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전속 기사-1
침대에서 눈을 떠자마자 아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쓰읍...”
숨과 함께 깊은 향기가 코를 흝으며 폐로 들어왔다.
“하...”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몹시 익숙하면서도 자주 맡지 못해 아쉬웠던 향내음, 이건...
“레오나르도...?”
반밖에 떠지지 않은 완전히 떠진다.
이 향의 주인이 누군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나...! 나 왜 여기서...?!”
아리아는 이불을 걷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분명 자신은 레오나르도의 옆에서 그가 일어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똑똑
그 몽롱함 속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리나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어?”
동의의 의미는 아니었지만, 몸에 잔류하고 있는 잠기운은 그걸 모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번에 늦잠을 주무신 것 같아서요. 깨워드리려고 왔는데... 혹시 방해됐나요?”
리나의 말에 그녀는 살짝 뻣뻣한 입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야. 그냥 잠이 덜 깨서 그래.”
“그러시군요. 다행이에요.”
“저기, 레오나르도는...? 어디 갔어?”
리나는 창가 밖의 별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레오나르도 종자님은 별채에 계시니까요.”
“그래...?”
떨떠름한 기색을 무표정에 녹여낸 채 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혹시 머리를 빗어드려도 될까요? 많이 헝클어져 계셔서요.”
“아, 고마워.”
리나는 아리아의 뒤로 가, 빗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레오나르도는 어디로 갔어?”
아리아는 뒤에서 머리를 빗어내리고 있는 리나에게 물었다.
“그게... 방을 나가시고 가주님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셨어요.”
가주라는 단어에 아리아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버지하고...?”
“네, 같이 정원을 산책하고 계셨어요. 말씀을 나누던 것 같았는데...”
“얘기를 나눴다고?”
그날, 밤에 시간을 내면서까지 이야기를 나눌만한 화제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개 종자가 가문의 주인과 직접 대면해 얘기할 만 것은 그 일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나눴어...?”
“그건 모르겠어요. 저도 멀찍이서 보기만 해서요. 하지만...”
조금 리나는 말에 뜸을 들였다. 괜한 사족을 붙이는 것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종자님은 우시는 것 같았어요. 별채로 가는 길에 얼굴을 봤거든요.”
그 순간.
“...울었다고?”
그때, 아리아는 정색했다.
정색한 얼굴을 봤기에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뒷편에 있는 리나조차 그녀가 정색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네?”
“레오나르도가 울었다고?”
말의 어투, 몸의 자세, 그리고 주변의 공기마저 엄정한 기세로 깔려있기에, 누구라도 아리아가 정색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저도 정확히는...”
“지금 레오나르도 어딨어?”
당황해하는 리나의 말을 자르며 아리아는 단호하게 질문을 내었다. 분노가 차갑게 울리는 것이 아무 죄 없는 리나조차 섬뜩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아마 별채에...”
“잠깐 갔다 올게.”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통보에 가까운 의사를 남긴 채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머릿결은 완전히 다듬지 않았지만, 그게 그녀의 외모를 낮추는 요인이 되지는 못했다.
급하다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정확하게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은 거른다고 말씀드려줘.”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여유롭게 아침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아버지께 무슨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레오나르도가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무거우면 무거웠지 가벼운 일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마 쫒아낸 건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만은 막아야했다.
아버지와 싸운다고 할지라도 레오나르도가 가버리는 것은 용납할 수...
“조식은 거르실 겁니까?”
“어, 지금 당장...”
그 순간 그녀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리나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목소리로 보나, 방향으로 보나 리나가 대답하기엔 상황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아침입니다. 아리아스필 님.”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아리아가 만나러 갈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예, 부르셨습니까?”
레오나르도는 정중한 태도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너...너 간 거 아니었어?”
“어디로 갑니까?”
“그니까... 아버지랑 얘기해서...”
“아, 그 건에 대해선 저도 말씀드려야할 것이 있습니다.”
당황한 아리아스필에게 레오나르도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정중히 말을 올렸다.
“종자 레오나르도, 가주 글라디오 라인하라트 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리아스필 님의 전속 기사가 되었습니다.”
“...어?”
당황한 표정은 더욱 당황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삐뚤어진 표정은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러니까 산책하는 동안, 그렇게 정해진 거구나.”
“예, 어디까지나 가주님과 제가 결정한 일이니 아리아스필 님이 거절하신다면...”
“아니야!”
단호하면서도 감정적인 외침.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던 레오마저도 놀라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나, 난 괜찮아! 전속 기사가 돼도 좋아! 어!”
거절할 이유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레오나르도가 가문에 올 때부터 바라던 일 아니였는가.
두 팔 벌리고 환영해도 모자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뭘 하는 거야?”
그녀는 조금 기대가 찬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주 ‘조금’이었기에 눈치가 부족한 레오가 깨달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는 아리아스필 님의 계획과 생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전 그 근처에서 동행할 거고요. 물론 개인적인 시간을 원하신다면 동행은 안 하겠습니다.”
사실 그런 걸 물은 것보다는 하고 싶은 걸 질문한 것에 가까웠으나, 레오의 무딘 눈치로는 그런 사실까지 밝혀낼 수 없었다.
“그럼 연무장으로 가자.”
“조식은 안 드셔도 괜찮겠습니까?”
“응, 배는 안 고파.”
그것보다는 레오와의 훈련이 더 기대되었다.
***
연무장에는 황량한 평야를 보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 원인이 자신인 걸 레오는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하죠.”
레오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소와 같은 마나체련술이었으나 기술적인 면모에서 더욱 섬세하게 발전되었다.
“알았어!”
그녀도 검을 잡으며 체련술을 시작했다. 아리아도 마찬가지로 한층 더 세련된 마나체련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쟤 진짜 천재이긴 하네.]
<괜히 제가 질투했겠습니까?>
주변을 떠다니는 마나의 입자들이 아예 아리아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레오 정도의 기술이 없었다면 그녀 곁에서 마나수련을 하는 게 무의미하고 벅찰 정도였다.
[근데 저런 녀석을 도대체 누가 죽인 거야?]
그 말에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어쩌다 나온 말일 뿐이었다. 눈치가 없다면 없는 거였고, 무례하다면 무례한, 그정도의 발언일 뿐이었다.
하지만 레오의 표정은 유례없이 굳어있었다.
<...그건...>
“레오나르도?”
그 기색을 눈치챈 아리아는 레오나르도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
“...괜찮습니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을 뿐이에요.”
“그럼 조금 쉴래?”
“아뇨. 수련을 하는 편이 머리를 맑게 해줘서요.”
그 말에 아리아는 동의했는지 다시 검을 잡으며 훈련을 시작했다.
[혹시 내가 심한 말 한 거냐?]
<괜찮습니다. 안 심한 말 듣기가 더 드문 분이면서.>
[...그래그래, 내가 쓰레기지.]
<쓰레기라니요. 그래도 쓰레기는 한때 쓸모라도 있었다고요.>
[뒤질래?]
레오는 다시 안색을 풀며 검을 휘둘렀다.
“근데, 레오나르도.”
마찬가지로 다시 검을 휘두르는 아리아가 물었다.
“레오나르도는 누구한테 무기술을 배운 거야?”
“무기술 말인가요?”
“그렇게 많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어. 가문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을 거야.”
레오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며 대답했다.
“가르친 사람은 딱히 사람은 없어요. 손에 집히는대로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각종 무기술을 익히게 된 건, 단지 아리아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돈이 없으니 무기를 구할 수 없는 상황도 많았고, 때때로 상대방의 무기를 뺏어쓰거나 주변에 있는 물체를 무기 대용으로 쓸 때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쓸 수 있는 무기가 늘어났고요.”
물론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아리아 때문이 컸지만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단해. 혼자서 그렇게 배운 거잖아.”
“그런가요? 사실 이건 어머니께서 용병 때문인 것도 컸어요.”
레오의 어머니, 그녀는 나름 유명한 용병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레오 고향 지명은 몰라도, 레오 어머니 이름은 꼭 기억해둘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구나. 몰랐어.”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전국적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거든요.”
“그럼 어머니는 어디 계셔? 여기서 멀어?”
그 말에 래오는 태연히 대답했다.
“죽었어요.”
“...죽었다...고...?”
너무 덤덤히 말하자 듣는 아리아 쪽의 표정색이 변했다.
“대략 10살 때쯤이었나요, 엄마가 3달 정도 집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레오의 어머니는 용병으로서 먼 곳까지 오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레오가 아기였을 당시엔 그러지 않았지만, 레오가 말을 깨치고 걸음걸이도 좋아지자 일주일 단위로 들어오지 않은 경우도 종종 생겼다.
[혼자 어떻게 살았냐?]
<뭐... 마을 사람들도 제법 도와줬죠. 게이트가 열렸을 때, 종종 어머니께서 잡아주시기도 해서 보답이라는 느낌으로요.>
하지만 3달이나 안 들어오면 죽었다고 의심할 법도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사정이 있어서...”
“아, 근데 이렇게 생각하라고 한 건 어머니 쪽이에요.”
“음...?”
“용병이 대략 3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대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죽었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했죠.”
그 설명을 들은 사람의 표정은 각각 달랐다. 아리아는 동공에 공진이라도 일어난 듯 급격히 떨리고 있었고, 현자는 이국의 문화에 충격이라도 먹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진도가 너무 빠른데?]
<워낙 조기교육을 좋아하시는 분이셨어요.>
그렇게 된 뒤의 일은 간단했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든 뒤,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현재가 되었다.
“...그...그렇구나.”
“그런 셈이죠.”
“...미안, 괜히 물어봐서...”
“괜찮아요. 사람 일이 다 그런 거더라고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꼭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럼... 좋은 일도 있었어?”
레오나르도은 웃으며 말했다.
“아리아스필 님과 만났잖아요. 그리고 친해졌고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긴 했으나 이건 확실히해둘 필요가 있었다. 전에 친구와 존댓말 문제로 생겼던 논쟁을 생각하면 이건 더욱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옆쪽에 있는 현자가 사람을 쓰레기를 넘어 폐기물 보듯 쏘아보고 있었지만... 어차피 노망났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그, 그렇구나..!”
아리아스필은 고개를 돌려 친해졌다는 말을 연신 읊었다. 돌린 고개는 분명 붉게 익었겠지만, 레오는 경이로울 정도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혹시...”
잠시 머뭇거리던 아리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아리아...라고 불러줄 수 있어?”
“...아리아라고요?”
존댓말을 그만두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기에, 그녀는 본인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레오가 용기에 응하는 대답은 그 정도였다.
얼굴에 열기가 급격히 식으며, 올라간 입꼬리에도 힘이 빠진다.
역시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그리 특별히...
“하지만 원하신다면 ‘아리아 아가씨’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어떠신지요?”
화악, 이라는 의성어가 실제로 체감되었다. 최대한 얼굴을 가려보지만 홍조는 물에 퍼지는 붉은 잉크처럼 피부 전체에 뻗어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로서는 단지 절충안일 뿐이겠지만, 아리아에겐 호칭의 협공이나 다름 없었다.
마치 연상의 여성에게 그저 누나라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름과 동시에 누나를 붙이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오히려 더한 포상인데도 말이다.
“...그, 그래...! 그게 좋겠네...!!”
“다행입니다. 아리아 아가씨.”
“...으으...”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떻게 저런 호칭을 저리 간단히 부를 수 있는 걸까?
자신이 부탁한 거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 아가씨?”
그녀가 얼굴을 안 보여주자 레오나르도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전속 기사가 된 이상 그녀를 최선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레오의 의무였다.
“그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그럼 아가씨는 절 ‘레오’라고 부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응...?”
“레오나르도는 너무 긴 이름 같아서요. 짧게 줄여서 레오라고도 자주 부릅니다만... 어떠신지요?”
그녀는 천천히 레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호칭’만큼은 얼굴을 보고 해야만 의미가 있었다.
“...좋아...레오...”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렇게 서로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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