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099
요새에 있던 장남은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를 듣고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반역자라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최신형 부유선은 스랑 제국에서나 운영할 만한 물건.
조금 유연하게 생각해도 공국의 공왕이나 보낼 법했다.
‘설마… 공왕 전하가……?’
유명을 달리했을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정권 교체가 일어났을 수도 있고.
“하… 항복하고 바짝 몸을 숙이면…….”
저런 함선을 운영할 능력이 있는 자라면 이런 시골에 대해 사사건건 신경을 쓸 리가 없다.
그저 항복만 한다면 해당 지역의 지배자를 그대로 둘 가능성이 높았다.
“항복을…….”
그때 확성기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방송.
[나는 리안 레온 백작이다. 케리시안 남작이 나를 암살하려다 실패했으니 그 죄를 물으리라.]
갑자기 등장한 리안이란 이름.
벌써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다.
만약 녀석이 제때 도착했다면, 계승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통성이 확보된 후계자였으니.
물론 그 뒤는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 제대로 된 세력을 가지지 못했기에 독살, 암살, 피살 중 선택지만 남았겠지.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렇게 찾아왔다.
문제는 자신이 세운 계획이 실패하며, 이곳을 칠 수 있는 명분까지 얻었다.
다만, 리안은 딱히 물질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도둑이 자기 발 저린다고, 딱 그 꼴이었다.
‘누구의 후원을 받은 거지?’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버티는 것이 답이다.
그냥 나갔다가는 장대에 목이 걸릴 것이 분명.
‘후원자라면 기간이 늘어지는 걸 싫어하겠지.’
리안이란 이름을 걸었지만, 저 배의 주인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세가 따로 있을 거란 것은 당연지사.
그 실세가 짜증을 낼 정도로 시간이 길어지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생길지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포기하면 죽는다.
“도… 도련님!! 어떻게 합니까?!!”
레온 백작령의 부기사단장이 다급히 물었다.
참으로 웃긴 것이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기사단이 수도를 비우고 이곳으로 이동했다.
백작령의 기사들이 마치 이곳의 사병처럼 행동했다.
“명령만 내리시면 저 부유선을 공격하겠습니다! 피해를 감수하면 충분히 승산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 레온 백작령의 기사가 되기 전 지망생들이 방문하고 교육을 받는 곳이 이 곳이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레온 백작가의 기사단을 배출하는 과정이었고 관례로 계속 이어졌던 전통이었다.
케리시안 남작이 곧 레온 백작가의 기사단장이란 공식이 성립했고. 부기사단장조차 저리 행동하는 이유였다.
케리시안 남작가가 계승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케리시안 남작의 공백으로 인해 중립이었지만.
“정말… 저 배를 함락할 수 있겠는가?”
기사들은 리안을 죽이려 했던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성 마법으로 떠드는 저 말을 믿기도 힘들었다.
더 큰 착각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케리시안 남작가가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싸워서 자신의 가치를 보일 생각.
침략자는 떠날 것이니 내 옆에 권력자가 더 무서운 법.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기사만 3명입니다! 거기다 기사단의 평기사들과 이곳 남작령의 평기사들 숫자를 합하면 50명이 넘습니다.”
케리시안 장남은 고민에 빠졌다.
육전에선 부유선이 큰 활약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움직이는 요새이지만, 요새를 공략하지 못하기 때문.
공략법도 어느 정도 떠돌았다.
“좋다. 허가한다.”
* * *
리안은 다리를 까딱이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적당히 기다리면 알아서 기어 나오거나 병사들의 손에 잡혀 끌려 나오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얼씨구……!”
부선장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대가 오히려 요새 문을 열고 기사단을 내보냈기 때문.
거기에 더해 병사들도 보였다.
“아니. 진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육지에서 부유선의 명성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낮긴 낮았다.
실제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포 수는 안 보이나… 저놈들 눈깔이 옹이 눈깔인가…….”
솔직히 상대의 병력은 적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일반적인 부유선이라면, 치열한 격전 끝에 저들이 이겼을지도 모른다.
“계산 밖인데…….”
이것이 게임과 현실의 차이랄까.
데이터와 수치로 되어 있는 게임과 달랐다.
레온 백작령 안에서 케리시안 남작의 세력이 막강하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지배력이 이렇게나 강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 거냐. 꼬맹이.”
부선장이 리안을 바라봤다.
이미 공왕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수순 대로라면 이곳도 리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저들도 리안의 부하인 셈.
제 살 깎아 먹기다.
“뭘 어째요. 일단 본보기를 보여야지.”
저들은 레온 백작가에 충성하는 기사들이 아니라 케리시안 남작에 충성하는 자들 아닌가.
게임을 할 땐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저런 조무래기들의 사정 따위를 세세히 볼 필요 없이 금방 공작이 되고 왕이 되고 황제가 되니.
“보니까 민간 피해도 없을 거고… 요새가 적당하려나.”
마을 쪽을 바라보니 드문드문 주민들이 보였다.
요새로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포트 삼촌. 함포실 연결이요.”
“으응! 알겠어.”
[저것들을 쓸어 버리면 되나?! 꿈나무.]
자신에게 연락이 왔다는 것 자체가 공격 명령이란 걸 알아치린 함포장이었다.
“제 꿈을 방해하는 조무래기들이니 적당히만 해 주세요. 최대한 다치지 않게 살살.”
마음 같아서는 분쇄해 버리고 싶지만, 대전사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다.
[음. 이건 조금 고민이군. 어느 정도를 원하는지 조금만 더 자세히.]
“요새를 위주로. 병력은 최대한 다치지 않게. 저들도 내 백성이니까요.”
[접수했다. 풋풋!]
함포장 토우기슈끼 럽은 앞니가 없어서 그런지 요상한 웃음을 지었다.
퍼버버버벙!!!
그리고 웃음이 끝나는 즉시 고잉미샤호의 측면 15문의 마포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요새에 겨우 있는 두 문의 구형 마포는 이곳에 닿지 않겠지만, 최신 마포인 고잉미샤호의 갤버포는 달랐다.
오히려 너무 가까웠다.
쾅! 쾅!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요새 곳곳이 터져나갔다.
15문의 일제사격은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부기사다… 단장님!!”
케리시안 남작이 없었기에 기사단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부기사단장이었다.
분진이 가득한 가운데 그의 부관이 급히 그를 불렀다.
“당황하지 마라. 마포 따위는… 그저 요란한…….”
파편에 쓰러진 병사들은 많으나 기사들은 금방 털고 일어났다.
부유선이 저평가받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전장에서 마포가 잘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운반하기 힘들어서다. 더군다나 명중력이…….
“주변을 보십시오!!”
“으으응……?!!!!”
바로 돌격 명령을 내리려던 부기사단장은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포탄의 흔적들이 정확하게 병력을 피해 갔다.
15개의 포탄 중 10발이 요새에 명중했고 일부는 성벽을 무너뜨렸다.
문제는 나머지 5발이었는데, 그것이 병력을 아주 살짝 비껴 가며 땅에 박혔다.
그 박힌 점들이 이으면 보기 좋게 오각형을 만들었다.
“아아… 그래도… 기사도가…….”
여전히 부기사단장은 신념에 따라 돌격을 명령하려 했다.
그의 머릿속엔 케리시안 남작이 모시는 자가 곧 레온 백작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기 때문.
이미 그의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반 패닉 상태였으며, 평소 강하게 생각했던 것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이번이 나 리안 레온 백작이 내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자비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은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다만, 싸울 생각이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부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이미 이성적인 판단은 저 멀리 가 버렸기 때문이다.
백작가의 기사단 무력을 남작가 하나가 개인적으로 독점했지만, 그에 따른 장점이 발휘된 것이다.
일종의 공동 의식.
물론 온전한 백작이 존재했다면, 부유선이 아니라 백작 홀몸으로 왔어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부기사단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저런…….”
그걸 본 부선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다른 종족을 보는 듯한 이질감.
“오……!”
다만 리안은 감탄을 내질렀다.
무식하고 야만적이지만, 발톱 끝에 먼지만큼은 낭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선장 아저씨.”
“응?”
“만약에요. 무조건 질 상황이에요. 지면 내가 죽으려나. 그럼 항복할 거예요?”
“흠…! 그렇군. 확실히 예우가 필요하겠어.”
리안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애초에 미치광이 같은 일을 벌여 왔고 그에 동참했던 고잉미샤호의 선원들이다.
‘판단 불가겠지.’
충성심이 없다 해도 선원들에게는 리안은 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불리하다는 상황에 대한 판단 그 자체가 고장 나 버렸다.
죽는 순간까지도 리안을 믿을 것이다.
“나가서 일대일로 싸우려고요?”
“이것이 꼬맹이 너에 대한 충성의 증명이다. 받아 주겠나.”
거절할 가능성이 높았다.
백병전과 달리 일대일 전투는 둘 중 하나가 죽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리안은.
“기꺼이.”
사람들은 일대일 단기 접전을 쉽게 생각한다.
그런데, 단순히 확률로 계산한다면 죽거나 죽이거나 50% 확률.
물론 조금 더 널널할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자신의 용력에 자신 있는 자들이 나서니 당사자 입장에선 거의 100%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싸울 의지가 남았나 보군. 우리 측 전투 지휘관과 일대일로 싸워 이긴다면 우리는 그냥 물러나지.]
리안이 다시 방송을 했다.
그 즉시 부선장이 정령 갑옷을 입으며 선교 밖으로 나갔다.
“서… 선장! 괜찮겠어?”
통신 마법사 포트가 걱정되는 어투로 물었다.
상대는 레온 백작가 무력의 실질적인 일인자다.
“죽겠죠.”
“응?!!!!”
포트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돌려 리안을 바라봤다.
“아니. 상대가 죽는다고요.”
레온 백작령에서 가장 강한 자는 당연히 부기사단장.
그렇기에 리안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로잡을 정도로 실력 차가 크지 않기에 이기기 위해선 죽여야 할 것이다.
“애송이! 살려야지. 설마 죽일 거야?”
“맛탱이가 제대로 간 놈이라 살려 봤자 애물단지예요. 명예롭게 죽게 하는 게 나아요. 아니 불명예스러우려나.”
성품이라도 좋다면 어찌어찌 갱생시켜서 쓰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새로 산 칼이 잘 드는지 확인한답시고 지나가는 행인을 베어 버린 것이 이벤트로 뜨기도 했으니.
-처벌하시겠습니까? <승낙할 경우 케리시안 남작의 호감 하락 및 낮은 확률로 부기사단장이 떠남. 거절할 경우 민심 1 하락>
이런 녀석을 가장 중요한 곳인 이곳 레온 백작령에 두겠는가.
재활용 자체가 불가다.
“다들 응원이나 해요. 337 박수가 좋으려나.”
리안도 선교에서 나와 갑판 위 난간에 걸터앉았다.
“아! 깜빡했네.”
“서언… 장. 필요한 거라도…….”
통신 마법사 포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가 싸우는 것도 아닌데 잔뜩 움츠려 있었다.
단체로 엉켜 싸우는 백병전과 완전히 다른 통제 된 폭력이라 더욱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우유 한 잔 끓일걸 그랬어요.”
“그럼 내가… 끓여 줄까?”
리안이 들고 있는 우유 잔을 보며 말했다.
원소 마법에 능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명색이 마법사이니 가능할 것이다.
“아니요. 부선장 아저씨가 있을 때 끓여서 주면…….”
“응?”
“이 우유가 식기 전에 오겠다. 라고 말하고 갔을 텐데~ 캬~”
“으으응??”
웃고 있는 리안이지만 살짝 긴장되기는 했다.
“농담이에요. 함포실에 연락이나 해 두세요. 혹시 모르니. 개입할 준비를 하라고.”
* * *
부기사 단장은 리안의 방송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단기 접전이라니.
“부단장님!!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의 부관이 조언했다.
아무리 최전방에서 싸우는 기사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지휘관끼리 일대일로 싸우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가 전투 지휘관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고.
“다시 포격이 날아온다면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겠나?”
“그것이…….”
대전사가 최고라는 신념을 가져온 부단장은 방금 전 충격적인 장면에서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래. 치열하게 싸우면 당연히 우리가 이기겠지만, 희생 없이 끝낼 수 있다. 멍청한 놈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싸움을 건 것인가? 으음?”
부단장은 저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부선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애초에 단기 접전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지 않지만, 그럴 경우는 대부분 오토호스 위에서 일어난다.
“미친 건가… 아니면 진짜 둘 중 하나가 죽자는 건가?”
단기접전 생존률의 확률은 엄밀히 말하면 평균 50%가 아니다.
오토호스를 타고 싸우다 불리하다 싶으면 도주할 수 있는 확률이 존재했기 때문.
도주는 찰나였고 아군의 진형으로 도주하면 상대는 손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오토호스에서 내린 상태라면 도주하는 데 오래 걸린다.
“부단장님. 정말…….”
“나를 누구라 생각해? 나를 죽이려면 최소 팔 하나는 내놔야 할 거다.”
레온 백작가의 부기사단장은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공왕조차도 탐을 내던 인물이었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자칭 중견급 경지의 끝에 도달했다 생각했다.
애초에 그 이상의 실력자인 상급이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가에서도 중요시하는 상급이기에.
“기다려라. 내가 어찌 싸우는지 똑똑히 보도록.”
그도 오토호스에서 내려서 부선장을 향해서 자신 있게 뚜벅뚜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