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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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은 잽싸게 뛰어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갑자기 눈앞에 허공에서 나타난 리안을 보며 화들짝 놀라는 공왕.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 항상 주군의 건강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어··· 엇. 레온 경. 바람 속성이었소······?”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보다 이 척박한 곳까진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그대를 보러 왔다네.”
그 말을 들은 리안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게을러터진 공왕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황제가 보냈구나.’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전하. 먼 길을 오셨는데, 숨을 돌리시지요.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무려 공왕이 방문했단 소리에 꽤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래 봐야 훈련을 받지 않는 고잉미샤호의 선원과 해적 섬의 난민이 전부였지만.
“큼. 내 체통머리가 없었네. 미안하게 되었어.”
모두 리안의 사람들.
소문이 새어 나갈 일이 없으니 사실 채면 따위는 차릴 필요도 없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개성이 강한 자들이라.”
반은 거짓이다.
개성이 강한 것은 맞지만, 리안에 대한 충성심은 확실하다.
“자네도 참으로 고생이 많겠어.”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는 법.
지금 공왕은 부하 격인 리안 때문에 골머리를 안고 있듯이 리안도 유능한 부하들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럴 것이 이 좁은 섬에 이미 백작만 둘이었다.
배경도 없는 자에게 백작 위를 줄 정도라면 엄청난 능력자란 말.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전하.”
리안은 손바닥을 살살 비비며 앞장섰다.
“크흠. 알겠네.”
공왕이 올 줄 알았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출발을 할걸 그랬다.
아무리 청산할 것 다한 상위 귀족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명목상은 주군에 해당된다.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
‘대충. 노르망 땅과 공주로 협상을 하겠네.’
권력자들의 최종 아이템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략결혼이다.
뭔가 실질적으로 딸려 가지 않아도 되지만, 면은 세울 수 있는. 그러면서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는 것.
물론 스랑 제국의 정비에게서 나온 공주라면 괘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겠지만.
“섬이 생각보다 넓구만.”
“산책이 너무 짧으면 아쉽지 않겠습니까. 남작령이란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큼. 눈치가 없었구만.”
걷는 게 상당히 귀찮았지만, 그래도 어울려 주기로 했다.
지금 아쉬운 것은 공왕이니.
“저기 보이십니까?”
“오··· 마치 지옥의 바다와 연결된 것 같으이.”
공왕도 살짝은 흥미를 보였다.
그럴 것이 섬 주변의 일부는 하수구에 물이 빨려 들어가듯 힘차게 회오리치고 있었기 때문.
저 근처만 가도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을 줬다.
“전하. 여기서 잠시 한잔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음? 여기서 말인가?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공왕이 유일하게 부지런할 땐 관광지에서 휴양을 할 때다.
어찌 보면 이런 풍경은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
안전한 곳에서 두려운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나름 희열이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건 노예들의 검투 경기에 귀족들이 환장을 하는 것일지도.
“여기 전하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리안이 급히 건넨 술은.
“이건 진이 아닌가?!”
리안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공왕이었지만, 상당히 불쾌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숙성도 시킬 필요 없는 값싼 원료로 만든 술.
“브루타뉴 공국산입니다. 저는 항상 고향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가지고 다니지요. 제게는 최고의 술입니다.”
“크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경쟁력이 있는 술이기도 하지요.”
“이따위··· 큼. 자네가 좋아하는 술이라니. 뭐.”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살살 비볐다.
“무려 우리 공국의 수출 중 10% 이상을 차지하는 술입니다. 값싼 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지요. 진 만큼은 우리 브루타뉴 공국이 율 대륙 최고입니다.”
“그··· 그런가?”
“진 매니아들은 우리 브루타뉴의 진을 최고로 친답니다. 일반 백성들도 조금 더 값을 치러서라도 값싼 럼 대신 우리 지역의 진을 찾지요.”
브루타뉴 공국은 구석에 박힌 반도임에도 침략을 많이 당했다.
착취 또는 전쟁으로 빈곤의 연속.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값싼 식료를 먹을 만하게 만드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고 하나.
삼겹살, 돼지 껍데기, 족발처럼.
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란 말인가?”
아니. 일국의 공왕이라는 자가 자기 나라의 특산품에 대해 이렇게 무지한지는 몰랐다.
물론. 행정 능력은 있었다.
왜 인기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 수출품의 공급을 유지 향상하기 위해 조금은 신경을 써 왔으니까.
“자. 다시 저길 보십시오. 전하.”
리안은 손으로 거친 여울을 가리켰다.
“음?”
거친 파도.
“이곳은 제 영지입니다. 전하. 그 어떤 열강도 제 허락 없이는 지나갈 수 없지요.”
“좋겠구만.”
“네. 좋습니다. 전하도 좋아하셔야지요. 제 본질은 브루타뉴의 귀족이니.”
“아······.”
“브루타뉴의 상선들은 이곳을 지날 때 관세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대륙에서 특히 우리 진의 수요가 많지요.”
오히려 신대륙에서 진이 고급 술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값싼 럼을 하도 많이 먹다 보니 다른 술이 먹고 싶은 게다.
거의 동급인 진에 웃돈을 얹어서라도.
“아···! 그런데··· 정말 이 섬을 우리가 지킬 수 있겠는가?”
공왕은 네가 아니라 우리라 했다.
이곳의 관세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통행세는 리안의 것이라 해도 브루타뉴 공국에서 나는 진들에 대한 세금은 공왕의 주머니에 들어온다는 말.
공왕의 머리는 핑핑 돌았다.
그는 행정적으로 무능하지 않으니.
‘우리 브루타뉴 공국에서 나는 진을 모두 수출하고. 값싼 럼을 들여와 판다면?’
공왕 입장에선 이중으로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민간의 술이 없어서 오히려 수입을 하게 되고. 그것은 관세를 붙이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다.
쌀농사를 짓는 데 쌀이 비싼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니.
쌀을 팔고 밀을 수입하면 된다는 개념.
“그에 관한 것은 만가 남작을 만나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데려오겠나이다.”
“어서 데려와 주게나.”
리안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난 뒤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런데, 저 날개는 뭐지?”
“바람 속성 유저들이 오랫동안 비행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걸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 중에 가장 효율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비서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줬다.
“레온 후작도 참으로 부지런하군.”
“그러니 율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끄덕끄덕.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리안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진 공왕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것을 던지자 조금은 호의적으로 시선이 변했다.
샤아아아!!
리안은 급히 베츠를 찾았다.
“으엇! 도련님!”
숲 가운데에 있는 베츠의 집무실? 그곳에 중심에 뚝 하니 떨어졌다.
“아. 방해해서 미안.”
그곳에는 세 남매가 음료와 차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주 화기애애했다.
“아닙니다. 저희 남매의 보금자리를 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은혜를 갚지 못할 것이죠.”
장녀 베아티에가 정중하게 말했다.
자신의 막냇동생이 무려 남작위를 받았다.
물론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영지와 상관없이 귀족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원래라면 꿈도 못 꿀일.
그녀는 아일리 섬 백작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녀였으니 더욱 울컥했다.
아마도 이 섬의 가치가 백작령 이상인 것을 안다면 재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능력이 있으니 그런 거야. 너희 형제가 아니라면 만가 나무를 누구에게 맡겨.”
기후가 맞으면 열매는 맺힌다.
다만, 수율은 또 다른 문제.
식물을 관찰하고 그에 따른 조치를 곧바로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가 나무는 식물이 아니라 동물 아니 곤충이라 불러도 될 만큼 괴랄한 성장을 했다.
그러니 식물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절대 키울 수 없다.
데롱데룽~~
그 와중에 리안이 뚫고 들어온 자리에 열매들이 흔들렸다.
요 근래에 열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눈에 보인다.
“대단하구나. 열매가 많아졌어. 드루이드의 비술을 배우는 속도가 빠르네.”
“그게··· 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러고 보니 독왕 남매 모두에게서 요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익숙한.
겪어 본 그.
“셋. 모두······.”
“죄송합니다. 도련님.”
장녀 베아티에가 바닥에 엎드렸다.
드루이드의 서를 막내 베츠에게 주었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리안이 하사한 것.
아무렇지 않게 보일지라도 어떻게 보면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기사가 주군을 섬겨 검술을 하사받는다면, 그 검술은 형제에게도 전수되어선 안 된다.
자식에게도 주군의 허락을 받아야만 전수가 가능하다.
당연히 그 자식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배울 수 있다.
그런 개념을 알기에 베아티에는 이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하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장녀를 따라 독왕 베지미르도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베츠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조금은 억울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용서해주세요. 흑··· 사실. 누님이 독해 능력이 좋다 보니······.”
아직 어린 꼬맹이들이었다.
리안도 어린아이지만, 속에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만약 직장이었다면, 묻기 전에 변명을 말하는 것이 마이너스일지 몰라도 아직 어린아이들이 이러니 오히려 귀여웠다.
마음 같아서는 정수리를 깨물어 주고 싶다고 해야 하나.
더군다나 세 명 모두 변명보단 잘못을 뉘우치는 분위기.
아마 막내 배츠도 혼자였다면, 변명이 아니라 울고 불며 사죄만 했을 듯싶다.
착한 아이들이다.
“아아.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그 책은 베츠에게 준 게 아니라 너희 형제에게 준 거야.”
“······??”
리안은 베츠를 꽉 껴안고 정수리에 이빨을 박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동안 잘 생각해 봐. 내가 누구에게 특정해서 일을 시킨 적이 있어?”
잘 생각해보면 그랬다.
리안이 일을 시키면 셋이 힘을 합쳐 했었다.
“베츠에게 남작위를 줬지만, 솔직히 말하면 장녀에게 줘야 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섬에 머무르는 시간은 아무래도 막내가 많을 것 같아서 베츠에게 남작위를 준 거야. 그러니 다들 그만 뚝!”
힘을 주어 말하니 다들 강아지처럼 눈물을 닦고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멍멍 할 것처럼 보였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애들은 애들이었다.
“자. 다들 앉아. 앉아.”
리안은 아이들을 앉힌 뒤 테이블에 있는 과자들을 입에 쏙쏙 집어 넣어 줬다.
“아··· 이럴 줄 알았음. 베아티에에게 남작위를 줄 걸 그랬나······.”
“네에?”
“지금 공왕님을 뵈러 가야 하거든.”
“아······.”
세 남매 중 베아티에의 기운이 가장 낮았다.
드루이드에 관한 이해도는 가장 높았지만, 재능 자체는 가장 아래인 듯싶었다.
“너희 어디까지 진도를 뺐지?”
뭔가 보여 주긴 해야겠지만, 베츠가 하면 재롱잔치밖에 안 될 것 같다.
방금 전에도 봤듯이 베츠는 공왕 앞에 가면 잔뜩 얼어 버벅거릴지도 모른다.
우리 자식이 똑똑한데, 남들 앞에선 잘 못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최소한 5장 정도는 되어야 오란 소리가 나올지도······.
“3장까진······.”
‘세바스 아저씨에게 부탁해야 하나?’
공왕에게 쇼를 하기엔 부족······.
“누님과 형님이 힘을 합하면 7장까진······.”
“오오오!!”
형제는 위대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베츠. 내 말 잘들······.”
리안이 다시 공왕에게 돌아갔을 땐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오! 레온 후작! 그래 만가 남작은 어디에 있는가?”
살짝 알딸딸한 공왕을 보게 되었다.
눈의 초점이 살짝 맞지 않았다.
“아아. 내가 너무 앞서갔구먼. 자자. 그보다. 일단 한 잔 받게나.”
“저··· 그게······.”
리안에게 잔을 권하는 공왕.
‘시부레랄. 나 미성년자라고!!’
솔직히 그런 개념 따위는 없는 세계다.
특히 아까 전 즐겨 마시는 술이 진이라며 자주 먹는 것처럼 말했다.
‘어릴 때 술 먹으면 해롭다고!’
술과 키에 관한 연관성에 대해 알진 못하지만, 리안의 전생에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아주··· 아주··· 살짝··· 있었기에 뭐든 피하고 싶었다.
“내 이전에 어주를 주지 않은 것이 미안하네. 내가 무심했어.”
공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병을 잡았다.
낭패다.
만약 허수아비 왕이라 할지라도 이런 건 거절해선 안 된다.
절대 충성적인 부하들 앞이라 더더욱 그랬다.
내가 위를 존중하지 않는데, 아래가 나를 위를 존중하겠느냐.
너희도 보고 따라 해라?? 이런 느낌이랄까.
현대인의 감성으로 이해하면 머리만 아픈 그런 상황.
“소신 술을 좋아하나 잘하지는 못합니다. 딱 한 잔만 받겠습니다.”
“그래그래. 술은 먹어야 느는 것이니 경은 아직 어리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공왕은 동네 아저씨처럼 허허실실했다.
이런 성격인 줄 알았다면, 처음에 압박이 아니라 유화적으로 나갈 걸 그랬다.
게임과 현실의 미묘한 괴리라 할까.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까?’
공왕은 딱히 욕심이 없다.
딱 자신의 자리. 아니 그보다 아래라도 좋다.
놀고 즐길 수 있다면 마냥 좋은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행정적으로 능력이 좋아 전대의 픽을 받아 공왕이 된 케이스.
“전하. 만가 남작이 전하께 충성 맹세를 하겠다고 합니다.”
“으음? 정말인가?”
순진하게 이딴 말을 믿을 권력자는 없다.
다만, 문서는 믿는다.
열렬히 지지한다는 증거를 남기기 마련이니.
“어··· 그런데, 정말 저 아이··· 아니. 어린··· 아니······.”
버벅거리는 공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