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친구-7
침묵이 흘렀다.
고요하고 조용한 시간만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정적이 방 안에 고여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왜 가만히 있나?”
그게 흐르고 흘러 깊게 담겨진 침묵을 퍼낸 말이었다.
“예?”
가주는 아리아스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침대에 눕힐 생각 아니었나? 계속 들고 있으면 깰 것 같다만?”
너무나 정확하고 냉정한 분석에 레오가 오히려 당황했다. 생각해보면 저게 일반적인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13살의 소년이 가주의 저택 안에서 또래의 딸을 덮친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서도 한 참 넘어섰다.
[쯧, 재미없게 됐...]
<재밌는 걸 보고 싶으면 거울이나 보세요.>
저런 면상이 있는데 웃을 일을 찾게 그리 쉽겠는가. 거울만 봐도 하루하루가 웃음으로 넘쳐날 것이다.
[나 유령이다.]
아차, 그러면 본인 얼굴을 못 볼 수밖에 없었다.
저런 코미디를 다신 경험할 수 없다는 것에 애도를 표하며, 레오는 다시 가주에게 집중했다.
“아, 맞습니다.”
레오는 팔에 안아든 아리아스필을 살포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위로 이불을 덮은 것은 종자로서 당연한 배려였다.
“고맙군.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나와줄 수 있겠나? 너무 시끄러우면 깰 수도 있으니.”
레오는 그 말에 따르기라도 하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글라디오는 그 행동에 얇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와 함께 저택을 걸어다녔다.
“좋은 밤이로군. 계절에 비해 선선한 날씨야.”
저택 밖을 나가 글라디오는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런 밤은 놓치면 후회하겠습니다.”
레오의 말에 또다시 재미를 느낀 건지 글라디오는 이번에는 굵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참 드문 사람이야. 아,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일세.”
“제가 유별나다는 소리는 많이 듣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인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상상은 가주님 자유였지만, 그게 어떤 추측을 불러올진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어렵지 않았다.
“자넨 용병치고는 훌륭히 겸공하고, 그렇다고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경이롭게 야성적이네. 내 비록 선대 가주님들에 비하면 짧은 삶을 살았지만, 자네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지.”
처음 가주님을, 그러니까 전생에 가주을 뵈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평가였다. 전생에는 그저 ‘호기로운 소년이로군.’ 정도의 평가 정도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너무 높게 평가한지라 조금 부끄럽군요.”
“너무 스스로를 낮게 평하지 말게. 내 진심이니 말이지.”
정원의 산책로는 저택의 크기에 비하면 조촐한 규모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저택의 크기에 비하면’이었지만, 이 정원은 여타 저택의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를 내보였다.
“난 처음 이 산책로를 봤을 때, 의아함을 느꼈네. 라인하르트의 위엄과는 조금 거리가 있게 보였거든.”
가주님은 수풀과 수풀 사이의 길로 걸음을 걸어나갔다.
“라인하르트에선 위엄이 없는 걸 찾는 게 더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맞는 말일세. 하지만 이 산책로의 장점은 바로 그곳에 있더군.”
그 산책로를 걸으며 그는 자신의 지론을 꺼내었다.
“알다시피 위엄은 격을 세우기 마련이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게 하고 격조를 만들어.”
그 말에 레오는 동의했다. 종자로서 살면서 그 소년이 제일 먼저 배웠던 것은 검술도, 마나호흡도 아닌, 예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위엄은 때론 사람에게 거짓을 만들기 마련이야. 위선을 만들고, 아부를 지어내지.”
“안타깝지만 정론이군요.”
“그래. 그래서 이 정원은 좋은 것 같네. 적어도 이 장소에선 위엄이 덜 할 테니 긴장도 덜하지 않겠는가?”
“라인하르트의 혜안엔 언제나 탄복하고 있습니다.”
그 라인하르트에서 익힌 예절을 선보이며 레오나르도는 대답했다.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저런 도발에도 대답하지 않는 인내를 만들어줄 정도의 교육이었으니 언제나 탄복할 만도 했다.
“...오늘 한 결투와 연설은 잘 봤네.”
“물의를 일으켰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네는 자네의 목표와 할 일에 충실했을 뿐이야. 사과를 꼭 들어야겠다면 판을 키운 사람에게 들어야겠지.”
그 사람은 라인하르트 가문의 장남이자 등신이었으며 굉장히 장래가 유망할 거라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그건 염두해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난 고민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었지.”
‘처리’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걱정했을지도 몰랐지만, ‘대우’라는 용어에 레오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자네가 이대로 종자로 있게 된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 테지. 강한 인물일수록 높은 직급을 놓는 것이 정당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능력 순으로 자리를 배분하는 건, 적재적소의 기본 원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직급을 주자니 나올 반발이 어렵게만 느껴졌네. 그 직급을 다른 이들이 인정할지도 미지수였고.”
그것 또한 정당한 반론이었다. 레오는 실력 이외에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만큼 공격하기도 쉬웠다는 의미도 되었다.
“마찬가지로 맞는 지적입니다.”
“그렇기에 고민은 깊어졌네. 어느 쪽을 고르든 단점은 확실히 존재했으니까.”
그리고 가주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래서 낸 절충안이 있네.”
“어떤... 안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주님은 레오의 눈을 마주 보며 방도를 말했다.
“레오나르도 군, 아리아의 기사가 되어주게.”
“...호위기사 말입니까?”
예상 외의 제안에 조금 당황한 듯, 고르지 못한 목소리로 레오는 물었다.
“호위기사라... 물론 호위도 해야겠지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그것만이 아니야.”
그는 저택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각도로 봐선 아리아가 자고 있는 방의 창가였다.
“아리아, 아리아스필은 내 딸이지만... 다른 사람하고 많이 달랐지. 특별하다는 말로 끝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범접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분이긴 하시죠.”
“하하, 그렇게 봐주니 내가 다 고맙군.”
웃고는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두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리 단순히 생각하지 않았지. 시기나 질투와 같이 단순한 악의 정도는 귀여울 정도로...”
아리아스필을 질투하고 시기한 사람은 당연히 있었다. 레오도 한때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질투와 시기가 무의미하리만치 경이를 일으켰다.
“...경외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비인 나조차 저런 재능은 무서우니까.”
“원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죠.”
“...하하, 자네는 언제나 여유롭군.”
레오를 보자 그의 어두운 눈빛에 생기가 깃들었다.
“생각해보면 아리아가 변한 건, 자네랑 만난 뒤였어.”
“...검술을 봐주긴 했습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닐세.”
다른 의미를 떠올리는 건 그리 오랜 시간과 많은 생각을 소요시키지 않았다.
“아리아의 눈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어. 살고 있는 시간의... 삶의 밀도 자체가 달랐지. 아마 나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아버지였던 탓일까, 아니면 덕분이었을까.
글라디오는 누구보다 딸의 이질성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레오조차 그녀의 권태로움을 이해하기까지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자네를 만난 뒤로, 아리아가 처음으로 했던 말이 있었네.”
한 소녀의 아버지는 조금 씁쓸하면서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즐겁다고 했네.”
“...즐겁다고요?”
“수련이 즐겁다고 말했어. 그게 정말 즐겁다고 말했지.”
비교하긴 어폐가 있었지만, 레오조차 정말 드물게 들었던 말이었다. 아마 아리아에겐 처음이라 말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희귀한 단어였다.
“그 말에 난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질투를 했어. 내가 여태까지 느꼈던 감정은 그저 장난으로 치부될 정도로 말이야.”
레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보다 앞서 딸을 즐겁게 한 건 누구였을까, 어떻게 딸을 즐겁게 했을까. 정말 그 말 한마디에 갖은 생각이 머리를 채웠지.”
그러기엔 저 가장의 말이 너무나 진솔했기에
“그리고 자네와 식사했을 때,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네.”
레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걸, 질투나지만 자격이 있는 아이였어.”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너무하는군. 거기서 겸손하면 질투한 내가 뭐가 되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레오는 그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은 회귀라는 편법을 사용했으니까.
“그래서 부탁하고 싶네.”
그렇기에 저 평가는...
“아리아의 곁에 있어주게.”
“...”
“무작정 좋은 말만 해주고 이해해줄 필요는 없네. 때때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지적해주고, 옳지 않다고 느끼면 말려주게. 그 일에는 자네가 제일 적합할테지.”
“...그건...”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다양한 관계에서 가능했다. 부모 또는 스승, 아니면 형제... 하지만 레오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건가요?”
건방진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일개 평민의 용병이 용사 가문의 영애와 친구라니, 소설에서조차 허황되다 느껴 사장된 지 오래였던 이야기였다.
“그랬으면 좋겠군. 기사가 되어달라는 말도 그런 의미였네. 아무래도 아리아의 기사가 되어준다면 그러는 게 더 편하겠지.”
“...그렇군요.”
그럼에도
“물론 자네가 거북하다 느낀...”
“하겠습니다.”
그게 망설일 이유는 아니었다.
“...고맙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승낙하는군.”
“...혹시 처음 제가 가주님과 만났을 때, 했던 말이 기억나십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아리아스필 님은 제 목표입니다.”
그게 레오의 목표니까.
“..흐하핫...!”
그 목표는 그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단단히 동메여왔던 긴장의 끈이 풀리듯, 실없는 웃음이 말이다.
“이거 미안하군. 연무장에도 분명 선언했을 텐데, 내가 잊고 있었어.”
“괜찮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고 각인시킬테니까요.”
“안심이 되는군. 마음이 한결 놓여.”
가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군. 너무 늦은 시간까지 불러세웠군. 들어가 봐도 좋네.”
“늦은 시간을 낼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쇼. 가주님.”
레오는 그렇게 말하며 정원 밖을 나가 별채의 숙소로 돌아갔다.
“...후...”
방 안으로 들어간 레오는 얼굴을 쓸어넘겼다. 얼굴에는 땀이 흠뻑 젖어있었는지 물기가 묻어 잡혔다.
“...어?”
그런데도 이상했다. 얼굴에는 미묘한 습기가 남아있었고, 눈가에도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눈 앞에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너 우냐?]
자신은 울고 있었다.
우는 사유는 찾을 수 없었다.
없었기 때문이 아닌, 너무 많았기에.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으...”
전생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를 이기기 위한 노력이,
거기에 바쳤던 삶이,
처음으로 그 가치가 인정받았다.
그 감상에 조금 눈에 물이...
[야 우냐? 울어? 우냐 새꺄?]
고이기도 전에 저 양반이 감상을 유리잔 갈기듯 깨부쉈다.
내 인생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