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090
황금색 칠을 한 배가 요란하게 고잉미샤호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걸 조종하는 인물이 누군지 안다면 누구라도 등골이 서늘해질 것이다.
“워워!! 거기까지!!!”
리안이 놀라서 뱃머리로 달려가 수신호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걸 봤는지 급정거를 했고 물보라를 일으켰다.
쏴아아아~! 찰싹!
물이 요란하게 리안을 덮쳤고 체구가 작은 리안은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끼리 충돌하지 않았다는 것.
따봉.
리안은 생쥐 꼴을 했지만, 웃으면서 손모양을 만들었다.
샤로트에게 일은 맡긴것 치고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다.
“도려어언니이임~~!!”
샤로트가 선교에서 나와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리안.
잠시 후 두 배가 완전히 옆으로 붙었다.
당연히 리안이 들어가 직접 배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탈칵!!
배와 배 사이에 나무판자가 얹어졌고 샤로트가 해맑게 달려왔다.
“도련님이 시키신 대로 가져왔어요!! 저 잘했죠?! 헤헤.”
“잘했어. 믿고 있었다고!”
리안이 샤로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헤헷. 칭찬받았다!”
그 뒤로 풍만한 체형의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리안아.”
“어머니. 어떻게 되었어요?!”
자금선을 탈취하기 위해 보낸 사람 중 유일한 비전투원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서류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힘들어. 잘해 봐야 1/5도 못 건질 거야. 처분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
“역시. 그렇군요.”
겨우 배 한 척에 실린 보물의 가치가 함대 하나를 만들 정도다?
그 말인즉슨.
“너무 고가품이야. 웬만한 상단에선 감당하지 못할 물건들이고 장물로 처리하면 더더욱 제값을 못 받을 거야.”
“어머니의 상단은요? 제법 크다고 들었는데.”
“우리 가문 같은 중소형 상단은 명함도 못 내밀어.”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예상했기에 확인차 작은어머니를 딸려 보낸 것이다.
지금부터 만날 사람과의 협상을 위해 미리 품목을 알아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아아아~!
그때 이벨 왕국의 기함이 다가왔다.
일국의 국왕을 태웠기에 1급 전열함으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움직이는 성 그 자체였다.
텅~!
전열함에서 발판이 내려와 걸쳐졌고 국왕이 직접 성큼성큼 내려왔다.
부르지 않고 직접 온 것은 이번 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 대한 예우였다.
“아아~! 우리 조카사위!”
그는 리안을 보자마자 두 팔을 벌려 반가움을 표시했다.
따지고 보면 조카사위는 아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친밀감을 위해 저리 칭한 것이다.
“우리 사촌 누님도 안목이 뛰어나다니까. 하하하.”
그는 진심으로 기쁜지 기다란 귀 끝이 씰룩거렸다.
귀도 뾰족하고 얼굴도 뾰족하고. 하브스 가문의 고질적인 유전병.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어날 리안의 약혼자 앙드네드는 조금 비껴 나갔다.
다만 귀 끝은 살짝 뾰족한 것이 엘프를 연상시켰다.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 그래서 하는 소리인데.”
그가 조심스럽게 리안에게 귓속말을 했다.
“우리 태어날 조카가 남자면, 내 딸은 어떤가?”
이벨 왕국의 국왕은 진심으로 리안이 탐났다.
마스터가 일인 군단으로 불리지만, 리안이 보여 준 능력은 일인 함대나 다름없었다.
바다의 제왕이란 타이틀을 빼앗긴 이벨 왕국에겐 리안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보석처럼 보일 수밖에.
“감히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여제 폐하께서 약속을 거두기 전까지 저는 독신으로 살 것입니다.”
애초에 여아가 태어날 것은 확실했다.
물론 리안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
일단 판을 깔아 놓긴 했지만, 자칫 신센롬 제국이 완전히 멸망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 주면 고맙고.’
오히려 그럴 경우가 리안에게 기회였다.
힘은 없지만, 과거 제국의 이름을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
일개 백작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정통성 때문에 반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힘으로 반발을 찍어 누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걱정 말게나. 우리 딸아이는 예쁘게 자라고 있으니. 이걸 보게나.”
이벨 왕국의 국왕은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서 장치를 눌렀다.
딸깍!
목걸이의 안에는 초상화가 있었는데.
“내 딸이라네. 예쁘지 않나?”
“아직 어리신데 아름답습니다!”
‘이 아저씨가 어디서 약을 팔아?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초상화를!’
확실히 초상화에 나온 아이는 국왕 펠리와 닮지 않았다.
얼굴도 미래가 촉망받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저것은 화가의 포토샵 기술이 들어간 것이지만…….
“그러면 어떤가? 여기서 약조라도 하는 게.”
그는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사실 하브스 가문이라면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가문과 결혼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명예와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브스 가문이야말로 고귀한 피 오브 고귀한 피였기에.
“말씀드렸다시피 여제 폐하께서 과분한 약조를 하셨기에…….”
리안은 말 끝을 살짝 흘렸다.
“흠… 그렇다면 내 사촌 누이에게 상의해 보겠네. 사촌누이가 허락한다면 어떻겠는가?”
“제게 공주님은 과분합니다. 그리고… 제 소속이…….”
리안은 딱 잘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지를 줬지.
상대가 한 나라의 국왕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그대가 배신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렇다면 저도 이벨 왕국과 적으로 만나는 해전에선 단 한 번 발을 빼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한해서 이벨 왕국을 위한 해전에 참전하겠습니다.”
리안은 스스로의 가치를 알았고. 이번에 해전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이벨 왕국의 국왕도 리안의 위력을 피부로 느꼈다.
이벨 왕국의 국왕은 절대 바다에서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고맙네!! 사위. 하하하!”
이벨 왕국의 국왕은 진심으로 리안을 사위로 들일 생각이었다.
솔직히 정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딸아이가 아무리 좋은 정략결혼을 한다 해도 방금 리안이 한 약속에 비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직… 사위는 좀…….”
“걱정 말게나. 사위. 한동안 비밀에 부칠 터이니. 하하하.”
리안은 펠리 국왕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정부가 아닌 두 번째나 세 번째 부인으로 보낼 생각이란 걸.
‘설마 했는데 진짜네… 이 아저씨 바다에 진심이네.’
가끔 게임을 플레이 하다 보면 해전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칠 경우 이런 혼사를 건넬 때가 있었다.
물론 그때는 직접이 아니라 나이대가 맞는 그 가문의 아들이 대상이지만, 지금은 리안 본인이 어리니 이런 결과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자네 정도의 영웅이라면 내 딸이 둘째 부인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네.”
“그런…….”
“그만. 내 각오는 확고하다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폐하의 뜻이 정 그렇다면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알겠네. 믿고 맡겨 주게나. 내 꼭 사촌 누이의 허락을 받아 낼 테니.”
이벨 왕국의 공주가 두 번째 부인이 된다는 것은 체면에 상당한 타격을 받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리안의 첫 번째 부인이 신센롬 제국의 공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 사위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사위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남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 혼약을 하지 않았다지만, 어찌 보면 리안도 하브스 가문의 울타리에 들어온 것이니.
“제가 누나헬에게 나포한 배가 있는데… 절반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뭐?! 정말인가?”
20%의 가치가 50%로 변하는 마법이었다.
“함께 싸웠는데, 혼자 저걸 독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가? 저렇게 큰 혼수 선물이라니. 정말 자네의 통이 크구만!”
“다만. 제 몫은 보관해 두셨다가 다음에 현금으로 받고 싶습니다.”
“하하하. 걱정 말고 맡겨 두게나.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를 가진 나라가 우리 이벨 왕국이니.”
율 대륙에서 가장 현금을 많이 보유한 국가가 어디일까?
황당하게도 율 대륙 서쪽 끝이 반도인 이벨 왕국이었다.
그들은 신대륙 남쪽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고 신대륙 북쪽의 일부도 그들의 것이었다.
그곳에는 은광이 풍부했다. 아니. 넘쳐났다.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니네. 그대가 지참금으로 저리도 큰 거금을 들였으니 나도 선물을 해야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벨 왕국은 가장 많은 돈을 가진 국가였지만, 가장 지출이 심한 국가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자를 찍는 해도 발생했다.
“그대도 귀족이니 땅에 관심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솔깃하지 않는다 하면 거짓일 것이다.
다만, 대충 어디를 줄지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북 신대륙과 남 신대륙 사이의 땅을 주겠지.’
속셈이 뻔히 보였다.
그곳의 땅을 하사하며 만약의 사태에 리안이 휩쓸리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북 신대륙은 잉글슨과 스랑 제국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결국 언제든 밀릴 수 있는 것이 이벨 왕국의 상황이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지참금이 아니라 전리품 배분입니다.”
“뭐라도 상관없다네. 내 체면도 있으니 받아 줬으면 좋겠어. 작위도 함께 주겠지만, 이벨 왕국에 충성하지 않아도 좋아.”
다만, 의리는 지켜야 하겠지.
이벨 왕국에게 땅을 받는 순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속셈은 뻔하지만, 거절은커녕 속으로 환호를 하는 리안이었다.
그 땅은 훗날 황금알을 낳는 땅이 될 것이며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가 될 것이니.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혹! 코파나 지역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 말에 이벨 왕국의 국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자네는 보통이 아니야. 대단해.”
“성의를 표하기 큰 땅이지만, 산지가 많고 험난해 서로 부담은 적은 땅이지요. 그리고 신대륙 중 멀지도 않은 곳이도 하고요.”
크기는 공작령급이지만, 당연히 생산성은 높지 않았다.
외부 시선을 봐도 딱 적당한 지역이다.
거기다 리안은 율 대륙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관리를 위해서 먼 지역은 오히려 안 받는만 못했다.
그리 따지면 신대륙 중에서도 가까운 축에 속하는 곳이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은 앞서 말했듯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리안이 개입할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땅 중 그 땅이라 섭섭하지 않은가?”
“아닙니다. 신대륙의 이권을 나눠 주신 것만 해도 충분한 가치를 받았습니다.”
사실 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신대륙에 대한 무역권이다.
리안이 그곳의 땅을 가진 귀족이 되었으니 신대륙 무역조약의 이권자로 참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똑똑해. 자네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야. 설마 어린아이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노인이 아닌가?”
설마 조약의 내용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벨, 잉글슨, 스랑. 세 나라는 시도 때도 없이 신대륙에서 치고받고 싸우지만, 다른 세력이 신대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데엔 형제처럼 손을 잡고 대항했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리안은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농담이라도 저런 소리를 듣는다면 속이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요즘 리안이라는 어린 몸에 제대로 적응해 까먹고 있었는데 정신이 확 들었다.
“농담이었네. 하하하.”
“폐하께선 참으로 위트가 넘치십니다. 하. 하. 하.”
리안도 펠리 국왕을 따라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럼. 승전 축하 파티가 빠질 수가 있나. 함께 가겠나?”
“영광입니다. 폐하. 다만…….”
“왜 그런가?”
“조타수 한 명만 지원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난 또 뭐라고. 저 배를 몰고 온 조타수가 많이 지친 모양이군. 하하하.”
“네에… 하. 하. 하.”
“그럼 어서 가세나~!”
그렇게 자금선은 이벨 왕국에게 넘겨졌다.
나중에 정산을 할 때 금액을 속이진 않겠지만, 어차피 어떤 물건이 들었는지는 리안의 새어머니를 통해 이미 다 파악된 상태다.
“힝… 내~ 배~~!”
샤로트는 노란색 배가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바라봤다.
확실히 미래의 해적왕에는 배를 동경하는 DNA가 들어 있는 걸까?
“다음에 하나 뽑아 줄 테니 아쉬워하지 마.”
“정말이요?!”
웬만큼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긴 하다.
“리안아. 그보다 진짜로 이벨 왕국 공주와 혼약을 하려고?!”
“봐서요.”
“후회할 거다. 호사가들 사이에 소문이 이미 다 퍼졌어. 넌 속은 거란다.”
리안도 잘 알고 있다.
이벨 왕국의 공주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