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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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이 쓰러지고 다운 백작이 지휘했다.
왜 지휘권을 그에게 넘겼는지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3연대 전진.”
“막기도 버겁습니다.”
“열 보라도 전진시켜야 해. 안 그러면 5연대가 무너진다.”
그의 지휘는 정교했고. 부드러웠다.
병사들은 사기가 높아 그의 명령을 힘겹게라도 따라왔다.
다만, 개개인의 기량 차이가 크다 보니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더는 버티기 힘듭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다운 백작은 악착같이 버텼다.
“대왕! 곧 적들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더 몰아붙이심이.”
“병력을 물린다. 예비대를 동원하라.”
“네?! 어째서…….”
프리들은 주먹을 부들거렸다.
“상처뿐인 승리보다 병력 보존이 더 중요하다.”
분명 교환비는 로이센이 압도적이었다.
히트 앤 런. 신센롬 측이 치고 도망가기를 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기 시작하자 사상자 발생속도가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다만, 로이센의 사상자도 적지는 않았다.
뿌우우우~!
전장에 퇴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이센 군은 퇴각 소리에도 질서 있게 뒤로 물러났다.
다른 군과 확실한 차이였다.
신센롬 군은 뒤로 빠지는 적들에게 달려들 수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각국의 외교관과 기자들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저럴 수가. 진정 저 악마 같은 놈들에게 밀리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밀리지도 않았고. 피해도 강요했습니다.
마포의 활용을 저런 식으로 할 줄은 누가 알았던가.
-이걸로 로이센 왕국은 위기를 겪겠군요.
로이센은 꽤 많은 병력을 잃었다.
신센롬 제국이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지만, 덩치가 달랐다.
로이센 왕국은 소국이고 병력 충원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 정예병이기에 다시 키우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와아아아!!!
전장에 함성으로 가득 찼다.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신센롬 제국의 함성이었다.
로이센 군은 잘 싸웠음에도 묵묵히 전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레온 공작.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만약 똑같은 수준의 병력으로 싸웠다면, 로이센 군은 저리 편안하게 퇴각하진 못했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군요.
사상자 숫자만 보면 신센롬 제국의 패배.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전쟁에선 승리.
리안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꿈을 꾸었다.
아주 기나긴 꿈.
-아오!! 씨바아아. 내가 왜 창잡이야!!
세상은 보랏빛이었고. 땅은 질척거려 기분이 나빴다.
적은 인간이기도. 괴물이기도 했고.
그것들을 상대하느라 상처를 입고 때로는 죽기도 했다.
-아니. 난 죽었다고오오오!!!
외침은 공허했고. 다시 전쟁터로 끌려가 싸워야만 했다.
전투. 전투. 전투.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두둥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부초처럼 어디론가 흘러갔다.
-이제 끝인가…….
정말 지옥 같은 순간순간들이었다.
저 멀리 어떤 여인이 보인다.
번쩍이는 갑옷과 빛나는 검을 든.
그녀가 이쪽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크허허허하화하학!!”
리안은 침대에서 발작을 하듯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어린 여아 한 명과 검은 흑발의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들은 리안이 소리치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서방님이 깨어나떴떠요.”
“전하. 고생하셨습니다.”
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짝 익숙한 풍경. 신센롬 제국 황궁.
몇 번 묵었던 숙소.
“며칠이나 지났죠?”
“보름입니다. 신들의 전장은 어떻게 즐거우셨나요?”
“음?”
전쟁의 신을 모시는 세이나 주교의 입에서 ‘전장’ 이란 단어가 나왔다.
“설마…….”
“몸의 데미지와 후유증을 줄여 주기 위해 탱글 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어쩐지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육체의 부담을 정신이 모두 짊어진 것이다.
“이스터. 이스터 어무니께서도 도와주셨어!”
앙드네드가 세이나를 의식했는지 자기가 모시는 봄의 여신을 어필을 했다.
“두 분 다 감사드려요.”
잠시 후.
철거덕!
밤중임에도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
리안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테레지아 여제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저 나이에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상당한 미모를 뽐냈다.
“사위. 깨어나셨군요. 뭣들 하나 어서 음식을 가져와라.”
그녀는 즉시 명령했고 잠시 뒤 그릇 하나가 올라왔다.
그 안에는 하얀 스튜가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몰라 매일 씨암닭을 한 마리씩 잡고 있었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리안은 웃으며 스튜를 한 술 떴다.
美!美 !
혀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천연 조미료가 회오리치며 혀뿌리까지 당도해 뇌를 때렸다.
보름 만에 넘기는 음식이라 몸이 간절함에 호르몬을 과다 분비시켰다.
달가락. 달가락!!
리안은 쉴 새 없이 숟가락을 놀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릇 바닥까지 싹싹 핥아 먹고는 더 없냐는 눈빛을 보인다.
“아직 소화기가 회복하지 못했기에 과식은 몸에 무리를 준답니다.”
세이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테레지아 여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이 제국을 구한 영웅에게 스튜 한 접시를 더 못 내어 준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아니예요. 나중에 또 먹으면 되죠.”
이번은 꽤 무리를 했으니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할 것 같다.
신센롬 제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 막 깨어난 사위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뭔가 불길하다.
“교황청에서 추기경이 왔어요. 매일 같이 만나게 해 달라며 어찌나 성화인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하니 본인이 직접 치료하겠다고…….”
“걱정 마세요. 제가 물러나게 했으니.”
세이나가 바톤을 터치해 말했다.
대충 예상은 간다.
리안을 보호하기 위해 세이나는 리안의 영혼을 일시적으로 전쟁의 신에게 위탁해 버렸다.
덕분에 창잡이로 열심히 싸워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육체의 후유증은 없었다.
“탱글 님께 전해 주세요. 나는 탱글교의 신도가 아니라고!”
“신도가 된다 해도 걱정 마세요. 신의 곁으로 가게 되면 이번처럼 말단 병사가 되진 않을 거예요.”
농담인지. 진심인지.
저 눈을 보니 왠지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추기경이 내 몸에 손은 못 댔다는 소리네요.”
날이 밝고 리안은 교황청에서 온 곧장 추기경을 만나러 갔다.
이벨 왕국, 스랑 제국, 신센롬 제국에서 교황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리안을 기다리는 동안 추기경은 호의호식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레온 경!!!”
그는 리안을 보자마자 달려와 친한 척을 했다.
‘이 아저씨 왜 이래?’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리안은 교황청에서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이를 갈아도 모자랄 판에.
“성하께서는 평온하신지요.”
“그렇지 못하십니다. 레온 경.”
추기경은 리안에게 꼬박꼬박 경이란 호칭을 썼다.
어찌 되었든 간에 리안은 교황청에서 임명한 명예 성기사였으니.
“혹시. 성하의 건강에 문제라도…….”
“그게 아니라. 그대가 주고 간 이교도들의 성물 때문이라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리안을 찾아온 이유가 그것이었다.
“해전이 있었고. 오스 대제국과 관계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어요. 동방의 교역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답니다.”
리안은 눈을 돌려 식탁으로 향했다.
눈앞의 추기경은 음식에 후추가 눈처럼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 말은 추기경조차 평소 향신료를 아껴 먹어 왔다는 것일 터.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
“힘을 보태 주세요. 경은 명예 성기사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서로 끈끈한 사이인 줄 알겠다.
명예 성기사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던져줘 놓고 말이다.
“음…….”
리안이 고민을 하자 한 중년인이 리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하. 저는 이벨 왕국의 대사입니다.”
“아… 코발 경!!”
“저를 아십니까? 영광이옵니다. 전하.”
개인적으로 본 적이었었던가?
어쨌든 아는 인물이긴 하다.
나름 능력치가 준수하고 호의적인 국가나 인물에 대해선 쓸 만한 조언도 잘해준다.
외교뿐만 아니라 급한 다른 쪽의 일을 시켜도 곧 잘하니 게이머들에겐 2순위 영입 대상이다.
“네. 그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군요.”
“전하께서 로이센 왕국과 싸우는 동안 우리 이벨 왕국의 해군과 이교도들이 한 번 충돌했습니다.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고 퇴각했습니다.”
이벨 왕국은 오스 대제국과의 해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벨 왕국이 원하는 것은 오스 대제국의 영향이 중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남신 대륙과 동남아시아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기에 굳이 중해의 무역에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율 대륙과 오스 대제국 간의 무역로가 끊기면 이벨 왕국은 이득이니.
“다만. 그들이 이번 일로 검은 땅 동부 해안을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땅을 돌아서 아시아와 무역을 하는 여러 나라들이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잉글슨도 문제겠네.’
향신료의 원산지나 다름없는 인디아 왕국에 영향력이 많은 나라가 바로 잉글슨.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신대륙의 함대까지 뺐었다.
문제는 인디양의 해상 패권은 오스 대제국에게 있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이벨 해군과 잉글슨 해군이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앙숙인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
리안의 눈에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방 이해를 했다.
“중해에서 백날 싸워 봐야 반대쪽 바다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니까 그렇군요.”
“영민하십니다. 전하.”
이대로 지속된다면 이벨 왕국은 동남아세아, 잉글슨 왕국은 인디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것도 리안이 개발해 브루타뉴 왕국에서 배포 중인 진토닉을 쓸 적기에 말이다.
“음…….”
리안은 손익을 따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떨어지는 게 별로 없을 텐데…….’
두 나라의 해군 연합을 통솔할 수 있는 기회.
명예는 드높일 수 있겠지만, 실리는 얻기 힘들다.
더군다나 검은 땅을 빙빙 돌아 인디양(인디아 근처의 넓은 바다)으로 가는 것만 3개월 정도가 걸릴 것이다.
“곤란한 상황이네요.”
“전하. 이대로 방치한다면 저들은 동방과 교류할 해양 무역로까지 차단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참지 못한 율 대륙은 결국…….”
2차 대성전을 펼치겠지.
‘그건 곤란한데.’
교황청의 힘이 강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율 대륙의 모든 전쟁은 멈출 것이다.
귀족들에겐 기회가 되겠지만, 리안에게는 별로 이득이 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된다.
“원정 해전은 비용이 많이 들 텐데…….”
“비용은 네르데르 왕국에서도 많이 보탤 예정입니다.”
동남아세아 지역에 네르데르 왕국도 깃발을 꽂은 곳이 조금 된다.
당연히 검은 땅 동부 해안이 오스 대제국에게 완전히 넘어가면 곤란하겠지.
“그냥 그쪽은 줘버리죠.”
리안의 발언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곳을 빼앗기면 우리 율 대륙의 문명이 백 년은 후퇴할 것입니다.”
추기경이 얼굴을 붉히며 성토했다.
‘네가 먹을 향신료가 귀해지겠지.’
아무래도 저 추기경은 향신료 매니아인 것 같다.
아마 교황청에서도 이교도들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했겠지.
그러니 껄끄러운 상대인 리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사절로 임명된 것일 테고.
“적대적인 지역에서의 원정 해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스 대제국이 작정을 하면 함대의 규모가 최소 우리의 두 배가 될 것이고요.”
중해에선 해적을 대제독으로 삼았지만, 저 땅 너머의 바다에선 상당한 수의 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해군이라기보다 상인이었다. 물론 마음먹는 순간 해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레온 경에게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벨과 잉글슨 양국은 함대를 지휘할 인물로 한 명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실력뿐만 아니라. 이벨 왕국의 사위이자 잉글슨이 임명한 공왕이니 더더욱.
“저들의 야욕을 꺾을 만한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 교황청이 그대를 확실히 지원할 것입니다.”
교황청은 어지간히 성물을 넘기고 싶지 않은 모양.
당연할 것이 리안이 넘겨줬던 그 성물은 롱기루스의 창이라는 신의 병기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대피라미드 왕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쇄.
나중에 꽝인 것을 알면 얼마나 허탈할지.
“말로만 지원할 생각인 겁니까?”
“원하시는 것이라도…….”
추기경은 꼬리를 살짝 내렸다.
정말 리안이 아니라면 답도 없는 상황이다.
이러다가 2차 대성전이라도 일어나는 것은 교황청도 상당한 리스크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성물을 지키려다 일어난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