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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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그림자에서 나타나 리안에게 피가 묻은 손으로 무언가를 바쳤다.
“고생했다. 햄토리 한조.”
피를 닦아 내니 황금색 수탉 모양의 인장이 반짝거렸다.
스랑 제국 시절부터 쓰이던 국가의 상징.
너폴레옹은 원정을 떠날 때 항상 가지고 다녔다.
“수도로 간다.”
이 인장을 수도로 가져가 의식을 치른다면, 스랑의 땅이 리안의 것이 된다.
물론 그 나라의 백성들이 인정하고 따를지 말지는 그다음 문제지만,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인장을 들고 다른 나라로 가 버리면 그만.
몇 년은 괜찮을 거다. 그런데, 10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각종 재해와 질병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인장을 만들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새로운 인장을 만들기 위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땅은 온전히 수복해야 하기에.
“폐하. 여전히 스랑 제국에는 대군이 있습니다.”
“너폴레옹이 없는 스랑 제국군은 그저 겁 많은 수탉일 뿐이다.”
용감하고 자긍심이 높아 보이지만, 반대로 장악하기 힘들다.
이는 단합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쉽게 와해된다.
“천천히 진격한다. 국경에 닿기 전에 스랑 제국에 정보를 뿌린다. 스랑 제국의 대영웅 너폴레옹의 죽음을.”
* * *
스랑 제국은 충격에 빠졌다.
위기에 빠진 스랑 제국의 구세주이자 희망인 너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해 죽었다는 소식이 전국으로 퍼졌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너폴레옹의 죽음이 담긴 사진을 뿌리기만 하면 그만이니.
-이걸 알리는 순간 스랑 제국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스랑 제국 최고 동시에 율 대륙 최고의 언론사인 데빌즈헌터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식을 제국민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올바른 정보는 올바른 판단으로 이어진다.
너폴레옹이 없다면 승리할 수 있을까?
그저 제국에 불리한 정보라면 스스로 정보를 통제했겠지만, 너폴레옹의 죽음은 달랐다.
-우리가 늦는다면 늦어지는 만큼 제국민의 피가 흐를 것이오.
그리하여 너폴레옹의 죽음은 스랑 제국의 각지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를 군부에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언론사란 놈들이 제국을 망치려 드는구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항복을 하잔 말이오?”
리안은 국경으로 이동한 50만 대군을 이끄는 지휘부에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설마 우리 병력이 50만인데 함부로 넘어오겠소?”
“버티다 보면 저쪽에서도 협상을 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힘든 것은 저쪽도 매한가지이니.”
“더군다나 레온 제국의 땅은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으니 통제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를 다독이며 동시에 억눌러야 하는데, 땅이 뭉쳐 있지 않으면 관리하는 것에 에너지가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너폴레옹 황제 폐하의 복수를 합시다!”
“병사들의 사기를 잠깐이나마 높일 수 있겠군.”
수뇌부들은 동상이몽에 빠졌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는 토끼가 왕 노릇을 한다는 것처럼 자신이라고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다들 음흉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누가 총지위를 하는 겁니까?”
“그거야…….”
여기 있는 자들은 고만고만했다.
30만이 넘는 예비대를 나눠 가진 장군들과 겨우 살아 돌아온 너폴레옹의 측근들.
누구 하나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너폴레옹의 2인자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군대를 재편하느라 힘 빼지 말고 각자 휘하에 있는 병력을 가지고 서로 협동하는 걸로 합시다.”
* * *
리안은 적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줬다.
그들은 북쪽에 있는 회랑에 넓게 방어선을 펼쳤다.
리안의 군대가 스랑의 땅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어차피 시간을 끌며 협상을 하려는 것이 스랑 제국의 수뇌부들 생각이었다.
“멍청한 닭대가리들.”
대군을 막기 위해 길목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은 전술이지 전략이 아니다.
군대가 뭉치는 것은 뭉치는 것이 강하기 때문.
그런데, 적들이 뭉친 군대를 상대해 주지 않고 쪼개어 진군한다면?
분산해서 막든가. 각개 격파를 하든가. 오히려 상대국의 땅으로 진격하든가.
매뉴얼로 정해져 있거나 판단을 하고 결단을 내릴 사람이 필요하다.
“전진한다.”
리안은 며칠이나 눌러 있다 본진을 천천히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회랑을 지켜야 하는 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 * *
스랑 제국군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수십만의 기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스랑 제국 들쑤시고 다녔다.
-후… 후방에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수도. 수도가 위험하다! 수도로 간다!
스랑 제국의 모든 군대들이 부랴부랴 수도로 회군했다.
군을 이끄는 모든 장군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놈에게 수도를 내어 줄 수 없다.’
황제의 인장이 없다.
그러니 권력을 잡으려면 수도를 먹어야 한다.
척척척!!
리안이 이끄는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도의 코앞까지 진군했다.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니오!”
“저들은 모두 기병입니다.”
“그냥 수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 좋을 듯싶소.”
스랑 제국의 수도 파리는 군사들로 바글바글했다.
모든 장군들이 수도 안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
그 과정에서 탈영병이 속출해 병력은 반이 날아갔지만, 30만에 가까운 병력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버틸 수 있으리라.
“폐하. 공격합니까?”
“그냥 포위만 해도 됩니다.”
리안은 목 좋은 곳을 골라 막사를 세웠다.
막사 문을 열면 스랑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한눈에 보이는 곳.
그곳에서 음료수를 홀짝이며 시간을 때웠다.
가끔 막사 앞에서 체조도 하며, 심심할 땐 흐리아 민을 데려와 노래도 불렀다.
징징징~!!!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여유가 있는 리안 측 군대는 노래를 들으며 즐겼다. 다만.
“저!! 저!!!”
스랑 제국의 장군들은 리안의 행태를 보며 기가 막혀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놈들이…….”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소.”
“기다립시다. 그러면 물러날 것이오. 저들은 기병이니 공성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군세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척척척!!!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주군. 직접 군을 이끌고 왔나이다.”
잉글슨의 국왕이 된 해리 78,900세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사위. 내가 왔다네. 저 간악한 스랑 놈들에게 심판을!”
이벨 왕국의 국왕도 병력을 이끌고 왔다.
그 외 트리아-헝그에서도 모인 병력들이 합류했다.
마지막으로.
드그그그.
철갑을 두른 다섯 척의 부유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 제국의 수도에서 보내온 것이다.
세기바라 남작의 역작으로 고잉미샤호를 닮아 있었다.
“이제 대충 다 모인 것 같으니 항복을 권하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스랑 제국의 수도를 100만에 가까운 병력이 포위했다.
율 대륙의 역사상 이 정도 병력이 모인 적이 있을까?
그럼에도 스랑 제국의 수뇌부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펑펑펑!!!
항복을 권한 시간이 지나자 고잉미샤호와 그것을 닮은 다섯 척의 부유선들에 달린 함포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앙! 쾅쾅!!!
성벽이 쓸려나갔다.
겨우 몇십 분 만에 성벽이 있던 곳은 평지로 변했다.
펄럭!!
그 위력에 놀란 스랑 제국 측에서 하얀 깃발이 올라왔다.
“꼭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게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와아아아아!!!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100만에 가까운 병력들은 스스로의 강함에 취해 버린 것이다.
“약탈은 금지한다. 제국의 금고를 털어 전리품으로 나눠 줄 것이다.”
이제 스랑 제국의 수도는 리안의 것.
약탈을 하면 복구 비용이 더 들어간다.
차라리 사비와 제국의 금고를 털어 주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리라.
“스랑 제국군을 무장 해제시키세요.”
“알겠습니다. 폐하.”
정예들이 즉시 수도 안으로 진입해 정리를 시작했다.
신호가 올라오자 리안은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시민들은 불안에 떨며 건물 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각 거리는 리안의 병력들로 부산스러웠다.
와아아아아!!!
마치 도시가 자신의 것인 것처럼 리안이 들어오는 것을 환호했다.
리안은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화답했다.
‘이제 대충 끝이군.’
제국의 황궁은 화려했다.
파리 시내가 훤히 보이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 리안에게 잉글슨의 국왕은 자신의 인장을 바쳤다.
그걸 본 이벨 왕국의 국왕은.
‘잉글슨과 스랑 제국 그리고 옛 신센롬 제국의 인장까지 가지게 되었군.’
그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척!
이벨 왕국의 국왕은 리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인장도 바쳤다.
“감사해요. 장인어른.”
“진정한 롬 제국의 황제가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지팡이를 내밀었다.
번쩍!!
황금색 빛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맑았던 하늘이 파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율 대륙 구석구석까지 이 빛이 퍼져 나가리라.
쿵!!
사방으로 흘러갔던 빛이 순간적으로 모이며 리안에게 떨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리안이 눈을 뜨자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번뜩인다.
척척척!!!
그걸 본 모든 이들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몇몇 곳이 비네요.”
“율 대륙의 진정한 지배자의 탄생을 알리겠나이다.”
4개의 열강이 합쳐진 황제에게 감히 누가 복속을 거부하랴.
“루스 제국의 우두머리는 목을 잘라 오도록. 그는 약속을 어겼다.”
“알겠나이다. 폐하.”
100만에 달하던 군세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은 루스 제국을 향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더냐!! 롬 제국의 황제라니!
율 대륙의 대부분 나라들의 인장이 리안의 손에 쥐어진 것을 듣자 루스 제국의 차르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익!! 청야전술이다. 병력이 많아 봐야 소용없다. 100만 대군도 우리 루스 제국의 날씨 앞에선 무릎을 꿇으리라.
그는 수도를 비우고 한 참 후방으로 물러났으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루스 제국을 제외한 율 대륙 전체가 그의 적임을.
방해하는 이가 없으니 보급은 원활했다.
루스 제국의 근처 국가들은 필사적으로 보급을 지원해 줬다.
-하… 항복하겠다. 롬 제국의 폐하께 내 인장을…….
-기회는 끝이 났다. 차르여.
루스 제국이 무너지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모든 국가의 인장이 리안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통일이 끝나면 어떻게 되려나.”
리안은 마지막 남은 인장의 앞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한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 게임 클리어 최소 조건.
혹시 무슨 변수가 발생하기 전에 빨리 조건부터 클리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툭!
리안은 지팡이로 마지막 남은 인장을 복속시켰다.
반짝! 반짝.
하늘에서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보슬비가 내렸다.
겨울임에도 사방에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어올랐다.
“엔딩인가?”
리안은 발코니로 나가 풍경을 감상했다.
와아아아아!!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축복을 받았다.
아픈 이들은 상처가 나았고. 슬픔에 빠진 이들은 마음에 안정되었다.
룸 제국 시절 10년에 한 번씩 황제가 내릴 수 있는 기적.
“이제 돌아가는 건가? 아님 선택지가 뜨나?”
긴장한 리안은 두리번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클리어를 미루고 싶었지만, 변수가 무서워 곧장 의식을 마친 것이다.
“음…….”
“으음…….”
“으으으음…….”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어야 끝나나.”
게임은 주인공 캐릭터가 죽으면 달성한 점수에 맞춰 보상을 준다.
“오오오!!”
이제부터 보너스 삶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제 와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기에 기뻤다.
“도련님!!!”
“깜짝이야.”
황궁을 돌아다니던 샤로트가 비를 맞으며 발코니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실력쯤 되면 창문과 문의 구분이 사라지는 걸까?
갑자기 나타나 놀라긴 했지만, 샤로트는 혹시 모를 암살자가 있지 않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저렇게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신기한 비예요. 도련님께서 하신 거예요?!”
“오랜 전쟁으로 피폐하진 백성들을 위해 힘 좀 썼지. 큼큼!”
리안은 허리에 손을 올렸다.
“역시. 도련님!! 대단해요.”
“그렇지. 대단하지. 이 어려운 것을 내가 해냈지. 이제 세계를 통일시켜 볼까나. 후후훗!”
이왕 이리된 거 죽기 전까지 느긋하게 세계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직접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이제 즐기는 일만 남은 것이다.
.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