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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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이 이끄는 부대는 빙빙 돌아서 토몬드 백작의 측면을 잡았다.
잘 사용되지 않는 길이었는데, 이유가 다 있었다.
길도 험하거니와 대규모 부대가 이동하는데 제악이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 시 불리한 포지션이다.
시야도 좋지 않아 기습적인 습격에도 취약했다.
“적이다!!!”
역시나 근접하기도 전에 토몬드 측에 발각이 되었다.
“뭐··· 뭐야!!! 저 병력은 도대체 어디서······.”
토몬드 백작은 후측면에서 나타난 부대에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이 깃발이······.”
“깃발이 어쨌다고?!!”
“잉글슨 국기입니다! 그리고 아트로네와 데르가의 가문기도 보입니다. 또··· 정체불명의 깃발과 구)올몬드 깃발도······.”
“뭐?!!”
깃발은 아무나 만들 수 있지만, 이해 당사자의 허락이 없다면 나중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귀족 모독죄는 평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귀족이 다른 귀족의 사칭하는 것은 훨씬 심각하다.
심하게는 여러 귀족들이 연합하게 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기에 함부로 남의 가문 깃발을 사용해선 안 된다.
귀족만 해도 그런데, 그것이 국가라면?
“미친!!! 그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토몬드 백작은 얼마 전 아트로네 백작가의 두 번째 후계자가 와서 하는 헛소리를 들었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돌려보냈지만, 사실 조금 찝찝하긴 했다.
-제 외사촌이 리안 레온이··· 명예 후작이··· 남부 데스몬드에서 반란이··· 잉글슨의 총사령관이······.
핵심 내용은 저 세 가지였다.
저 중에 그나마 믿을 만한 것은 데스몬드에서의 민중 봉기.
그래서 그게 뭘 어쨌다는 건가.
봉기가 아무리 심하게 일어났다 하더라도 외국의 꼬맹이에게 후작위와 총사령관직은 내린다고?
“나중에 총사령관직을 회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외국의 꼬마가 명예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어 봐야 국내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테니. 실질적인 총사령관은 아트로네 백작이고 말입니다!!”
부관이 다급하게 토몬드 백작에게 말했다.
“아니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트로네 백작이 그렇게 막무가내인 양반이 아니라고!”
아일리 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아트로네 백작.
쟁쟁한 자식들을 잃어버려 힘이 많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는 명예를 아는 귀족이었다.
만약 진짜로 위의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중하게 친필 서신으로 협조를 구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둘째가 아닌 자신의 사위인 첫째를 보냈으리.
참고로 둘째는 눈엣가시 같은 오스라거 백작가의 사위이니.
“그건 그렇지만··· 잉글슨 국기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반군으로 찍힐 우려가······.”
“사칭으로 알았다고 변명하면 돼! 누가 믿겠어. 더군다나 우린 오스라거와 전쟁 중이었다고!”
전쟁 중인 상태에서 갑자기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면 그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조건 귀족 모독 같은 것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잉글슨의 입장에서도 강경하게 대처하진 않을 거다.
융통성과 자비 없이 국정을 운영하면, 다른 귀족들의 충성심까지 잃을 수 있으니.
“그보다 말이야. 숫자가 적어. 중앙군이라고 하기에는.”
“그··· 렇긴 합니다.”
“데르가의 깃발이 보이는 것은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구)올몬드 백작가의 깃발은 어이가 없군. 망령이라도 살아 돌아온 건가?”
“뭔가 조금 의구심이 많은 군대이긴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백작님.”
한참 신나게 도망가는 오스라거군의 뒤통수를 갉아 먹으며 재미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만 뒤로 돌려서 저놈들을 막는다. 그래도 숫자는 우리가 많을 거고. 지형도 훨씬 유리하니. 애초에 여기까지 올라올 배짱이나 있을까?”
만약 오스라거를 후려갈기고 있는 중이 아니었다면, 저런 개판 오 분 전인 조합의 애송이는 보이는 족족 먼저 가서 처부쉈을 것이다.
지형적으로 리안이 방어를 한다 해도 불리했다.
먼 과거 아트로네 백작가가 이 요새를 가지고도 남쪽으로 더 진출하지 못한 이유였다.
알베찰 요새의 한계라고 할까.
한편.
상대가 분주히 움직이며 재편성을 하는 걸 본 리안은 미소를 띠었다.
다만, 옆에 서 있던 줄리아 데르는 조금 불안한 기색을 보인다.
“주인님. 너무도 불리합니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기에 노예 각인은 단 몇 시간 만에 끝났다.
주인님이라는 소리가 부담 없이 입에 착착 감긴다고 해야 할까.
다만, 이성을 온전히 유지한 채 각인을 받아들였기에 리안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 거의 모든 성격은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마포가 있다.”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쏘아 올리는 마포는 위력이 반감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배웠구나. 줄리아.”
“이런 상황이지만, 주인님께 칭찬을 받으니 기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거의 모든 인격이 유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사고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각인 앞에 ‘노예’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다.
만약 저 단어가 붙지 않았다면, 왕이나 황제와 같은 최상위 권력자들이 각인을 남발했을 거다.
고대의 국가 중 그 부작용으로 망해 버린 나라들이 꽤 있으니. 자발적 충성만이 진짜 충성이라는 풍조가 생겨나 지금에 와서 자리 잡았다.
“그래도 마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크지.”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쏴 대면 계속 나아가며 몇 명의 몸을 찢겨 버리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반대라면 드라마틱한 연출까진 기대할 수 없다.
기껏해야 몇 명을 때리고 땅에 처박힐 테니.
“숫자의 차이도 큽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줄리아 네 병력도 원래 그리 약한 병력이 아니니까.”
솔직히 리안의 포병과 고지대라는 이점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노예가 된 처지도 그 때문이다.
서글프긴 했지만, 노예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
“보자 보자. 어디 보자. 저기 보자! 세바스 아저씨. 우측 먼저 올려보내세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세바스가 신호를 보내자 우익에 있던 아트로네 백작의 병력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좌익이나 중앙이 오히려 더 나아 보였는데, 가장 불리해 보이는 우익을 먼저 전진시키는 것은 둘째 치고.
“주인님. 포격 지원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겨우 다섯 문밖에 못 들고 왔어. 지금 쏘면 중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 못 하지. 오늘의 주인공은 줄리아 너니까.”
데르 깃발을 올리긴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참전했느냐다.
아직 데르의 계승 전쟁에 대해 아는 가문은 없었다.
그러니 여전히 줄리아 데르가 유력한 차기 백작이 될 것이라 알고 있을 거다.
타다다다당!!!
그때 우익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고지에서 우위를 점하던 상대측에서 마총을 발사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마총에 맞은 아트로네의 병사들이 뒤로 굴러떨어졌다.
그런데, 사기가 꺾이기는커녕.
“멍청한 놈들. 그렇게 옷을 화려하게 입으니까. 표적이 되지.”
첫째의 병사가 둘째의 병사가 굴러떨어지는 걸 보고 비아냥거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 목숨을 노리고 싸웠던 이들이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전진 중인 상태.
“흥!! 너희 남작님이 돈이 없어 군복을 제대로 입지 못한 걸 모를 줄 알고? 부러우면 부럽다 해!!”
피웅~~!
그 말을 하는 도중에 총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뭐?!! 싸움을 옷으로 하나! 두고 봐라.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 가장 먼저 올라가서 영약을 받고 말 테다.”
그리 말한 병사 하나가 이를 악물고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마총도 아니고 방패도 아니고 겨우 창 하나만 들려 있을 뿐이었다.
“저··· 저놈들!! 미쳤구나!”
병사들을 통제해야 하는 장교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원래라면 마총병이 일제 사격으로 상대의 전열을 무너뜨린 뒤 근접 보병이 투입되는 형태가 기본이다.
그런데, 마총병이든 창병이든 할 것 없이 언덕 위에 아리따운 미녀라도 있는 듯 미쳐서 달려 올라갔다.
“멍청한 주인을 모시더니. 너도 멍청해지는구나.”
“뭐?! 감히 내 주군을 모독하다니······.”
“총사께선 빠른 돌격을 명령하셨다. 일제 사격 후 돌격이 가능할 것 같아?”
“그렇다 해도 이런 식은 무모해!!!”
언덕 위에 진을 친 적들은 교리대로 마총병이 앞에 서 있었다.
아마 근접 교전이 일어나기 직전 근접 보병과 위치를 스위칭할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조준 사격을 할 것이다.
“무모하긴! 이건 기회라고. 넌 평생 그 자리에 있으라고! 비켜!! 비켜!! 이놈들아. 으하하하!!”
그리 말한 하급 기사는 긴 도끼에 창을 붙인 모양의 할버드를 어깨에 짊어지고 미친 듯이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제··· 젠장. 나도 모르겠다.”
기사임에도 기병이 아닌 보병 지휘를 맡는 장교직을 맡고 있었기에 처량한 신세.
경지가 조금이라도 오른다면, 지위도 함께 오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리안이 포상으로 내리겠다던 영약이 눈에 아른거린다.
와아아아아아!!!
아트로네 군은 완벽하게 열세인 상태임에도 좀비처럼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물론 영약을 받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나 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상관없다.
포상만은 확실히 약속했으니.
그 포상으로 시중에 파는 하급 영약이라도 사 먹으면 된다.
타다다다당!!
언덕위에선 여전히 마총만 쏘아 댈 뿐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저··· 저놈들 약이라도 빨았나 봅니다!!”
“약이 그리 싼 건지 아느냐?! 저런 덜떨어진 병사들에게 먹이게.”
두려움을 감소시킨다거나. 기분을 고양시킨다거나.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들이 존재하긴 한다.
다만, 대량 생산이 아니라 수제품이기 때문에 가격이 만만치 않다.
분명 이런 약을 사용하는 군대가 있긴 하지만, 아주 절체절명의 시기에 큰 각오를 하고 보급을 한다.
그것도 최정예들에게 말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결코 정예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아아아아아!!!
전열은 찾을 수 없는 광신도들처럼 보였다.
사실 보상 이외에도 저들은 매일 치른 전투로 인해 지친 상태였다.
토몬드와 오스라거 두 백작가의 싸움은 대규모라 매일 싸우지는 않았지만, 아트로네의 바보 형제들은 소규모였기에 매일 같이 싸워 댔다.
아마도 살아남은 저들은 후손에게 ‘밥만 먹고 싸웠다.’라고 말해도 거짓이 아닐 정도.
토몬드 군과 아트로네 군은 같은 기간만큼 전투를 했었지만, 온도가 완전히 달랐다.
“저··· 적들이 당도했습니다!!”
그렇기에 당황한 것은 토몬드 백작가의 좌익이었다.
“젠장!! 저지하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다!!”
전투를 치르기 전에도 숫자가 더 많았지만, 마총에 맞아서 떨어져 나간 이들도 있었기에 지금은 확연히 숫자가 많았다.
“내··· 내가 가장 먼저 올라왔다아아아아!!!!”
그중 창을 든 병사 하나가 포효하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저··· 저놈이!!!”
당황한 마총병 셋이 가장 먼저 올라온 아트로네 병사를 겨눴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한 발처럼 들렸지만.
“우하하하하하!!! 죽지 않아!!”
그는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며 놀랍게도 세 발을 총알을 모두 피했다.
솔직히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매일 전투를 치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였다.
마총병은 기본적으로 마나 유저였지만, 경험 차이는 무시를 하지 못했다.
데구르르르~~~푹!!!
바닥을 처참하게 구르던 병사는 마총병 중 한 명의 명치에 창을 꽂아 넣었다.
파사사삭!!!
창에서 빛이 발광하더니 창에 꿰뚫린 마총병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오토호스와 대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창에 세긴 일회용 마법진이었다.
“뒤··· 뒤로! 마총병은 뒤로 물러나라!!”
그런데, 이미 늦어 버렸다.
상대적으로 고지에 있었기에 거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장교들은 한 발만 더 쏘고 스위치를 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적들의 돌격 속도가 훨씬 빨랐다.
파사사삭!
파삭파삭!!!
파사사사삭!!
사방에서 살덩이가 터져나가는 소름 돋는 소리가 퍼졌다.
그뿐만 아니라.
타다다다당!!
그동안 한 발도 쏘지 않고 언덕을 향해 치고 달리던 마총병들이 뒤늦게 적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다.
원거리에서 쏠 때보다 명중률도 위력도 훨씬 강했다.
“젠장. 생각을 잘못했나.”
사실 첫 번째로 언덕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마총병이 되어야 했다.
마나 유저이니 육체적 피지컬이 뛰어나니.
다만, 근접병과가 아니기에 페이스를 늦춘 것이다.
“첫 번째 도착한 놈은 무조건 뒈질 줄 알았더니.”
그런데, 처음 도착한 그 창병은 여전히 살아서 광기에 젖은 채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고오오오오!!!”
훈련을 제대로 못 받았는지 엉성하기 짝이 없는 불안한 폼으로 싸우는데, 이상하게도 죽지 않았다.
아마도 동체 시력이 남들보다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 저 녀석. 살아남으면 첫 포상자가 되겠네.”
그걸 망원경 마도구로 멀리서 지켜보던 리안도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