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인자는 회귀했다-26화 (26/248)

EP.26 성장-3

[...너 뒤지기 직전이지?]

<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저 눈빛을 보면 모르겠는가. 저건 같은 인간을 보는 시선이 아니다. 잘 쳐줘봤자 변소의 파리나, 여름철 모기 정도겠지.

[왜 저러는데? 저번에 얘 애비는 가만히 있었는데.]

레오도 그게 의문이었다. 고작 업어주는 것뿐인데, 마치 자신을 손녀딸을 어떻게든 꾀어보겠다는 발정난 짐승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인간 처지에선 짐승은 죽여야 마땅하겠지. 애당초 레오는 짐승이 아니지만.

<마르켄 씨는... 뭐랄까... 올곧은 분이십니다.>

[어차피 안 들리니까 편하게 말해.]

<꼰대입니다. 줏대가 꼬여서 승천하기 직전이죠.>

[역시.]

늘 현자를 꼰대라고 깎아내리긴 했으나, 마르켄 씨는 등외 수준의 꼰대, 현자와 붙는다면 판정승으로 현자한테 패배할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선 최선의 패배였다.

[왠지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계속 지랄할 것 같아.]

<어? 역시 같은 꼰대여서 그런가.>

[무슨 의미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이미 서로 통하고 있을테니까.

“...뭘 가만히 있지?”

“...예?”

“내 손녀를 얼른 내려놓지 그러나?”

레오는 업힌 아리아를 순순히 내려놓으려고 했다. 말로 내려놓는 게 수명 연장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꽈악...

어째서일까, 어깨에 올린 아리아의 손아귀가 억세진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너머 승모근마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른.”

하지만 역시 승모근보단 목숨이 중했다. 그녀의 악력을 이겨내며 레오는 아리아를 내려놓았다.

“...”

등에서 내려가자 아리아는 시무룩한 감을 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맨발이나 불편한 구두를 신고 걷는 수밖에 없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을 테지.

“아리아, 할아비한테 업혀라. 그 편이 낫겠지.”

마르켄이 어부바를 위해 등을 내민 순간, 아리아의 눈빛은 다시 생기를 잃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냉랭하고 딱딱한 거절에, 손녀를 사랑하는 조부의 마음에 조금 금이 간 듯 보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저 노익장은 냉철한 눈빛으로 레오를 쏘아보고 있었다.

“엄마가 널 찾고 있다. 아직 선물도 못 드렸을 테니 얼른 가지.”

생각해보니 선물도 못 드리고, 사교장 밖을 나갔다.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있었다.

“전속 기사라는 놈이 이런 상황 하나 관리 못 하나?”

문제는 저 배배꼬인 꼰대는 그 원인을 본인이라 단정 짓는 것에 있었다.

[근데 맞긴 맞잖아?]

다른 꼰대의 말은 무시하자. 지금은 한 꼰대로도 벅차다.

***

사교장은 비교적 활발한 편이었다. 아리아스필의 난입과 동시에 탈주로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사교계의 분위기를 띄우는 해프닝 정도로 취급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오,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마르켄 라인하르트의 출현이었다.

아까의 상황이나 가십거리로 떠들기에는 저 고고한 노인의 기류가 너무나 싸늘했다.

“언질 없이 와서 미안하군. 여러 상황이 맞물려 그렇게 됐네.”

“아...! 아닙니다! 아버지!”

가주님이 저렇게 당황하는 상황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렇게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 희귀한 광경을 흔하게 만드는 장본인, 확신하건대 조부인 마르켄밖에 없었다.

“선물은 이런 것밖에 챙겨오지 못했군. 미안하군. 적당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켄은 투박한 상자에 포장된 선물을 내밀었다. 파티의 주인공인 시리카는 오히려 눈치를 보며 선물을 받아드렸다.

“...이건 이빨이네요...?”

정확히는 짐승의 송곳니였다.

송곳니는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내 사슬끈을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집행 도중에 잡은 늑대 우두머리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다. 부적으로 나쁘지 않겠지.”

“정말 감사합니다. 꼭 걸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꽤나 놀란 눈치로 이빨 목걸이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받은 시리카는 덤덤히 송곳니를 목에 걸었다.

늑대 뿐만 아니라, 악어, 상어, 곰, 그리고 와이번까지도, 박물관의 면상을 후려칠 만큼 각종 생물의 이빨 장식을 선물로 받았으니까.

[창의성 부족일세.]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다네요.>

[그럼 난 뭔데?]

<그 예시요.>

그렇게 마르켄을 시작으로, 조금 이르지만 다른 이들도 선물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귀한 보석부터 시작해 명인이 만든 장식품, 귀금속 등이 차례로 시리카의 손을 너머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이겁니다!!”

장남 리오스는 실눈과 입꼬리를 올리며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뭔지 혹시 아냐? 어째 불안한데.]

<괜찮을 겁니다. 이상하게 생겼어도...>

상자를 열자 작은 손잡이가 달린 무언가가 쿠션에 담겨 있었다.

“이건...?”

지잉

갑자기 손잡이에서 검날이 튀어나왔다.

논지는 단순히 칼날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칼날이 튀어나오는데 ‘찰칵’이나 ‘철컥’같은 소리가 아닌 ‘지잉’이라는 기묘한 소리가 나왔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시각 정보를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광선검인데?]

검날 대신 광선이 튀어나오는 단검, 그것도 붉은색이었다.

<...예, 전생에도 이런 적이 있었죠.>

시리카는 그 광선검을 당황스럽다는 듯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는 라인하르트의 흑암이 광선검을 보다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림자로서 상대방의 선물을 탐하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

“...이게... 뭐니? 리오스...?”

“예! 빵칼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빵칼이었다.

“...뭐...?”

“하하! 설명해드리옵지요!”

리오스는 광선 빵칼을 들어 페이스트리를 잘랐다. 가열음과 함께 빵껍질이 바삭해지며 잘려나갔다.

“이젠 빵을 자르는 것만으로도 토스트를 만들 수 있죠.”

주변 사람들은 그 혁명에 손뼉을 치기 바빴다. 저 혁명적인 재능 낭비를 보고 가만히 있기는 몹시 힘들 것이다.

[...쟨 천재냐? 등신이냐?]

<...전 천재에 한 표요.>

[난 등신에.]

동점이니 타협해서 리오스는 천재적 등신이라고 하자.

“...레오...”

아리아가 레오의 소매를 붙잡았다. 생각이 깊어진 나머지 자신들의 차례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 여기 이건...”

아리아는 레오를 옆에 세운 채, 준비해둔 선물을 내밀었다. 선물이 선물인 만큼 굳이 상자에 담아두지 않은 채, 고급 천과 리본으로 동여매어 두었다.

“이건... 참 아름답구나.”

오색으로 빛나는 꽃, 하나의 작은 무지개를 꽃잎마다 부드럽게 마법으로 입힌 것 같았다.

“...어디서 구한 꽃이니? 이런 꽃은 처음 보는데...”

“구한 게 아니라, 만든 거예요. 레오가 알려줬어요.”

그러면서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의 소매를 붙잡았다. 사람들이 시선이 레오와 무지개 꽃을 번갈아 바라보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군.”

시리카는 오색빛의 꽃다발을 들며 레오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네, 생신 감축드립니다. 부인님.”

레오나르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가문의 부인에게 감축을 표했다. 그런 예법에 그녀는 기쁜 듯 인자한 웃음을 내보였다.

“감사해요. 레오나르도 군.”

“아닙니다, 가문에 받은 은덕에 비하면 약소한 것이시죠.”

가문이 준 것에 비하면 저 꽃은 그저 간단한 예의에 불과했다.

레오는 고개를 반 정도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후후, 아리아가 왜 당신을 총애하는지 알 것도 같네요. 그 애 곁에 있어서 줘서 고마워요.”

안주인의 포용을 내보이며 시리카는 꽃다발의 향을 맡아보았다. 고개를 든 레오는 그 반응에 안심했는지 다시 아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총애, 으으... 왜 그런 말을...”

어째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홍조에 신경 쓸 기색도 없이 시리카의 주변에 파티장의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선물을 주는 것도 끝났으니, 한 번이라도 더 많이 가문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인파에 섞인 것은 레오와 아리아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나르도라고 했나?”

그 인파 사이에서 마르켄은 다시 레오에게로 걸어오게 되었다. 싸늘한 공기가 화사한 파티장을 가르며 마르켄과 레오만의 공간을 암묵적으로 형성시켰다.

“네, 마르켄 님.”

“듣기로는 아리아와의 만남은 비공식적인 결투였다고 들었는데, 그게 맞나?”

‘비공식적’이라는 수식어에 강조를 두는 거로 봐선, 긍정적인 발언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니, 받아드려야지.

“일개 철없는 용병의 호승심이었죠.”

“자각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마르켄의 눈은 차가웠다. 눈가에 맺힌 초점은 마치 호수의 수면을 얼린 살얼음을 보는 것처럼 예민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이겼지?”

“무승부였습니다. 비공식적이고 공정하지도 못한 결투였으니까요.”

대답에 그의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닌 듯 보였다.

찌푸린 눈가를 피지 않은 채 그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두 번째에도 결투했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됐지?”

“...그 승부는 도중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마을에 발록이 출현해서 끝맺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조리있는 답변에도 그의 눈살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역으로 눈살의 주름은 점차 늘어나고 깊어져가고 있었다.

“그럼 자네는 아리아를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게로군.”

싸늘하다 못해 주변의 공기가 아예 얼었다. 아마 한숨이라도 내쉬면 김이라도 서릴 게 분명했다.

“아버님, 갑자기 그런 말씀은...”

“이건 확실히 해야 할 문제니 말리지 말게나.”

[저 새끼 진짜 꼰대 놈일세.]

<인정합니다.>

지금은 당일 점수 차로 마르켄이 우세했다. 이 세기의 역전극을 혼자만 보는 것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은 사실 아닌가?”

“아버지! 그걸 말하려고 급히 온 게 아니잖습니까!”

멀찍이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마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걸 말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필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라인하르트,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시키지 마라.”

그 명령에 싸늘한 분위기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쟤 이름 크리스티나였냐? 크리스 아니었어?]

<각자 숨기고 싶은 건 있는 법입니다.>

마르켄의 우직한 틀니 덕분에 전부 밝혀졌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주는 게 도리겠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려울 거 없지. 아리아와 재대결을 하는 거다.”

“재대결 말입니까?”

“전속 기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으니까. 혹시 반론하고 싶은 것이 있나?”

레오나르도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아리아스필의 안색을 살폈다.

“전 괜찮습니다만, 아리아님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괜찮아요!”

즉답이었다. 안색을 살핀 게 무의미할 정도의 속도였다.

“...저도 제대로 결판을 내고 싶어요.”

생각 좀 하면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아리아스필에게도 레오와의 결투는 의미가 남다를테니까.

“...”

레오는 잠시 망설였다. 마법은 쓰는 것이 맞을지, 그리고 더는 봐주는 것이 맞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전...”

고민의 끝에서 승낙하려던 순간, 마르켄이 먼저 말했다.

“정 힘들다면이렇게 하지. 아리아에게 이긴다면 내 친히 내 무기고에서 무기 한 자루를 가질 수 있게...”

“하겠습니다.”

뭔가 속물적인 의도로 보이긴 했으나, 죄책감은 없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이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기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염 검기를 날릴 수 있는 검이나 번개가 뿜어지는 창 같이 부차적인 것에 흑심 없는.

깨끗한 감정으로 승부에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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