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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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 대륙 서부의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동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가장 핵심이 되는 전장이 바로 로이센과 신센롬 제국의 전쟁이 아닐까 싶다.
노르망의 전투는 그저 사이드 요리랄까.
그래서 리안은 이곳에 남아 뒷정리를 하지 못한다.
“먼저. 노르망 공작령에서 스랑 쪽에 붙었던 귀족들을 족치세요.”
“하긴. 아일리 섬의 귀족들이 이 전쟁에 참여한 이유가 그거니까.”
율 대륙의 땅.
아일리 섬의 귀족들에겐 꿈과 같은 일이다.
본토의 남작령만 얻어도 율 대륙에선 진짜 귀족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네. 적당히 땅을 분배해 주세요. 어렵다 싶으면 레인스타 여백작에게 도움을 받으시구요.”
귀족들의 관계나 정치에 관련해선 리안의 외할아버지인 아트로네 백작보다 오히려 그녀가 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도움을 구하면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이다.
부선장과 결혼해 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것만 하면 되느냐?”
“이번에 새로 편입된 곳의 귀족들의 영주들을 만나 주세요.”
아미앵 공작령 일부와 플랑도르 백국의 귀족들을 말하는 것이다.
말이 알바 왕국의 소속이 된 것이지 그들은 정통 스랑 제국의 귀족들이다.
충성? 턱도 없다.
“그놈들을 만나서 뭘 하게?”
“꼬투리를 잡으세요. 잡을 게 없으면 말투나 태도라도 잡아서 기를 죽여 주세요.”
아무리 해적왕이 해적이라 해도 소드마스터.
일게 소드마스터도 아니고 알바 왕국의 실력자다.
지금 알바 왕국의 병력은 스랑 제국과 승리를 이끈 정예다.
“하하하. 그거참 재미나겠군. 내가 귀족들을 갈굴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콧대 높은 스랑 제국의 귀족들을 말이다.”
“알아서 잘 하시겠네요.”
리안이 미소를 살살 지었다.
“대신 혜택도 좀 주세요.”
“혜택? 그놈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혜택을 준다 해서 우리 쪽에 고마워나 할까?”
리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면 달라지는 건 없어요. 우리도 노력했다는 걸 보여 줄 필요는 있죠.”
“음…….”
해적왕은 무슨 말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백성들의 세금을 30% 깎아 주는 대신. 중앙에 낼 세금 50%를 깎아 준다고 하세요.”
“음? 그럼 저놈들에게 20%를 보존해 주겠다고?”
20%보다 더 보존될 것이다.
지방 영주들이 중앙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세금이 전부가 아니다.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니까요.”
“저놈들은 분명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세금은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줄 세금만 줄일 게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야.”
별별 이상한 세금을 만들어서 쥐어짤 것이다.
영주가 새로 결혼하는 신부와 동침하는 초야권이 있는 곳도 있는 마당에 뭔들 못 만드랴.
물론 무조건 신부를 데려와 동침한다는 것이 아니라 싫으면 돈을 내라 이거다.
“기자들을 대동하세요.”
“그런다고 저놈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일까?”
천만의 말씀.
백성들을 인간이 아닌 가축으로 여기는 귀족들이 허다하다.
“거기다가 우리도 돈이 필요하다. 전쟁터였던 노르망의 땅은 지금 피폐해진 상태야. 복구 비용이 꽤 많이 들 텐데…….”
해적이긴 해도 해적 섬을 다스렸던 해적왕.
이제 노르망이 그가 다스려야 할 곳이 되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걱정 마세요. 돈은 지금도 꾸준히 벌리고 있으니.”
만가 섬.
그것 하나만으로도 복구 비용은 충분히 나왔다.
거기에 잉글슨과 이벨 그리고 스랑제국은 진토닉이 만들어지는 족족 사들이고 있었다.
물론 리안이 파는 것은 아니지만, 브루타뉴 공국에서 리안에게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다.
참고로 진토닉의 상표엔 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따봉을 내밀고 있는 그림이 박혀 있었다.
“허… 거참. 싸우는 데만 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어쨌든 지금은 백성들에게 최대한 점수를 따야 합니다.”
“귀족들이 아니라?”
리안이 이렇게 하는 이유.
“삼 년 안에 최악의 기근이 발생할 겁니다.”
“뭐?! 신의 계시라도 받았더냐? 그걸 어떻게 알아?”
이것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물론 기근이 들지 않아도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은 딱히 손해는 아니다.
“신탁이 아니라. 심각한 기상 이변이 있을 거란 징조들이 있어요. 이건 통계예요.”
“난 말해도 모르겠구나.”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 드는 해적왕.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이단으로 찍힐 수도 있으니.”
“어차피 말해도 안 믿을 거다. 그런데 기근이 드는 것과 백성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군.”
“스랑 제국이 아래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될 겁니다.”
그 말에 해적왕은 잠시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아래에서부터의 붕괴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나 마총이 생겨나서부터는 더더욱…….
“설마…….!!!”
눈치를 챈 모양.
“우리가 아무리 싸 돌아도 일반인이 쏠 수 있는 마총은 유출될 겁니다. 그리고 유행이 되겠죠.”
이번 전쟁으로 전군의 마총무장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줬다.
“물론 마나 유저와 기사들은 여전히 위력적이겠지만, 더 이상 주역은 아니게 될 겁니다.”
“귀족들은 아주 죽을 맛이겠군.”
“이미 스랑 제국에는 상공업의 발달로 신흥 귀족들이 많습니다. 아래에서부터 붕괴가 일어난다고 말은 했지만, 신흥 귀족과 구 귀족의 대립이 심해지며 가속화될 겁니다.”
리안은 일반인도 쏠 수 있는 마총을 스랑 제국에 마구마구 팔 생각이었다.
가상 적국임에도 말이다.
“애초에 스랑 제국은 우리와 싸울 일이 없을 겁니다.”
리안은 그리 말하고는 발코니로 나갔다.
“그럼. 잘 부탁해요.”
“벌써 가는 거냐? 그런데, 아직 네 배가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
고잉미샤호는 여전히 브루타뉴 공국 인근 바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다.
“아. 신센롬 제국에서 보기로 했어요. 지금쯤 떠났을 겁니다.”
“너는??”
“다 수가 있죠.”
그리 말하고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리안의 등에는 호랑나비 날개가 활짝 펴졌다.
펄럭!!
해적왕은 황당한 표정으로 리안이 떠나는 걸 지켜봤다.
“그보다 저놈과 적이 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군.”
상상이나 했던가.
배 한 척으로 해적 섬에 들어와 쩔쩔매던 꼬마 녀석이 스랑 제국과 전쟁을 벌여 이길 줄.
더군다나 자신이 공작이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 * *
신센롬 제국 황궁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연전연패.
병력이 많아도. 유리한 지형에서도. 패배. 패배. 패배.
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들은 진정 전쟁의 신이란 말인가?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지금 스랑 제국의 군대가 게르만 왕국 연합 지역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노르망의 전투가 끝나자 여유가 생긴 스랑 제국의 병력이 동부로 진입했다.
사실 리안이 조금 여유롭게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스랑 제국이 국경에 병력을 빼 둔 것도 있었다.
수도 앞까지 리안이 갔어도 이 병력을 돌리기엔 무리가 있었던 상황.
상황이 좋아지자 곧장 예정대로 신센롬 제국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내 사위는 왜 그 트러블 메이커인 잉글슨의 편에 붙었는지.”
“덕분에 공왕의 자리에 올랐지 않습니까.”
“나도 그에게 공왕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다만 줄 땅이 마땅치않다.
잘해 봐야 헝그의 동쪽 폴란과 국경이 닿은 지역의 땅을 주겠지만, 그곳은 내외부 사정이 딱히 좋지는 않다.
그래도 리안의 능력이라면 어찌 잘 헤쳐 나갔으리라 믿지만, 이미 그 땅을 주기엔 늦어 버렸다.
“문제는 레온 공왕이 앞으로 어찌 나올지인데…….”
“그것참 큰일이구나.”
리안의 명성은 로인센 국왕의 아래까지 올라온 상태다.
예전 리안이 슐 지역에서 그를 물 먹인 적이 있지만, 호사가들은 번외로 쳤다.
다시 말해 프리들 대왕보다 리안을 한 수 아래로 본다는 뜻.
그런데, 그 둘이 적수가 아니라 손을 잡는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것도 없었다.
“곧 우리 아이와도 혼인이 파기되겠지?”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기정사실과도 같은 거였다.
거의 모든 이들이 그리 예상했다.
로이센의 뒤에서 돈줄을 대고 있는 것이 바로 잉글슨의 국왕이었기에.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때 레오폴트가 집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외쳤다.
그의 형이 죽고 이제 황태자가 되었다.
“맞아! 내 남편이 그럴 리가 없어!”
옆에서 앙증맞게 주먹을 내지르며 따라 외치는 앙드네드.
봄의 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아서 그런지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어휴!!”
여제 테레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았다. 그때.
“여제이시여!!!”
첩보부 소속의 전령이 달려들어 왔다.
노크와 같은 기척도 없이 집무실에 뛰쳐 들어온 것을 보니 중대한 소식 같았다.
“무슨 일이라더냐?”
“졌습니다. 스랑 제국의 군대가 프리들 대왕의 군대에 대패하여 후퇴하였습니다.”
로이센 왕국의 군대는 부지런하게도 전장을 빨빨 돌아다니며 신센롬 제국의 군대와 동맹군들을 각개격파하고 다녔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로이센이 전쟁에서 패배할 거라 점치는 자들이 많았다.
군대가 약하기보다 규모의 문제였다.
그런데, 프리들 대왕은 이것을 각개격파로 해결했다.
“스랑 제국을 이끌던 장군이 프리들 왕의 군대를 평가하길…….”
“그자는 뭐라 변명을 하던가.”
[나는 이제껏 이런 전쟁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반칙이다.]
첩보부 전령의 말을 들은 여제는 그대로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다.
“폐하!!”
“어머니!!”
신하와 레오폴트가 달려가 부축했다.
“오모니. 아프지 마요. 제가 잘못했쪄요.”
앙드네드도 아장아장 여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꼭 붙잡고 신성력을 썼다.
방 안에 봄의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고맙구나. 내 사랑하는 아이야.”
마음의 평정을 조금 찾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되진 않았다.
프리들 왕이 죽기 전까진 말이다.
“전하!!!”
그때 또 다른 첩보부 전령이 달려왔다.
이제는 저 첩보부 직원들이 올 때마다 겁이 났다.
또 무슨 소식을 가져 왔을지.
“부마께서… 아니. 레온 공왕께서 오셨습니다.”
“……???!”
다들 소식을 가져온 전령을 바라봤다.
“군대를 이끌고 왔다던가? 프리들 그놈과 함께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겠지? 파혼 소식은?”
그런데 그 전령 뒤로 한 소년이 걸어왔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못알아 볼 뻔했다.
이제 청년의 느낌이 조금 나기도 했으니.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파혼이라니요.”
“그… 그대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폐하. 아니 장모님.”
“어… 어어어……!!!”
여제의 옆에 있던 레오폴트는 눈을 끔뻑거렸다.
“정말. 정말. 레온 백작… 아니 레온 공왕입니까?”
“오. 많이 변하셨네요. 황태자 전하.”
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젠장. 저건 반칙이잖아.’
솔직히 리안 본인도 미소년으로 잘 컸다 싶었는데, 레오폴트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을 접어야했다.
오징어까지는 아니지만, 좀 비교가 되긴 했다.
선크림을 바르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10년만 기다려라!!’
괜히 경쟁심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정말. 늠름해지셨습니다. 레온 공왕님.”
“큼. 황태자 전하도요.”
괜히 심통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저리 친근하게 맞이해 주니 적당히 풀었다.
“그보다 어찌 된 일입니까? 레온 공왕.”
테레지아가 레온에게 다가왔다.
“미모는 여전하십니다. 장모님.”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진지합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아니… 선물은 나중에…….”
“피부에 좋은 겁니다.”
리안의 말에.
“큼… 고마워요. 사위.”
“사위가 왔는데, 씨암탉 잡아 주셔야죠. 장모님.”
“……???”
“어느 나라에선 사위가 오면 장모님이 씨암탉을 잡아 준다더라구요.”
“그런가요? 내 궁중 요리사에게 즉시 준비하라 해야겠네요.”
그렇게 어벙벙하게 모두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리안은 그런 속도 마음도 모르고 앙드네드와 장난치기 바빴다.
꺄르르르~
뭐가 그리 좋은지 앙드네드는 리안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웃었다.
레오폴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것이지?’
다만, 국가를 책임져야 하는 여제의 입장에선 마냥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직접 파혼을 전달하러 온 것인가?’
그리되면 이곳은 적진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홀로 저리 당당하게 온 것을 보면 보통 배포는 아니다.
물론 신센롬 제국에선 리안이 파혼을 선언한다 해도 체면상 감금 따위는 할 수 없다.
“오~ 역시! 신센롬 제국의 궁전 요리사! 냄새부터가 다르네요.”
리안은 음식이 나오자 예법이고 뭐고 닭 다리를 잡아 뜯었다.
시간을 맞춰 오느라 무리를 했기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했다.
“사위. 이제 말해 보세요. 나는 마음에 준비가 되었답니다.”
“네? 알고 계셨나요?”
리안은 식탁 위에 스랑 제국의 신문 하나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