔다. 평소에는 수면 시간에도 현자의 존재 때문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일등석의 쾌적함 덕분일까, 아니면 휴가라는 기간이 긴장을 풀어준 탓일까.
레오나르도는 어느샌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레오, 중간에 간식차가 온다던데, 뭐라도...”
아리아는 기차에 흥미를 느끼며 이것저것을 구경하려던 순간,
폭
무언가가 아리아의 어깨에 얹어지게 되었다.
무거웠지만, 따뜻한
간지럽지만, 부드러운
“...음...? 어...!?”
레오의 머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기대져 있었다.
‘...깨워...야하나..?!’
그렇게 아리아가 레오의 볼을 잡으려던 순간,
‘...잠깐...’
굳이 깨워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레오, 자신의 전속 기사는 그리 편안한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
매일 근력 수련과 무기 수련, 그리고 마나 수련을 빼먹지 않고 이행하며.
동시에 마법 공부 또한 쉬지 않고 익혀왔다.
지금 아예 3서클 마법의 허가증을 받으러 마탑으로 향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자신의 소중한 기사를 깨우는 것이 맞는 일까?
절대, 결코 아니다!
아리아가 아니더라도 모두 고개를 저을 만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선의’로서, 친구로서의 ‘배려’로서
아리아스필은 자신의 어깨를 기꺼이 희생하도록 결심했다.
단언컨대, 사심 따위는 없었다.
이대로 레오의 향기를 맡는 것이나, 조금만 더 중심을 잃어서 아예 레오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포상은 결단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의 아리아는 사색에 빠지는 것에 집중했다.
아주 행복한 사색이 소년의 향기와 함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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