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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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습하고. 비린 냄새까지.
그와 반대로 곧고 반듯하게 이어진 통로.
“젠장! 완전 하수구가 따로 없네.”
부선장이 툴툴거린다.
“이 정도라면 깨끗하지 않아요?”
루데악 영지는 고대시대 워터파크였고. 수맥을 따라 이어진 수로라서 그런지 어디선가 물이 졸졸 들어오곤 했다.
그래도 순환이 되어서 이 정도다.
“봐요. 저기. 물고기도 있네.”
햇볕도 들지 않는 이런 곳에 물고기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 물이 고여 있는 외부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일 거다.
“그래도. 편해요. 도련님! 히잇!”
샤로트의 기분은 좋아 보인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루데악의 중심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
마포가 그냥 굴러가진 않더라도 끌기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이런 건 누가 왜 만든 건지…….”
“워터파크.”
“그건 또 뭐냐. 종족이냐?”
“고대 주민들이 물놀이를 위해 만든 거예요. 주변을 물을 끌어모아서.”
부선장은 못 믿는 눈초리다.
“내가 아무리 무식하거니. 겨우 물놀이를 위해 이런 규모의 공사를 한다고?”
수로는 사람이 곧게 서서 마포를 끌고 지나다닐 정도로 넓었으며, 통로의 벽은 미끈해 보였다.
“일반 백성들의 여가에 돈을 쏟아부을 정도로 지금과는 경제 규모가 다르거든요. 그보다 눈이 다 침침하네.”
손전등 마도구가 있었지만, 밝기를 최대한으로 낮춰 아껴 써야 했다.
“포트를 데려오지 못한 것이 아쉽군.”
“통신은 누가 관리해요.”
포트가 없으면 고잉미샤호의 통신은 거의 먹통이 된다.
리안이 적의 뒤를 치기 전 본대와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휴대용 통신구도 고잉미샤호의 통신이 원활해야 사용이 가능하다.
“자자. 힘들 내자구요. 그런 의미로 좀 업어 줘요. 인자하신 우리 부선장 아저씨.”
“일 없다.”
* * *
루데악군과 레온군의 대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이 점점 더 높아졌다.
개전 후 15일.
양군 모두가 그리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싸움이 임박함을 뜻했다.
다만.
“백작님. 저놈들. 점점 정예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흥! 징집병들이 강해져 봐야 징집병들이지.”
레온군은 마노 요새의 앞에서 매일 제식 훈련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리버리한 그들의 눈빛이 점점 말똥해졌다.
모양새가 징집병이 아닌 정규병으로 보일 정도.
“자리를 지켜라!! 내가 버티지 못하면 결국 내가 죽는다!! 도망가는 순간 대열이 무너지고. 대열이 무너지면 너의 등 뒤에 칼이 꽂힐 것이다. 차라리 버텨라. 버티면 살 것이다!!”
테르시오 진형이 유행이 된 지금.
사기를 잃고 대열이 먼저 흐트러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동료가 쓰러졌을 땐 어떻게 해야 하나?!”
“도… 도와…….”
“아니! 명령에 따라야 한다. 자리를 지켜라. 너도 살고 더 많은 동료를 살릴 것이다. 부상자는 뒷열이 챙긴다.”
아직 전군이 마총으로 무장한 시대는 아니었다.
장창병이 앞열에서 마총병들을 보호해 준다.
물론 징집병들은 대부분 장창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따로 경보병으로 배치되었다.
애초에 징집병은 훈련이 되지 않아 테르시오 진형을 수행하지 못한다.
점점 징집병은 사라지고 용병을 쓰는 쪽으로 추세가 바뀌는 것도 그 이유다.
“마총병만 지켜라! 어려울 것 없다. 자리만 지킨다면 마총병이 네 앞의 적을 죽여 줄 것이다. 버텨라. 무조건 버텨라!!”
그런 징집병들을 신컨의 재는 열심히 가르쳤다.
물론 저들은 백병전을 벌일지도 모른다.
그건 나중 일.
자리를 지킨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싸움을 못해도 상관없다.
진형 그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주군께선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선이 왔는데.
놀랍게도 부유선이었다.
백수킹이라는 상단으로 그들은 전쟁 물자를 가지고 왔다.
-각하를 뵙고 싶은데…….
-지금은 전쟁 구상 중이라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계십니다.
상단주는 아쉬워하며 리안이 주문한 물자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진형 목걸이.
같은 파장을 가진 목걸이를 건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힘을 내게 해 주는 마도구였다.
비싼 것도 있고 싼 것도 있지만, 싼 것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걸 모든 징집병들에게 보급했다.
‘분명 싸우실 생각이다. 그러니 훈련을 더 열심히 시켜야겠어.’
신컨의 재는 그리 생각했다.
돈을 저렇게나 썼는데, 여기서 물러날 리가 없다고.
“젠장. 보급선이라니!!”
반면 루데악 측은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애써 청야전술을 썼는데, 보급선이 날아와서 뭔가를 나눠 준다.
“백수킹 상단으로 보입니다.”
“저놈들이 왜 여기에 있어! 그보다 이런 곳까지 부유선이 온다고?!”
이상한 일이다.
부유선이 다닐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곳은 길이 없다.
리안의 고잉미샤호가 거칠지만 길을 닦아 놓은 사실을 몰랐다.
“흥! 됐다. 저놈들 진심인 게다. 저런 상단까지 이용할 정도면 돈을 많이 썼을 거야.”
“그런데, 정말 저들이 쳐들어오면 막을 수 있는 것입니까?”
루데악 영지의 첩보장조차도 의구심을 품었다.
루데악 요새에 대한 악명에 대해 소문을 내는 장본인임에도 말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접근하는 순간 8할 이상이 죽을 테니. 그게 부유선이라 할지라도. 후후.”
백작은 자신 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전대 백작이 요새를 비우게 한 적이 있다.
그곳에 단둘이 남아 보여 준 것이 있었다.
-쿵우우우웅!!
그때 요새의 위력을 실감했다.
설사 스랑 제국의 정예 부대가 와도 막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콰아아아앙!!!
그때 어렸을 적 보았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이게 무슨.”
“오오오! 백작 각하! 이것이 말씀하신 그것이옵니까?!!”
신하들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요새 앞의 땅이 뒤집히며 온갖 신기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마치 전설에 나오는 뱀 같습니다.”
“뱀이라니요. 동방의 전설에 나오는 용이 딱 저렇게 생겼다 들었습니다.”
요새 앞에는 고불고불하고 긴 원통의 무언가가 어지럽게 생겨났다.
만약 저곳에 사람이든 뭐든 있었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작의 심기는 답답했다.
“조용!! 다들 닥쳐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보다 큰일이다.
저것이 한번 발동되면 다시 원위치로 만드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 * *
범인은 바로 리안과 그 일행이었다.
“우와아아아! 대단해요. 도련님!”
샤로트는 밖의 풍경을 보고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게… 타면 재밌겠네.”
워터 슬라이더의 규모가 엄청났다.
아마 원래 살던 세계에 가져다 놓으면 세계 신기록은 갈아 치울 듯싶다.
“원래는 저기로 물이 흐른다고요?”
“기회가 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탈 수 있으면 타 보자.”
저 정도 높이에 저 정도 규모의 워터 슬라이더를 타려면 상당량의 물이 필요할 거다.
지금 이 세계의 기술로는 물을 끌어 올리는 것만 해도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니.
“힝. 벌써 기대대욧!”
“그보다 어서 올라가자.”
리안과 일행은 지하에 있는 장치를 작동시킨 후 요새를 오르기 시작했다.
“웬 놈이냐!!!”
가는 길에 지키는 병사를 만났지만.
사아아악!
샤로트가 순식간에 지나치며 목을 베어 버렸다.
그녀는 피가 묻은 창을 사뿐히 털며.
“약속하셨어욧!! 힛.”
해맑게 웃었다.
“오브 콜스.”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실패했다면 돈이 모자랄 때뿐.
투다다다다다!!
리안과 일행은 그대로 달렸다.
중간중간 적을 만났지만.
샤아악! 퍽!! 스사사삭!
정령 갑옷을 입은 대전사들이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세바스를 제외한 모든 대전사들이 리안을 따라나섰다.
“오.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네.”
리안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성문.
척척척!!
따라나선 마포병들이 활약을 할 차례다.
“쏴 버려!”
토우기슈끼 럽이 외치자.
퍼버버버벙!!
마포들이 불을 뿜었고.
콰아아아앙!!
성문의 취약한 부분에 마포들이 때렸다.
외부와 달리 내부에는 약한 부분들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쿠우웅!
커다란 성문은 단 한 번의 일제 사격에 그대로 부서지며 앞으로 넘어갔다.
[병력을 밀어붙여요.]
[알겠습니다. 선장님!]
배에 탄 상태였기에 세바스는 리안의 호칭을 선장이라 불렀다.
애정이라 할까. 존경의 표시라고 할까.
[요새의 기적은 오늘 내로 작동하지 않는다! 레온 백작님이 직접 요새의 성벽을 무너뜨리셨다! 가자 레온의 용맹한 자식들이여.]
우와아아아아!!!!
고잉미샤호에서 방송이 터져 나왔다.
신컨의 재의 목소리였다.
“얼굴이나 비추러 가 볼까요?!”
리안이 웃으며 요새의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놀란 방어군들이 튀어나왔지만, 당황했는지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마… 막아라!!”
루데악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외쳤지만, 대전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반 병사들은 대전사를 막을 수 없다.
화르르르!!
샤로트는 방방 뛰어다니며 온 사방을 불태웠다.
푸수수수!!!
부선장의 천천히 걷고 있는 리안의 앞에 서서 물대포를 쏴 댔다.
요새의 계단을 지키고 있던 병력이 쓸려 나갔다.
“가자!! 먼저 가서 안전을 확보한다!!”
우오오오!!
그렇게 깔끔하게 비워진 계단을 해병대장 이염이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나갔다.
“옮겨!! 얼른!”
마포병들은 대포를 짊어지고 리안의 뒤를 따랐다.
샤로트의 것까지 옮겼는데, 남의 손을 타는 건 삼가야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휘이이잉~!
“전망 좋네.”
결국 리안은 무사히 성벽에 올랐다. 그리고.
콱!
하고 성벽의 홈에 레온 백작 가문의 깃발을 꽂았다.
깃발이 바람에 부대끼며 활짝 펴졌다.
-레온 백작님이시다!!
그것을 발견한 어느 병사가 외쳤다.
-진짜다. 진짜로 백작님이 직접 성문을 여셨어!
-힘을 내자. 백작님을 돕자!
와아아아아!!
리안을 발견한 병사들의 사기가 탱천했다.
설마 하자니 저 어린 몸을 이끌고 적진 한복판에 들어갈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반면.
“도… 도대체. 어떻게 저만한 놈들이 마포까지 짊어지고 오는 걸 몰랐을 수가 있지?”
이곳은 험난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어찌 소수의 병력이 산지를 넘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특히나 마포는 무거워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산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배… 백작님. 어서 피하셔야…….”
“어디로. 어디로 피한단 말이더냐!!”
믿고 있던 함정은 무력화되었고.
성문은 부서졌으며.
요새의 일부 성벽은 리안이 접수하고 있었다.
퍼버버버벙!!!
그 성벽에서 미친 듯이 사방으로 포를 쏘고 있었다.
쾅!! 쾅! 쾅!!!
대응 사격을 하려고 해도 요새의 포들은 대부분 고정 포대다.
요새 밖으로 사격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잠금까지 걸려 있는 그것들을 끌고 나오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전투가 끝난 뒤일 것이다.
“적들이 코앞까지 닥쳤습니다!! 각하. 어서.”
“저놈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뭣들 하는 거야!! 대응 사격을 해라!!! 막으란 말이다!!”
레온 백작군은 거침없이 요새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새의 마포들은 침묵했다.
그럴 것이 촘촘하게 세워진 워터 슬라이더가 시야를 막았다.
워터 슬라이더 아래라 어렴풋이 적들이 보일 뿐.
“젠장!!! 궁으로 간다!”
일단 궁으로 가서 농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면서 공왕에게 중재 요청을 해야겠다.
그것만이 살길이다.
투두두두둥!
요새의 뒤편으로 기사 한 무리가 빠져나간다.
고급 인력들이 사라지자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당했다.
레온 백작군의 병력 손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레온 백작님 만세!!
-우리 영지군은 무적이야.
-살았어. 이렇게 큰 전쟁을 벌이고 살았다고!
딱히 큰 전쟁은 아니었지만, 요새 앞에 커다란 워터 슬라이더가 생기는 걸 본 터라 압도되었다.
평민이 평생 저런 걸 어디 가서 볼 수 있었겠는가.
“진짜. 꼬맹이 넌 어디서 이런 걸 알고 있는 거냐?”
부선장이 리안의 곁에 슬그머니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를 하라니까요. 훗!”
“됐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일단 사람들을 풀어서 난민들 좀 찾아봐요.”
청야전술을 썼으니 요새와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의 피난민이 있을 거다.
“찾아서 뭘 하려고?! 아! 노예로 팔 생각이구나. 이번에 돈을 좀 썼으니 보충을…….”
리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팔면 당장에 돈이 될지는 몰라도. 어차피 이제 여긴 내 땅이에요. 일 년만 지나도 훨씬 더 뽑아 먹을 텐데.”
“그럼 왜 찾으라는 거야?”
“길을 닦아야죠. 어디가 좋을까나.”
요새는 튼튼한 워터 슬라이드 때문에 부유선이 지나갈 수 없다.
그러니 사람들을 동원해 길을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