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네르데르 공화국의 통령 빌럼아 오린녜 공은 창밖을 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후르릅.
밖으로 보이는 활기차고 평화로운 수도 암테르담.
자신의 피와 땀이 섞인 결과물이다.
시민들의 지지는 대단했다.
행사 때면 그의 성씨를 가리키는 오린녜를 뜻하는 오렌지색 깃발을 흔들었다.
"오늘도 암테르담은 평화롭……."
"통령 각하아아아!!!"
그때 급히 집무실로 박차고 들어온 그의 비서.
"무슨 일이냐?"
"그게… 신센롬 제국의 신형 군함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흠… 한자 동맹의 깃발은 보이지 않고?"
종종 이런 경우가 있긴 했다.
한자 동맹은 상인 집단에 불과하지만, 어찌 보면 신센롬 제국의 소속이기도 했다.
그들은 신센롬 제국의 깃발을 잘 이용하지 않지만, 단다고 해도 이곳에 들어올 때는 예의상 내린다.
적국이라도 당당히 자신의 나라 국기를 달고 상행을 하는 다른 나라 상선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이상한 깃발이 아래에 걸려 있긴 했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한자 동맹의 깃발이 걸렸다면 '실수로 안 내렸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알겠다. 군사를 준비해라. 내 직접 항구로 나가 보겠다."
"알겠습니다. 각하!!"
전쟁이 끝났지만, 신센롬 제국은 여전히 가상 적국이다.
언제 서로 험악해져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
그것은 다 신센롬 제국의 여제와 사촌 관계인 이벨 왕국의 국왕 때문이다.
호시탐탐 기회만 나면 이곳을 노리기 때문.
"정찰을 보낸건가? 설마 먼 바다에 이벨 왕국의 함대가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별로 가능성은 없는 이야기지만, 한 나라의 수장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한다.
'스랑 제국과 잉글슨 왕국이 전쟁 중이긴 해도 별일 없으려나…….'
당연히 그 두 나라는 이벨 왕국이 북해로 진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아무리 두 나라가 바다에서 전쟁 중이라지만, 만약 이벨 왕국이 올라온다면 둘이 힘을 합쳐서라도 몰아낼 것이다.
* * *
부두에는 병력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네르데르 공화국은 작은 나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약하지는 않았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독립을 유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신센롬 제국의 군함은 어디에 있는가?"
빌럼아 통령이 도착하자 항구 관리인에게 물었다.
"저기 오고 있습니다!!"
고잉미샤호는 마치 유람이라도 온 듯 천천히 앞바다를 살피며 조금씩 부두로 다가오고 있었다.
싸울 생각은 없으니 나를 맞이할 채비를 하라는 듯.
철커덩!
고잉미샤호는 한참이나 맴돌고는 천천히 부두에 닿았다.
우아한 백조가 다가오는 듯 느긋했다.
끼리리릭! 탁!
나무판자가 고잉미샤호에서 내려왔다.
잠시 후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꼬마?!"
황당하게도 세 명의 꼬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어려 보이는 녀석이 소리쳤다.
"나는 브루타뉴 공국의 리안 레온 백작이며, 잉글슨 왕국의 아트로네 백작가의 이름으로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님을 호송중이오!"
그 말을 들은 통령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게 무슨 개소리야?!'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첫 번째.
자신을 소개한 꼬마의 정체다.
브루타뉴의 공국의 백작이라 주장하는데, 브루타뉴 공국은 스랑 제국의 속국이었다.
두 번째.
호송하는 주체는 또 잉글슨 왕국의 아트로네 백작가라는데…….
당연히 잉글슨은 북해 바다의 패자다.
세 번째.
또 호송 중인 인물은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다.
가상의 적국이기도 하지만, 율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패자 중 한 곳임은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스랑제국 + 잉글슨 왕국+ 신센롬 제국.
좀 친다는 나라 모두가 이해관계에 들어가 있다.
'포… 폭탄이다. 아주 거대한 마나 폭탄이야!!'
생각이 정리되자 통령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라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한 치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
세 나라가 여기로 몰려오게 되면, 네르다르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릴 것이다.
'독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정신 바짝 차리자.'
통령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 황자를 찾았다.
'저 녀석이다!'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뾰족한 귀 끝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
들리던 소문과 같았다.
"네르다르 공화국 수도 암테르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황자 전하. 저는 네르다르의 통령 빌럼아가 오린녜입니다."
한때 네르다르 공화국은 신센롬 제국의 소속이었고. 하브스 가문의 통치를 받았던 시절이 있긴 있었다.
어찌어찌하다가 독립을 하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다.
가상의 적국의 황자이긴 해도 배척할 수는 없었다. 아니. 못한다.
"환대에 감사하오. 오린녜 공."
고잉미샤호에서 이 황자가 내린 것이 알려지자 일대는 홍해가 갈라지듯 열렸다.
웅성웅성.
시민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화가 이 땅에 미칠 터이니.
더군다나 스랑 제국과 잉글슨 왕국의 이름으로 호송 중인 상태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위해라도 가하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일단 통령궁으로……."
"아니오. 내 개인적으로 그대의 저택에 가 보고 싶군요."
레오폴트가 리안이 시킨 대로 읊었다.
"제… 제 저택으로 말입니까?!!"
오린녜 통령은 이게 무슨 무례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하하하. 제게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이 황자 전하. 가시죠. 당연히 모시겠습니다."
* * *
삭막하기 그지없는 로이센 왕국의 궁전.
군인왕이라 불리던 전대 왕의 취향 때문이었다.
푸르르르~푸르~~릇! 푸릇!
그런 궁전에서 플롯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취해서 연주를 하고 있는 젊은 청년.
"전하…! 중요한 첩보입니다."
"……!"
신하의 방해에 로이센의 국왕 프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양.
"내 연주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첩보인가? 연습이 부족해! 이번에 문을 연 예술대학에서 플롯 독주를 해야한다고."
"그게……."
"어서 말하게."
"실종되었던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은밀한 첩보에 의하면 신센롬 제국의 황태자가 병이 깊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마도 하브스 가문의 고질적인 유전병이 제대로 돋친 것이겠지.
"아쉽군. 이대로라면 신센롬 제국이 후계자가 없어서 많이 흔들렸을 텐데."
지금 여제인 테레지아도 여자이지만, 살라카 법으로 인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오래 걸렸다.
살라카 법은 여자는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한다는 율 대륙의 국제법이었다.
신센롬 제국의 전대 황제가 지금의 여제인 테레지아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에는 테레지아의 남편에게 황위를 넘기는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네르데르 공화국에 있습니다."
"지금 네르데르 공화국이라 했는가?!!"
프리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암살자라도 보내야 하나……."
"밝혀질 경우 국제적인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나 신센롬 제국은 황족이 죽기 전의 기억을 일부 불러들일 수있는 신물을 보유 중입니다."
그 악질적인 신물 때문이라도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럼. 이 황자가 돌아가게 내버려 두란 말이오?"
"아닙니다. 잡으시지요. 인질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가령 슐 지방에 대한 인정 같은 것 말이지."
프리들 왕이 답을 이야기했다.
전대 국왕에게 학대를 받아서 그렇지. 어렸을 때부터 영재란 소리를 듣고 자랐던 그였다.
"좋아. 그들이 이동할 만한 곳으로 병력을 보내도록 하지."
"아마도 부유선을 타고 왔다고 하니까 스랑 제국 쪽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게르 왕국 연합과 스랑 제국 국경 근처에 매복을 하면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도록 하게나."
이들은 크게 오해한 것이 있었다.
아니 몰랐다.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를 호송하는 인물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 * *
네르데르의 통령 오린녜 공은 저택으로 이동하는 내내 식은 땀을 흘렸다.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그였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보내야겠어. 로이센 왕국의 간자가 소식을 전했을 테니.'
로이센의 첩자들이 네르다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궁전 마법사에 따르면 빈도 높게 통신 파장이 로이센 방향으로 감지된다고 했다.
단거리라 할지라도 통신 마법 장비는 비싸서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힘들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계세요? 빌럼아 통령."
이동하는 마차에서 리안은 그에게 물었다.
'어린 나이에 상당히 의젓하군. 먼저 말도 건네고. 잘되었어. 덕분에 이 황자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스랑 제국과 잉글슨 왕국의 해전은 아직 네르데르에 전해지지 않았다.
거리도 거리지만, 바다에서 싸운 터라 정보가 폐쇄적이었다.
그렇기에 오린녜 통령은 리안을 영재 정도로 판단했다.
"갑작스런 방문이라 어떻게 이 황자님을 모셔야 할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보다 언제쯤 출발할 예정이신지……."
"딱히 예정이랄 것이 있나요. 황자님께서 가자! 하는 날이 가는 날이죠."
리안의 말에 오린녜 통령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눌러앉을수록 네르데르의 리스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호기심이 워낙 많은 나이이신지라."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보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오린녜 통령은 무슨 이딴 자식이 다 있나 싶었다.
"흐음. 암테르담에 더 발런 거리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캬~ 저도 예전부터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콜록!! 콜록!!"
리안의 말에 오리녜 통령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말을 이어 갈수록 점점 처음의 분위기와 멀어졌다.
'미친. 꼬맹이가!'
참고로 암테르담은 매춘과 마초(연금술로 만든 환각성 연초)가 합법이다.
당연히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걸로 꽤 많은 세금을 걷어 들인다.
심지어 이곳에서 돈을 쓰거나 관광객을 데려가면 애국이라고 하는 이들조차 있었다.
"적어도 한 달은 머무르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헤~"
리안의 대답에 오리녜 통령은 기가 찼다.
눈앞의 꼬마도 그렇고 제국의 이 황자도 어리다.
만약 이들이 진짜로 그런 곳에 방치한 채 한 달을 머물게 된다면?
국제적인 비난은 본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최악은 그렇게 한 달을 머무르다가 암살 아니 습격이라도 받는 날에는? 정말 끔찍하다.
'생각을 잘못했다. 이 녀석은 영재도 아니고 인솔자일 리가 없어. 그냥 얼굴마담이다!'
부두에서 첫인상은 그럴싸했으나 방금 그 표정은 뭐랄까……?
'그럼 진짜 실세는 저놈인가?'
오린녜 통령의 눈이 부선장을 향했는데… 하필이면 콧구멍을 파고 있다가 들켰다.
"크흠……."
고개를 홱 하고 돌리는 부선장.
그는 이 마차 안의 리안 일행 중 유일한 성인이었다.
'도대체…….'
그렇다고 창문에 이마를 박고선 경박하게 밖을 구경하는 붉은 머리의 소녀는 아닐 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마차에 탄 인물이라고는 이게 전부다.
모두 하나 같이 하자가 있어 보인다.
뭔가… X 된 느낌이랄까.
"그보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통령 아저씨."
"아직… 정해진 것이."
아저씨라니! 점입가경.
리안에 대한 평가는 영재에서 조금 똑똑한 얼굴마담으로 다시 보통의 어린아이로 떨어졌다.
"일단 우리 이 황자님은 음악이 없이는 식사를 잘 못 하시니 그렇게 알고요. 고귀한 혈통이다 보니."
정정한다. 보통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건방진 꼬맹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건 또 무슨!!"
이것은 완벽한 외교적 실례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 상대는 어린아이.
그나마 어른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아직도 파냐!!'
콧구멍과 전쟁 중이었다.
'내 이것들을!!!'
국민들에게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신이다.
수많은 외세의 압력 속에도 굳건히 나라의 독립을 지켜 낸!
그런 자신이 이런 꼬맹이에게 휘둘리는 것이 화가 났다.
이대로 확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아…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황자님을 모시려면……."
"참고로 남성에 음악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으셔서 남자 음악가는 안 됩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후… 알겠습니다."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이왕이면 예뻤으면 좋겠네요. 황자님은 못생긴걸 극혐하거든요."
"아니. 그건 왜……."
"보기 좋은 떡이 먹기 좋은 거 몰라요?"
이 꼬마는 도대체 뭐하자는 걸까?
그리고 먹기는 뭘 먹는 다는 건지.
"하… 수소문해 보지요."
"그리고 또! 나이가 많으면 곤란해요."
"아니. 나이가 어리면 실력이……."
"네르데르는 그럴 능력이 안 되는군요. 에휴."
리안이 한숨을 쉬자.
"최대한 찾아보죠."
아드득!
통령은 지금 아슬아슬하게 한계치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아아. 피곤하네 오랜 향해로 지쳤어."
마차 의자에 아무렇게나 대충 기댔다.
예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귀족도 뭐도 아닌… 해적이나 할 법한…….
'참자. 어린놈들이다. 참아야 한다.'
화를 내 봐야 자신만 손해다.
울면서 패닉에 빠지거나 떼를 쓰면 그것만큼 곤란한 것도 없다.
마차 안에서의 세세한 일을 외부에서는 모르니. 결국 비난의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갈 터.
'적당히 달래서 빨리 보내자.'
끼리리릭!
마차가 통령의 개인 저택에서 멈췄다.
"그래서 통령 아저씨. 밥은 금방 준비되는 거죠? 배에서의 식사는 영 부실해서……."
오린녜는 이제 포기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지 않은가.
조금만 더 참자.
"후… 바로 준비하도록 이르죠."
이제는 화가 나다 못해 아찔해서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일단.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부르겠습니다."
"네~~에~!!"
리안은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어린아이지만.
철컥! 철컥!
다른 마차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둘 내렸다.
제법 많은 리안 측 사람들이 합류를 한다.
우르르르~
그들은 벌 떼처럼 저택으로 들어갔다.
흡사! 해적 떼를 보는 것 같았다.
"꼬맹이. 어쩌자고 여기 통령을 자극한 거냐?"
해적 선원들에게 둘러싸인 부선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리안에게 물었다.
"전ㄴ문 용어로 이간계라 하죠. 받아 낼 것도 있고. 받아 낼 사람도 있고."
부선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이간계라니. 누구와 누굴?"
"누구긴 누구겠어요. 로이센이지. 흐흐흐."
"더러운 꼬맹이 녀석."
"원래 국제 사회는 더럽게 돌아가는 법이죠. 설마 해적 주제에 어설픈 정의를 외치는 건 아니겠죠?"
<5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