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성장-5
함성은 없었다. 경탄도 없었으며, 야유조차 없었다.
침묵의 시선만이 경기장을 채우고 있었다.
“...하...”
침묵을 깬 건 아리아였다.
“역시 강하네. 레오...”
인정,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승복하며 쓰러졌다.
레오는 검을 휘두른 자세를 유지한 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그 승패의 교차에 심판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승, 승자!! 레오나르도!!”
그 확답에 몸에 힘이 풀렸다.
“쿨럭...!”
마른 기침과 함께 핏방울이 입가에 새어나왔다.
[괜찮냐?]
<아뇨. 내장 대신에 전기 뱀장어를 꼬아서 처넣은 느낌이에요.>
그것도 조리한 것이 아닌, 전기를 듬뿍 뿜어내며 꿈틀대는 싱싱한 뱀장어가 들어찬 감각이었다.
[전격 마법을 육체강화에 쓰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라이트닝을 몸에 바로 때려넣으니까 그래. 애초에 단순한 1서클 마법으론 너무 위험하다고.]
그건 설명하지 않아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땐, 공격 마법이 아닌 가공된 버프 형태의 마법을 쓰는 게 정론일 것이다.
[...그래도 봐줄만 했어. 짜샤.]
“존나 고맙네요... 그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레오의 무릎은 구부려져 바닥에 닿게 되었다.
[...기절했냐?]
“아뇨. 아직... 기절할 순 없죠...”
레오는 검을 지팡이 삼아 지면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쓰러진 아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이쪽도 지친 건 마찬가지군.’
아리아는 2성 코어의 마나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있었다. 그러면서도 가련한 손으로 굳고 단단히 검을 쥐고 있었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아가씨.”
레오는 근육통이 저릿거리는 양팔로 그녀를 안은 채,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관중석에 있는 마르켄을 바라보며 외쳤다.
“...무기는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제야 관객들은 전원 환호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수히 저 전사가 벌인 격전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
무기고까지 들어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몇몇 기사나 식솔들은 반대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레오를 제일 껄끄럽게 바라보던 마르켄이 완고히 의견을 밀어붙였다.
본래 개인 무기고의 주인인 마르켄의 주장인 만큼, 반대하던 일행들의 주장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런 행동에 의아할 틈도 없이 레오는 무기고 앞으로 다다를 수 있었다.
“...도착했다.”
라인하르트 가문이 소유한 산 중 하나의 정상에 올라왔을 때 즈음, 마르켄은 한 동굴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멈춘 자리에 그 거구의 노인은 비대한 동굴의 대문을 맨손으로 밀어 열어내었다.
둔탁하고 뻣뻣한 소리를 듣는 것으로 저 문의 방범 원리가 단순한 무게라는 걸, 감으로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들어가지.”
마르켄의 지시대로 레오는 무기고의 주인과 함께 무기의 창고로 들어갔다.
[...오... 늙은이가 제법 운치는 있네.]
현자의 감탄대로 동굴은 운치가 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단지 자연적인 동굴이라고 하기엔 조금 기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마치 조각가가 깎은 것처럼 깔끔하게 지면과 단면이 잘려 다듬어져 있었다.
“여긴 내가 직접 만든 동굴이다. 훈련을 위해 일일이 검과 망치로 산을 깎아내었지.”
현자는 제법 감탄을 내었지만, 레오는 조금 시늉만 할 뿐 진심으로 놀라지는 않았다. 전생의 시절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훈련으로 쓰고 버리긴 아까우니, 지금은 내 무기고로 쓰고 있지. 가문의 식솔이 아닌, 외부인 중에 들인 건 네가 처음일 거다.”
그건 조금 의외였다. 누가 봐도 마르켄은 레오나르도라는 존재를 썩 너그러이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영광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생각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마르켄은 혀를 차며 눈매로 쏘아보았다.
“착각하지 마라. 널 인정하는 건 아니니까.”
[거 생긴 것만큼이나 꼬장꼬장하네.]
현자의 말은 너무 심했지만, 그다지 감싸주고 싶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도리를 지킨 것이리라.
“널 들여준 이유는 어디까지나 보험이다.”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마르켄은 손가락을 튕겼다. 절도 있는 반응과 함께 벽면에 걸린 촛불이 차례로 피어올랐다.
불꽃은 타오르며 동굴 내부의 어둠을 빛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건 좀 쩌는데.]
밝아진 동굴 안에는 각종 무기들이 정갈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품질이 좋은 것이 아닌, 하나하나가 전부 고유한 능력을 보유한 재보였다.
“우선 원하는 무기를 골라라. 설명은 그 뒤다.”
레오 입장에선 감사한 명령일 따름이었다.
거절하지 않은 채, 레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귀염둥이를 향해 뛰어갔다.
[근데 뭘 고르게?]
<그러게요. 이 이쁜이 중에 어떤 게 좋으려나~?>
[네가 이쁘다는 걸 알긴 아는구나. 미의식이라는 개념이 없는 줄 알았다 얘.]
저 지랄을 듣기엔 눈 앞에 있는 잘 빠진 친구들의 교태가 레오의 시선을 자극했다.
<역시 화력하면 용암검이... 아니, 신체강화까지 고려하면 풀고르가... 쓰읍... 차라리 방어구를 고를까?>
장단점들이 전부 뚜렷한지라 바로 고르기가 정말 힘들다 못해 고통스러웠다. 마르켄만 없었더라면, 아공간 장갑을 가진 뒤 모든 무기를 때려넣어 가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흠...음...?!]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와중, 현자의 시선이 한 물건의 중심으로 꽂혔다.
<왜요? 뭐가 있어요?>
레오의 시선도 자연히 현자의 시선과 겹쳐지게 되었다.
시선의 종착지에는 검은 구슬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무척이나 둥글고 매끄러운 흑옥이었으나, 촛불의 빛은 전혀 반사되지 않았다.
“저걸 고를 건가?”
레오의 시선이 저 검은 옥에 멈추자 마르켄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게...”
“고를 거라면 난 추천하지 않도록 하지.”
[대답 안 들을 거면 왜 물은 거야?]
그건 같은 부류의 인간끼리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레오는 아무 말 없이 흑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 검은 구슬은 예전에 한 유적에서 얻은 유물이다. 나름 희귀해보여서 챙겨왔다만 감정을 해봐도, 가공해보려고 전부 실패했지.”
“불괴석 같은 부류의 물건인가요?”
때때로 순도 높은 불괴석은 쉽게 가공할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저 구슬도 그런 용도의 소재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대장장이들도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도 아니었지. 그리고 불괴석이었다면 감정도 가능했을 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오도 별 관심없이 다른 무기로 눈을 돌리려고 했다.
[저걸로 해.]
하지만 다른 옹고집이 그 선택을 저지했다.
<네? 왜요?>
[잔말 말고. 저게 좋아.]
현자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고작 농을 하나 던지기에는 심히 아까울 연기일 정도였다.
<알겠다고요.>
“저걸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레오는 한번 속아보기로 했다.
제자가 스승 한 명을 못 믿어서야 무엇 하나 배울 리가 없을 테니까.
“분명 경고했다. 난 기회를 여러번 줄 만큼 관대하지 않아.”
“제 감을 믿어봐야죠.”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흑색 구슬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미동 하나 없는 손길로 구슬을 붙잡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돼죠?>
[남은 건, 내가 하면 돼.]
현자는 영체인 상태로 흑빛의 돌에 팔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암호 입력, 메멘토 모리.]
...
......
.........
<된 거예요?>
현자의 눈동자가 느리게 돌아 굴러갔다. 제발 아니라는 대답만은...
[...어...아니...?]
뭐가 아니라는 걸까, 현재로선 저 인간이 절대 현자가 ‘아니’라는 게 유력했다.
[잠깐, 기억났어. 다시 해볼게.]
그렇게 설득력 없는 소리를 하며, 현자는 다시 주문을 읊었다.
[암호 입력, 메이거스 메멘토 모리.]
...
......
이번엔 기대도 안 했다.
<역시 안 돼...>
《인식 완료, 소체 [검은 돌] 작동을 시작합니다.》
소리가 주변에 울리며 검은 돌이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촛불과는 비교가 무례할 정도의 휘광이었다.
[자, 이제 만져보라고.]
<전 믿고 있었습니다.>
[구라치지 마. 새꺄.]
서로의 돈독한 신뢰를 잘 확인하며, 레오는 검은 돌에 손을 올렸다.
《마력이 있는 생명체 확인, 각인 작업을 시작합니다.》
검은 돌이 레오의 팔에 달라붙었다. 형태로 봐선 굵직한 팔찌와 같았다.
“...어...! 어떻게...!?”
“저...저도 모르겠어요!”
주인이 된 레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황한 채로 팔찌가 달린 팔을 황당하게 흔들어보았다.
[이제 검을 상상해봐. 네가 생각하는 가장 쌈박한 검을.]
<...검을요...?>
레오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확실히 머릿속에 검의 형상을 구축시켰다.
그러자,
“...무슨...?”
마치 검은 슬라임을 보는 것처럼, 팔찌는 다시 형태를 바꾸며 예리한 검을 형상시켰다.
[어때? 쩔지? 내가 만든 것 중에서도 제법 완성도가 높다고.]
<현자님이 만드신 거예요?>
[어, 현자의 돌 만들다가 어찌저찌 튀어나온 건데, 나름 괜찮아 보여서 가공했지.]
설명한 투만 들으면 두부 만들다가 비지가 나온 수준이었다.
[검은 돌은 네 마력을 먹고 성장할 거야. 지금도 강철보다 단단하지만, 잘만 하면 여기 있는 무기들보다 쓸 만해지겠지. 거기에 가변형 무기여서 자유롭게 사용도 가능해.]
레오는 몇 번이고 묵빛 검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써서 흥미가 없었던 여성이 가리던 걸 벗자 한눈에 반한 느낌이었다.
“...어...어떻게...!? 그보다 그걸 어떻게 사용할 줄 알지?!”
[...여기선 대충 얼버무려. 저번에 했던 삼류 무협지 설명마냥. 알겠지?]
그거라면 레오의 주특기였다.
“...모...모르겠습니다. 어느샌가 손이 돌에 닿아있었고, 깨닫고 보니... 이미 이렇게...”
“...설마... 성검과 같은 부류의 무기인가?”
마르켄은 짧은 레오의 변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멋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상상해버렸다. 물론 ‘심장에 있는 현자가 방법을 알려줬다.’라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혹시, 가지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약속은 지켜야 마땅하지. 그런 형태로는 회수도 어려울 것 같고.”
마르켄은 그렇게 납득하고 무기고 출구 쪽으로 발을 돌렸다.
“이제 나가지. 할 말은 가면서 하겠다.”
“알겠습니다.”
마르켄을 따라 레오도 무기고 출구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말했을 터였지. 무기고의 무기는 보험이라고.”
“예,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하드는 이미 살해당했다.”
그 대답에 레오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아마 팔찌 형태로 부착되지 않았더라면 얻은 무기마저 떨어뜨릴 정도였다.
“예?”
“제하드 뿐만 아니라 다이논스 가문 전부 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
제하드의 짓이라고 증언했을 때는 별 의심없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암습이긴 해도 집행기사단의 정보력과 실력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핏빛 그림자의 소행입니까?”
“확신은 없다. 이미 핏빛 그림자는 처부쉈지만, 거기뿐이 아닐 테니까.”
태연히 상급 암살단의 파멸을 말하며, 그는 편지 몇 장을 내밀었다.
"제하드가 보낸 밀서다. 읽어봐라."
“이건...”
레오는 뜯어진 편지 봉투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그 소년의 눈빛이 커졌다.
“...그래. 저들의 목적은...”
마나체련술, 그에 대한 방식과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편지에 써진 날인과 인장이 그에 대한 증거를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미 마나체련술의 이름은 각종 정보처, 암살 길드에 뿌려졌다. 다른 나라, 기사단의 귀에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러면...]
직관적으로 표현하면.
“전 살아있는 비급이군요.”
그것도 현재로서 최적의 마나, 육체 단련법을 지닌 비급으로 말이다.
납치 대상으로 선정되는 건 당연할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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