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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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버스럽게 외친다.
“어서 오게나. 레온 후작!”
작위적이기 짝이 없다.
리안은 저 인간이 왜 저러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것이 이 자리에 다른 공후작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런 행위는 국왕이라는 후광을 이용해 리안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주는 짓.
아무런 이득 없이 국왕이 저럴 리가 없다.
‘뭔 일이 터졌나 보네······.’
리안은 머리를 살살 굴렸다.
지금 잉글슨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면······.
‘세포이 항쟁!’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졌다.
원래라면 조금 더 이후에 일어날 그러니까 다음 국왕 때에서나 문제가 된다.
‘오스 대제국에서 손을 썼나 보네.’
세포이란 말은 오스 제국의 말로 용병이라는 뜻.
오스 제국보다 더 동쪽에 인디아가 있다.
작은 잉글슨 왕국이 멀리 떨어진 그 커다란 땅을 통제하는 수단 방법으로 쓴 것이 동인도 회사를 세워서 용병들을 활용했다.
그런데, 그 용병들이 봉기를 한 것이다.
잉글슨 입장에선 아주 총체적 난국이 된 것.
‘그럼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설마 나를 인디아로 보낼 생각인가?’
참고로 잉글슨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간접 통치에서 직접 통치로 바꾼다.
다시 말해 인디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잉글슨 국왕이 가져 버리게 되고. 이로써 잉글슨 왕국은 잉글슨 제국이 되게 된다.
타박타박. 휘릭~
일단 리안은 껄렁하고 이상한 조합의 부하들을 대동한 채 대전의 중앙으로 대충 걸어간 뒤 코트를 휘날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땅을 받지 않아서 봉신은 아니다만, 일단은 잉글슨 국왕에게 고위 작위를 받은 몸이니. 대충은 부하 느낌이니까.
“신 레온 후작. 국왕 전하께서 맡기신 일을 처리하고 왔나이다. 일을 마쳤으니 아일리 섬의 총지휘관에 대한 권리를 반납하러 왔습니다.”
리안이 국왕에서 받았었던 양피지를 두 손으로 공손히 모아 위쪽으로 받쳤다.
국왕의 시종은 쪼르르 다가와 그 양피지를 대신 받았다.
‘도대체가······.’
대전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지켜봤지만, 어린 시종은 이 상황이 이상해 보였다.
도대체 이 소년은 무엇일까?
그가 대동한 부하들을 꼴은 또 저게 뭐고.
오랜 시간 궁전에서 지내 왔기에 귀족들이 품위에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안다.
그래. 본인도 눈앞의 자기보다 어린 소년이 한 일을 듣긴 했다.
대단했고 소름도 돋았다.
그럼에도 막상 직접 보니··· 실망이랄까. 충격이랄까.
‘마치··· 서커스 단원들 같잖아.’
일단 리안의 복식부터 당혹스럽다.
맞지도 않는 커다란 해적 모자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코트. 아마도 스랑 제국의 영관급 군복으로 추정.
안에 입은 옷은 항해 때 편하게 입기 위한 작업복에 가까웠다.
‘거기다 여자아이는 왜?’
붉은 머리에 시녀복? 도대체 이런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시녀라니.
거기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검은 로브를 쓴 검은 머리의 소녀. 자기가 무슨 사제라도 되는 걸까? 애초에 사제는 국왕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거기에 앞섬을 풀어 헤친 커다란 덩치의 남자.
눈이 마주치니 씩 하고 웃는 데 앞니가 없다.
그 옆에는 요리사?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도대체 저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은 부하들을 왜 데려온 걸까?
이럴 거면 홀로 대전에 들어오면 되는 것 아닌가?
“크흠.”
그때 국왕이 작게 기침을 했다.
참고로 양피지는 총 두 개.
하나는 잉글슨 왕국을 상징하는 끈으로 잘 묶여 있는 걸 보아 국왕이 레온 후작에게 내렸다는 그것인 것 같고. 다른 하나는 금실로 묶여 있는 걸 봐서 국왕에게 바치는 것으로 보인다.
토다다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시종은 자신이 시간을 너무 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급하지 않고 경박스럽지 않게 최대한 격식을 차린 발걸음으로 국왕에게 양피지를 전달했다.
“전하. 신. 전하께 급히 오느라 평소의 차림인 것을 사죄드리옵니다.”
“아니네. 아니야. 우리가 언제부터 저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놈들의 법도를 따랐다고. 우리 잉글슨은 능력 있는 사람을 중히 여기는 나라일세~! 바쁘다 보면 옷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하긴. 그러니 원래 스토리에서 해적 여왕 샤로트가 대제독이 된 것이겠지.
맛탱이가 좀 간 것처럼 보이려고 고의로 이렇게 입고 들어왔는데, 호의적이어도 너무 호의적이었다.
“그렇군. 후작 자네가 왜 서둘렀는지 알 것 같구만.”
금실로 묶인 양피지를 열어 본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있는 자들이 대리 수령할 자들인가?”
“워낙 아일리 섬의 사정이 급박하여 이렇게 급히 찾아왔나이다.”
“그래. 무려 백작 넷이 반기를 든 것이니. 그럴 만하지. 국왕인 내가 정리를 해 주지 않는다면 더 혼란스러워지겠어.”
최소한 백작령 네다섯 개가 모여야 공작령이라지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작령 하나가 반기를 들어도 머리가 아픈 것이 봉건제다.
땅에서 나오는 힘이란 그런 것이다.
“보자. 여기 적힌 네 명에게 권한을 내리겠다.”
부선장, 세바스 그리고 리안의 두 사촌 형들.
“전하!”
그때 귀족 하나가 급히 국왕을 불렀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국왕이 아주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로 그냥 해 주려고?’
부선장의 경우는 미리 영지전을 허락을 받은 상태다.
그러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도, 데스몬드가 문제다.
왜 문제냐고? 그 땅을 리안의 부하로 추정되는 자에게 주는 것이니까.
그 외에 두 사촌 형제들도 나란히 땅 하나씩을 가진다.
그 중심에는 리안이 있게 되는 것이고.
“이리되면 아트로네 백작가의 후계 자리가 공석이 되는군. 짐과 잉글슨 왕국은 아트로네 백작가의 후계 문제에 조금도 관여할 생각이 없음을 미리 말해 두지. 난 레온 후작 그대를 열렬히 지지하는 바이네.”
그 또한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섯 개의 백작가가 리안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네 개의 백작가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후폭풍도 장난이 아니거늘··· 다섯 개라면?
그럼에도 국왕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타국의 귀족인 제게 이렇게 온정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 또 감사드리옵니다. 만수무강하소서. 전하.”
국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리 수령자들은 앞으로 나오게.”
리안의 부하들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반지를 가져와라.”
국왕이 명령을 내리자 시종이 자리에서 사라진 뒤 잠시 후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 상자 안에는 잉글슨 문장이 반짝이는 조금은 투박한 네 개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정식 작위가 내려지기 전까지 이 반지가 나의 의지를 대변해 줄 것이다. 그대들은 돌아가 전달하라. 최선을 다해 영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돌보라고.”
그러며 반지를 한 명, 한 명에게 끼워 주었다.
왜 이런 것이 필요할까?
백작령은 결코 작은 크기의 땅이 아니다.
그 안에도 온갖 군상들의 이권이 끼어 있었고. 그들을 통제해야 한다.
내부 사정도 사정이지만, 외부의 사정도 존재한다.
각 귀족들 간 교류도 있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 상단 그리고 귀족들.
그 땅을 지배할 군사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된다.
지금 당장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 땅의 주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보통은 귀족의 정통성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지만, 이번처럼 갑자기 붕 뜬 영지가 생겼을 경우에는 그들이 속한 진정한 지배자인 국왕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애네들 진짜배기니까 의심하지 말고. 그냥 다른 귀족들처럼 교류하거나 거래를 해라.
대충 이런 뜻이다.
특히나 상인들과 안심하고 신용 거래를 할 수 있게 숨통을 틔워 준 것.
반란으로 영지의 경제가 개판이 났을 테니.
짝짝짝짝!!
지켜보던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국왕의 지지뿐만 아니라 잉글슨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도대체 뭐야?’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리안 본인.
그만큼 잉글슨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고. 리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레온 후작.”
“네. 전하. 하명 하시옵소서.”
리안은 해적모를 고쳐 쓰며 고개를 들었다.
“혹. 북신대륙에 좀 다녀와 줄 수 있겠는가?”
‘아아. 그렇구나!’
인디아는 해군보다 육군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리안 자신이 아무리 능력을 증명해 보였지만, 혼자 가서 뭘 하겠는가.
‘북신대륙의 함대가 인디아로 빠졌나 보네.’
참고로 대규모 함대가 필요한 것은 교두보 확보와 병력 수송을 위해서일 것이다.
잉글슨이 패권의 지고 있는 북신대륙의 공백.
함대를 잠깐만 돌린다고 했는데, 그 공백을 스랑 제국이 제대로 파고든 모양이다.
‘잘하면 북신대륙의 아래쪽도 내가 먹을 수 있겠는데?’
리안이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사실 리안도 필요한 것이 육군이었다.
북신대륙의 잉글슨 병력을 잠시나마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게 무엇을 바라옵니까? 전하.”
“지원을 해 줄 터이니 잠깐만 스랑 제국의 함대를 묶어 주었으면 하네. 그리고 그대는 해적왕과 사이가 각별하다고 들었다네. 그가 직접 가지 않는다 해도 배라도 좀 빌려서······.”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살짝 끝을 뭉뚱그리는 국왕.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
잉글슨은 해적왕에게 이전 해전에 대한 대금도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사정이다.
“내 최대한 자금을 지원하겠네.”
리안은 이 자리에서 덩실덩실 브레이크 댄스라도 추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공돈도 챙길 수 있는 기회다.
해적왕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 돈은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닌가.
“아쉽지만 전하. 해적왕은 제게 진 빚을 이번에 다 갚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이전 해전의 부상으로 몸이 좋지 않은 상태라 원항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거 아쉽게 되었군.”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전하. 신대륙과의 무역은 아일리 섬에도 중요한 땅이니 결코 스랑 제국이 설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나이다.”
리안이 자신 있게 말했다.
다만, 그 말에 약간의 뼈가 박혀 있었다.
아일리 섬과 잉글슨 사이에 선이 그인 느낌이랄까?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어 아일리 섬 쪽에 마음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리안의 외조부가 아일리 귀족이니. 그런데, 애초에 아일리 섬도 잉글슨이지 않은가.
그런데, 굳이 콕 찝어 아일리 섬이라 언급했다.
누가 보면 자기가 그 땅의 공왕이라도 되는 것인 양 말이다.
“참으로 든든하다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게. 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터이니.”
“감사합니다. 전하!”
그 이후 별 영양가 없는 말이 오고 갔다.
웃긴 것은 거기에 다른 귀족들도 합세해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까지 연출되었다.
애초에 고위급 귀족들이 이렇게 모여 대전 회의를 했던 이유가 북신대륙과 인디아의 문제 때문이지 않은가.
그런데, 리안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인디아는 빠르게 수습될 것이다.
리안이 북신대륙에 있는 스랑 제국의 식민지 함대의 발목을 조금만 잡아준다면 말이다.
잉글슨에게는 단지 시간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보다 정말 그 꼬마 놈이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해적왕에게 배를 빌리겠지.
-국왕 전하가 돈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지금 의회도 예산이 없어서··· 설마 전하의 사재를······.
-에이. 지금 국왕 전하도 개털일 거야.
-어떻게 싹싹 긁어서······.
-없는 바닥을 긁어 봐야 먼지밖에 더 나오겠는가?
귀족들은 뒤풀이에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했다.
-아마 만족스러운 돈은 안 나올 거야. 해적왕의 인정에 기대야겠지.
-그래도 그렇게 모은 배로 스랑 제국의 식민지 함대와 맞설 수 있을까요?
-힘들겠지. 그런데, 우린 레온 후작이 이기든 지든 그딴 건 상관없어. 인디아로 간 함대가 돌아갈 시간만 벌면 되는 거니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레온 후작이 보여 준 능력이 있다지만, 이것은 거의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일을 누구도 맡고 싶지 않았다.
국가도 걱정이지만, 잘못하다가는 가문이 패가망신하게 될 것이니.
-그저 우리의 짐을 대신 들어 준 그 어린 꼬마 후작에게 감사를 하자고.
-그 아이를 위해 건배를!
귀족들은 포도주 잔을 높게 들었다.
그들의 어깨는 매우 가벼워 보였다.
대전에서 리안에 대해 호의적인 눈빛을 보낸 이유가 이것이었다.
“전하! 어쩌시려고.”
신하들과는 달리 국왕과 그 측근들은 조금 안색이 어두웠다.
“뭐가 말인가?”
“진짜로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좋은 것이 아닌가.”
“그가 가지는 아일리 섬의 영향력은 지금도 무시하기 힘듭니다.”
오늘 왕이 제대로 힘을 실어 준 꼴이니.
누워서 침을 뱉는 형국이랄까.
“뭐. 어찌어찌. 스랑의 식민지 함대의 발만 묶어 주면··· 공왕이라도 시켜 줘야지.”
“하··· 그러다 독립한다고 하면 어쩝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네. 아일리 섬은 우리 잉글슨에게 중요한 땅이지. 값싼 식료품과 값싼 노동력까지 제공받을 수 있으니. 그런데. 신대륙과 인디아만큼 중요할까?”
물론 거리가 있다 보니 통치하려면 그만큼의 비용이 발생하지만··· 땅 크기로 보나 거기서 나오는 물산으로 보나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
국왕을 알현하고 나온 리안은 아주 위풍당당했다.
왕이 직접 궁전의 입구까지 나와 리안을 배웅하였으니 그 모습을 일부 일반 시민들도 보았다.
‘거참. 바쁘실 건데. 이렇게나. 흐흐흐.’
리안이 아일리 섬에 국왕의 반지 네 개를 전달하는 동안 국왕도 리안을 지원하기 위해 바쁠 것이다.
국왕이 이렇게 움직인 것은 내일 신문 1면에 날 것이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국왕은 아주 평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심시키려는 거겠지.’
인디아와 북신대륙.
잉글슨 왕국의 부는 그 두 곳에서 모두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에 떠는 자들이 많이 있을 거다.
‘영웅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면, 뭐. 영웅이 되어야지.’
리안은 왔던 길을 쭉 따라 천천히 오토호스를 몰았다.
벌써 냄새를 맡았는지 기자들이 은밀히 따라붙었다.
“와~ 무섭네.”
“도련님. 혼쭐을 내고 올까요?”
“됐어. 그보다 다들 어깨를 좀 더 펴라고!”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정보력이 좋은 기자들이 더 붙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진을 찍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팔에 CBB라고 적힌 안장을 찬 기자가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브이~”
리안은 그를 보며 활짝 웃어 V자로 손가락을 만들어 보였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