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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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헭!!”
멋있게 내뱉었지만, 사레가 살짝 걸렸다.
아무래도 아까 전 기사들 앞이라고 연약한 목청으로 고함을 질렀더니 조금 무리가 간 모양.
“선… 장. 여기…….”
뒤쪽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 포트가 급히 달려와 고잉미샤호의 스피커와 연결된 통신구를 가져다줬다.
거리가 조금만 멀어지면 못 쓰지만 지금은 지척이다.
“흠. 고마워요.”
진즉에 줄 것이지.
물론 이런 자리에서 귀족들이 어떤 식으로 연설하는지 몰라서일 것이다.
“아아~!”
리안의 등 뒤 거대한 고잉미샤호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던 마을 사람들이 너무도 큰 소리에 움찔거렸다.
‘위엄이 절로 사는군.’
만족한 리안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내 뒤에 걸려 있는 목을 봐서 알겠지만.”
이 세계에 온 지 꽤 되었고. 사람이 죽는 걸 여러 번 봤지만, 아직 목이 잘린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이것이 홍보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을.
어설프게 현대식 사상을 주입하려다가 마녀로 찍힐 수도 있다.
“너희가 모시던 영주의 일가가 죽었다.”
이미 봐서 알았지만, 막상 리안이 공표하자 모두 공포에 떨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어린아이 같지만, 그의 뒤에는 무시무시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뿐인가 더 뒤로는 생전 처음 보는 괴물 같은 배도 있지 않은가.
그 배에 뾰족 튀어나온 마포들을 보고 있으니 모공이 따끔거렸다.
“그래서 마땅히 이 영지를 이을 사람이 없다. 물론 방계까지 잘 찾아보면 있겠지만, 이곳 영주였던 케리시안이 남작이 비열하게 암습을 하다 죽었다.”
영지민들은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남자가 식솔들이 죽은 것과 영주 자체가 죽은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
“배… 백작님! 저희를 거둬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우리 영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새로운 영주를 임명해 주십시오.”
반역자 영지로 이미 찍혔고. 괘씸죄로 잠시 그냥 방치해 놓는다면 도적들이 들끓을 것이다.
멀쩡한 옆 영지의 병사들이 도적으로 변해 약탈할 것이 자명한 일.
영주가 없단 말은 지켜 줄 사람이 없단 말이 된다.
“너희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사를 해 본 결과 너희가 동조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백성들이 무슨 힘이 있겠냐만은 연좌가 기본인 세상이다.
다른 귀족이 리안의 처지였다면, 이것을 빌미로 약탈을 하고 싹 다 농노로 만들어 버렸을 거다.
조금 반항한다 싶으면 앞서 설명했듯 잠시 방치해 두면 주변 영지에서 작정하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니 이곳을 자유 농업 지역으로 선포한다!”
리안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것이 자유 농업 지역이란 말은 듣도 보도 못한 단어.
거기다 이곳은 변방 국가의 변방에 위치한 곳.
다들 지식이 얕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을 다스리던 영주가 반역 행위를 저질렀기에 모든 재산을 압류한다. 그리고 그 재산 중 농노를 모두 해방하노라.”
“그… 그것이 참말입니까?!!”
어떤 노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까 전 영지민들이 외쳤을 땐 가만히 있던 새 기사단장(?)이 눈을 부라렸다.
그럴 것이 방금 입을 연 농민은 농노 마을의 촌장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촌장이라고 모두 평민은 아니었고. 방금 촌장은 볼에 낙인이 찍혀 있었다.
“기사단장은 나서지 마라.”
“죄송합니다. 주군!!”
정말 무난하게 눈치도 있는 놈이다.
딱히 충성 맹세 따위도 하지 않았는데, 주군이라고 살살 비벼 대는 녀석이었다.
영지를 떠나 있어야 하는 리안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다.
너무 FM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기에.
“너무 나무라지 마라. 이제 저자는 농노가 아니라 해방되었으니 나의 백성이다.”
레온 백작가에 남작령이나 훈작령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따지고 보면 그곳에 사는 모두가 리안의 백성이었다.
아무리 그곳의 지배자가 몇 대에 걸쳐 그곳을 지배해도 명목상은 리안에게 땅을 받은 대가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기에.
“그러고 보니. 그대는… 라이언이었던가?”
리안이 알아보자 촌장은 깜짝 놀랐다.
백작이나 되는 인물이 자신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어릴 때 그대의 이야기는 들었다.”
리안이 촌장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의 얼굴에 낙인이 두 개였기 때문.
이미 다른 지역에서 도망간 농노가 화전을 일구고 살다 이 근방에서 붙잡혀 다시 농노가 되었다.
“젊었을 땐 용맹했다지?”
“부끄럽습니다. 이제 늙어서 오늘내일합니다. 대영주님!”
화전민에서 손자를 들고 도망가는 도중 병사 셋을 죽였다.
원래라면 처형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남작의 변덕 때문인지.
-늙은 놈이 잘도 싸우는구나. 글도 알겠다. 농노 마을에 촌장 자리가 비니까 거기 가서 반성하라.
변덕이라기보단 돈 몇 푼 아껴 보려고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농노라도 촌장을 일정 기간 하면, 영주는 사례금과 함께 농노에서 풀어 주곤 했다.
그래서 농노 촌장들이 같은 농노들을 쥐어짰다.
영주에게 잘 보이려고.
“그래. 네게 손자가 있다지.”
“부… 부디 자비를…….”
노인은 손자 이야기가 나오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렸다.
방금 전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걱정 마라. 해코지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그래. 그가 글을 알기에 촌장이 되었다지?”
“그렇사옵니다.”
“네 손자에게도 글을 가르쳤나.”
“…….”
촌장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손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새 기사단장이 호통을 쳤다.
사극에서 볼 때 저런 모습을 꼴사나워 보였는데, 막상 자신의 아랫사람이 그러니 답답함이 조금 해소되었다.
모양 빠지게 직접 대답을 독촉하기는 그렇지 않은가.
“가르쳤사옵니다. 부디 용서를…….”
“글을 가르친 것이 뭔 잘못인가. 내 듣기로는 그대의 손자가 총명하다는 것을 들은 것 같아.”
당연히 거짓이다.
어린 리안은 이 땅에서 컸겠지만, 지금의 리안은 이곳이 처음이다.
“부끄럽사옵니다만… 마을 사람들이 어린 현자라고…….”
“그대가 교육을 잘 시킨 덕이겠지. 이름이…….”
“아무개입니다.”
손자 아무개는 무려 A급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이름이 아무개였다.
개똥이, 돌쇠, 마당쇠와 같이 손자의 이름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아무개다.
특정 조건이 달성되면 등용이 가능해지는데, 이름이 아무개라 새로 지어 줘야 했다.
<지은 이름> (아무개)
이런 식으로 표기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특하군. 이제 성년이 되었을 텐데 이름이 없어서야 쓰나.”
“하사해 주신다면 대대손손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사실 스랑 제국의 어느 도시에 행정가였다.
뛰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평판이 좋았는데…….
어느 날 결혼한 자신의 딸이 외손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고.
그곳의 영주 아들이 딸을 보고 반해서 겁탈을 하다 실수로 죽여 버렸다.
-억울합니다. 영주님!!
그런데, 웃기게도 그가 누명을 받아 농노로 강등된다.
억울함을 호소하자 입을 막으려는 시도를 했고.
평소 취미로 배우던 호신술로 영주가 보낸 병사를 제압하고선 외손자를 데리고 도망을 오게 된 것.
‘마나 감응력이 있었으면, 기사가 되었을 텐데.’
호신술로 훈련된 병사들을 제압하려면 전투 센스 자체가 타고났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와서는 데려다 쓰려 해도 오늘내일하는 영감님이다.
아쉬울 따름.
“일단 패밀리 네임은… 그래. 사무가 좋겠군.”
그의 손자가 A급 행정가가 될 것이니 농노에서 벗어나 사무직이 되라고 ‘사무’라고 지었다.
사실 게임을 할 때도 무뇌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지어 준 것 같다.
“이름은… 그래. 비가 좋겠다.”
농사에 관련되어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비라 지었다.
“그래서 네 손자의 이름은 이제 비 사무다. 돌아가게 된다면 알리도록. 내 직접 서류를 작성해 주겠노라.”
“대대손손 가보로 삼겠습니다. 대영주님!!”
저리 말하니 조금 뜨끔하긴 했다.
게임에서 쓰던 이름 말고. 좀 그럴싸한 걸로 지어 줄까 하다가.
‘내 작명 센스도…….’
아쉽게도 더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 그대는 도망자 신세였다지.”
“그… 그렇습니다. 흑흑.”
노인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더는 노심초사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노인이 도망친 곳은 스랑 제국의 한 지역이었지만, 이곳이 아무리 급이 떨어지는 백작가라도 백작에게 이름을 하사받았다.
일종의 면죄부가 생긴 것이다.
나중에 문제를 삼으려다 보면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웬만한 죄로는 신병을 요구할 수 없다.
“그런데 그놈. 나도 마음에 들지 않거든. 나중에 목을 자르게 되면 그대에게 보내 주지.”
리안이 노인을 바닥에서 일으켜 세워 주며 귀에 속삭였다.
“……?!!!”
노인은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만 알고 있어. 나도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이곳은 아니고 게임에서 뒤통수를 두 번이나 쳤던 놈이다.
그놈 때문에 게임 오버를 무려 두 번이나 당할 뻔했으니 갚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게임에선 갚아 주지 못했다.
“그러니 그대와 그대의 손자는 열심히 일해 줘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대영주님.”
“뭔지는 알고 알겠다는 건가? 그대는 이곳 케리시안 남작령, 아니 이제는 레온 백작령 자유 농업 지역을 총괄하는 행정관으로 임명하는 바다.”
“제… 제가 말입니까…….”
“계승직은 아니지만, 한 대에 한해서는 계승할 권한을 주겠네.”
“……!”
리안의 말에 노인은 눈만 꿈뻑거렸다.
자다 일어나보니 남작령을 관리하는 관리가 되어 버렸다.
“그대를 사무 남작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작위는 대를 이어 계승할 수 있다.”
“나… 남작 말입니까?!!”
“백작가로 돌아가면, 임명장을 보내 주지. 저곳 남작 저택을 임의로 사용해도 좋다.”
리안의 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영지민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사단장!”
“네에…!! 주구우운!”
기사단장도 혀가 꼬였다.
자신이 벼락출세를 한 줄 알았더니 더한 사람이 있었다.
“사무 남작을 지킬 기사들을 배정해 두도록. 이제 남작이니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면, 엄벌할 것이다.”
“존명!!”
농노 출신을 호위하는 것이 내키진 않았지만, 이제 막 기사단장이 되었으니 까라면 까야 했다.
아마도 성격이 좋은 녀석들만 골라 붙여 줄 것이다.
“아. 그리고 사무 남작. 농지 개혁을 실시하도록.”
“농지 개혁 말입니까?”
“그렇다. 케리시안 남작이 보유했던 농지들을 농노들에게 일정하게 팔도록.”
“그들은 돈이 없습니다. 대영주님!”
“안다. 이자 없이 3대에 걸쳐 분할 납부할 수 있도록 조정하라. 만약 땅이 남는다면, 땅이 없는 평민들에게 줘도 된다.”
리안의 말을 듣고 있던 영지민들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남작이 탐탁지 않았지만, 방금 전 엄청난 권력이 생겨 버렸다.
3대에 걸쳐 천천히 갚아도 되는 농지.
이곳은 레온 남작령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이다.
“단, 이 땅은 대금을 모두 갚더라도 분할 판매가 불가하다는 것을 명시하도록. 그리고 땅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자에게 팔 수도 없다.”
“대영주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사무 남작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리안이 어떤 의도로 이런 식의 명령을 내렸는지 단번에 이해한 것이다.
월급 루팡과 횡령할 기회만 노리는 일반적인 행정가와 달리 나름 성실히 업무를 봐 왔기에 아는 것이다.
“자영농을 확실히 키워 놓겠습니다. 대영주님.”
“이해를 잘 했군. 그리고 해당 농지에서 나온 식량은 백작령에서 전량 수매할 것이다. 그들이 먹을 것이 아니라면 외부로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 말씀은…….”
남작의 얼굴이 거무룩하게 변했다.
말이 자영농이지 농노로 두겠단 말처럼 들렸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 거래되는 곡물의 평균 시세보다 10% 더쳐서 사들이도록. 풍작이든 흉작이든 예외 없다. 예산은 충분히 배정할 것이다.”
“그…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당연하다. 그러니 개인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최대치의 농지를 배분하도록.”
“이 땅의 백성들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대영주님께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흉년일 때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없다지만, 흉년이 매년 드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풍년일 때는 큰돈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한 대만 열심히 일하면 자식은 풍족하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럼. 일하라. 사무 남작!”
“관에 들어가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노인을 부려먹으려니 마음이 조금 쓰이지만, 어쩌겠는가.
손자가 A급이라지만, 아직 경험이 없고. 마땅히 당장 이곳을 관리할 만한 인재도 없다.
“출항한다!”
우오오오!!
리안이 외치자 호위차 따라왔던 해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중구난방 배로 달려간다.
배 위에서 지켜보던 백작 부인이 이마를 탁 치는 것이 멀리서 보인다.
“기사단장. 뭐 해? 안 갈 거야?”
“저… 저도 말입니까?”
“백작령에 가서 교통정리 해야지!”
“아아! 그렇습니다. 주군!”
리안은 여전히 이자의 이름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