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049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독왕 베지미르.
만약 스토리대로 흘러간다면, 그는 훗날 샤로트 베리의 최측근이 된다.
갑자기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나게 되는 데······.
-내 동생 베츠와 누이 베아티에를 위해.
녀석의 게임 속 일러스트의 핵심 대사다.
베아티에라는 이름에서 기시감이 들었던 이유.
-암살은 은밀하게. 복수는 더 은밀하게.
그리고 고블린이라 불리는 사나이 질리안은 어느 순간 돌연사를 한다.
아일리 섬에서 시작된 유저들이 ‘풀어 주자! 풀어 주자! 황금 고블린을 풀어
주자!!’라고 외치며 골드 작업을 하는 중에 갑자기 돌연사하는 그를 보며 얼
마나 슬퍼했던가.
대충 해적왕 샤로트 베리와 합류하기 직전 정도였다.
다시 말해 질리안을 돌연사하게 만든 것은 독왕 베지미르였던 것.
‘캬~ 이거 1+1이네. SSR+급과 다니면 운발도 좋아지는 건가.’
독왕을 부하로 받아들이는 데 노력도 필요 없다.
이미 리안은 독왕에게 호의를 산 적이 있다.
거기다 샤로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확률도 높고. 아마도 누이와 친했기
때문이겠지.
‘아이템도 하나 얻겠네.’
독왕의 대사들 중 힌트가 될 만한 것이 또 있다.
- 이거? 복수를 하고 얻은 전리품이지.
달의 가면.
일시적으로 얼굴을 바꿔 주는 마법아이탬이다.
부수적인 기능으로 밤눈이 좋아지는 것은 보너스.
참고로 독왕이 등장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복수를 운운하는 걸 보면 누
구에게서 얻은 것인지는 분명했다.
그게 누군지는....
“질리안 경. 정령 결투를 해야하겠는가? 별로 추천은 하지 않는다만.”
“주군! 결투를 먼저 신청한 것은 샤로트 시녀입니다!”
백작의 만류에 질리안은 강하게 주장했다.
기사들에게는 결투는 신성한 것이며 보편적인 심판이다.
얼마나 보편적이냐면, 백작가에서 3번의 연회가 있으면 꼭 한 번은 결투가 벌
어진다.
“후··· 기사의 명예를 주군이 밟을 수야 없지.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주군!”
백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질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명목상 결투 중 목숨을 취한다 해도 상관은 없다.
물론 그렇게까지는 잘 하지는 않지만, 이긴 쪽은 목숨값 대신 다른 걸 요구를
할 수 있었다.
보통은 명예로 싸우기에 사과를 받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승리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증명한 것이기에.
“명예로운 자에게 승리가 있을 것이다. 결투를 시작하라.”
백작이 공표했다.
질리안은 검 대신 채찍을 들고 있었다.
‘샤로트 시녀. 뭘 믿고 까부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이 성에선 말이지. 이기고
나서 내가 뭘 하든 말릴수 있는 사람은 없단 말이지. 그 누구도.’
사실 질리안은 나름 수완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돈을 빌린 귀족이 많은 것이다.
돈의 출처도 모르고.
당연한 것이 그는 변장의 귀재였다.
달의 가면이 있는 한 그는 혼자서 몇 명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도둑. 강도. 사기꾼. 포주.
아무도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경비대의 대장이란 직업은 최고 효율을 내게 해 줬다.
“샤로트 시녀. 무기를 들지 않아도 되겠소?”
이미 결투는 시작되었지만, 질리안은 나름 명예로운 척 배려를 해줬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대기사에게 무기는 선택일 뿐.”
샤로트가 팔을 뻗자 허공에서 화염이 길게 뻗어 나갔다.
화르르르~!
이내 그것은 창 모양이 되었고.
“대··· 대기사!!??”
경비대 대장인 그는 샤로트가 대기사란 사실을 지금에야 알았다.
그저 오러 유저쯤 되는 줄 알았지.
그는 경비대장의 일보다 성문이나 순찰을 돌며 건수가 없는지에 대한 것에만
관심이 많았으니.
오히려 백작가의 일에는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는 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다행이라면 주 무기가 채찍이란 것과 그의 속성이 상대적으로 화염 속성에 강
한 바람이란 것이다.
샤샤샤샤샥!
채찍은 바람을 일으키며 샤로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질리안은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속성도 우위에 있었고. 아무리 상대도 대전사라도 어리니 경험이 적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화르르르!!
바람이 불을 밀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샤로트의 화염창은 바람을 먹고
더 커졌다.
“물리력도 없는 무기가 어째서··· 설마. 2차 각성?!”
대전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물리력에 저항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실물에 기운을 입힌 것만은 못했다.
다만, 초급 대전사의 기운을 입힌 물리력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간 장악!!”
질리안은 경악했다.
설마 저 나이에 2차 각성을 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지만.
‘아직··· 아직··· 희망은 있다.’
초급 대전사가 중견급 대전사에게 이길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경험과 무술의 격차나 상성 또는 상황에 따라 오히려 역으로 포식도 가능하다.
“벌써 2차 각성을 했을 정도로 오러에 대한 재능이 높을지는 모르겠지만, 넌
아직 어린애다!!”
채찍이 샤로트의 창과 엮인 상태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구도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끼리릭!!
질리안은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채찍을 당겼다.
상대는 중견급 대전사라 한들 어린아이.
근력도 경험도 자신이 우위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근접전을 한다면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타다닷!!
판단이 맞은 것일까?
샤로트가 속절없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끝났군.”
그걸 지켜보던 부선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보이네요.”
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펑!!!
바람과 화염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음을 터뜨렸다.
충격으로 순식간에 뜨거운 바람이 주변으로 퍼졌다.
꺄아아악!!
비위가 약한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어어어··· 질리안 경이··· 죽었다.”
“머리가······.”
없이 몸통만 남았다.
샤로트의 앙증맞은 주먹질 한 방에 말이다.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리 결투에서 상대를 죽여도 된다지만, 너무 잔인한 처사.
특히나 같은 세력끼리의 결투에서는 웬만해선 피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돈놀이를 작작 해야지.’
딱히 돈을 빌려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한다.
갚아야 하는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조용!”
그때 백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연히 공터는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명예로운 결투에 따라 샤로트 베리 경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를 수습할 것을 명한다.”
“알겠어요. 백작 각하!”
그녀는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무용은 잘 봤네.”
백작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상하게 그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 것 같은데······.
‘외할아버지에게도 돈을 꿔 줬나 보네······.’
화를 내거나 곤란해 하기는커녕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초반에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경고하지 않은 것도 확실히 이상했다.
리안은 샤로트에게 다가가 칭찬했다.
“잘했어! 샤로트.”
“힝~! 기사가 뭐가 저리 약해욧?! 제대로 혼도 못 내주고 편하게 죽여 버렸네.”
“네··· 네가 너무 강한 게 아닐까?”
샤로트의 표정은 마치 잠자리를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린 어린아이 같았다.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해적섬의 앞에 쌓인 해골 무더기가 오버랩되었다.
‘역시 위험하다.’
리안은 그리 말하고는 부선장에게 고갯짓했다.
“사람들이 안 보는 데로 가져가서 샅샅이 뒤져요.”
“내 전문이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부선장.
참고로 결투 중 상대가 죽었을 때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승자의 몫이다.
그것은 약탈을 허용한다는 의미.
겉으로는 명예를 외치며, 그 내면은 참으로 야만투성이다.
‘그래도 묻어는 드릴게.’
심한 경우 훼손하거나 발가벗겨서 방치해 버리는 경우도 존재했다.
결투에서 이긴 걸로도 화가 풀리지 않았을 때다.
“도련님!! 리안 도련니이임!!”
그때 소년 하나가 달려와 리안의 앞에 엎드렸다.
독왕 베지미르였다.
“도와주세요. 제 동생이······.”
고인물인 리안도 몰랐다.
이 녀석이 누이와 동생과 함께 아트로네에 살았었다는 것을.
“도련님. 그게··· 아프다고 해요.”
샤로트가 옆에서 빠르게 설명해 줬다.
도움을 청하러 성에 왔다가 질리안에게 붙들린 것까지.
아마도 샤로트가 없었더라면, 독왕 베지미르 생에 최악의 날이 되었겠지.
“세이나 누님!!”
리안이 전쟁의 신 사제를 불렀다.
그녀는 죽은 질리안의 시체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망자를 배웅하고 왔습니다. 전쟁의 신께 인도해 드렸어요.”
잊고 있었다.
전쟁의 신을 모시는 세이나 주교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그 말인즉슨 우리의 적이 죽는다면, 전쟁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다.
고잉미샤호의 선원은 전쟁의 신 가호아래에 있다.
보통은 적에게 공표를 해 주지만··· 그것은 단지 공포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
고. 실상은 공표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녀를 적대하는 것만으로도 죽은 뒤 영혼을 전쟁의 신께 보내 버린다.
“흠··· 그건 좀 기쁜 소식이네욧!”
그 말에 새침 맞던 샤로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런데, 왜 부르셨나요. 공자님.”
“이 아이의 동생이 아프다니까 함께 다녀오세요. 웬만하면 성으로 데려오고.”
“노력하겠습니다.”
역시 사제가 최고다.
의사까지 있었다면, 최고의 효율을 내겠지만 어쩌랴.
하다못해 약초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도······.
‘사제라도 있는게 어디야.’
아마도 배가 부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세이나만으로도 치사율을 충분히 줄일 수 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흑흑.”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베아티에와 베지미르가 울면서 감사를 전했다.
“빨리 가 봐!”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던 부선장이 다가왔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역시 뭐든지 터는 것에는 일류급이었다.
“바람의 정령 큐브, 열쇠 그리고 이런 게 나왔는데? 재수 없게 생겼군. 버릴까?”
부선장의 손에는 가면이 들려 있었다.
확실히 기괴하게 생기기는 했다.
“그게 알짜예요.”
“어린아이 아니랄까 봐 이런 걸··· 에잇.”
부선장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리안에게 넘기고는 손을 털었다.
역시 해적이라 은근히 미신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관심을 안 보이면 땡큐고.’
이 전리품은 해적단의 재산이 아니다.
다만, 열쇠가 문제다.
“뭔가··· 숨기는 표정인데?”
“숨기긴 뭘 숨겼다고. 시체는 성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방으로 돌아가요!!”
직업이 직업인지라 하여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
열쇠는 아마도 비밀 창고를 들어갈 때 필요한 것일 터.
위치는 알고 있다.
아트로네 백작령에 던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사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열쇠가 있었다면 함정이 발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던전을 털기 위해서는 A급 이상 탐사 스킬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저 말은 A급 탐사 스킬을 가진 녀석이 말했던 것.
-이런 던전에 겨우 보상이 이것뿐이라니. 참나.
허탈해했던 것 같다.
당연히 던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법 아이템은 가면이고. 그 가면은
독왕이 챙겼으니.
그래도 돈은 제법 있다.
대충 30만 페니 정도.
몇 대가 각종 범죄 일을 하며 모은 돈치고는 엄청났다.
그만큼 가면+경비대의 조합이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아트로네 백작가가 무력에 비해 가난한 이유도 저 좀벌레 때문이 아
니었을까.
***
결투를 목격한 첫째 일리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미친··· 괴물이었네.”
백작 후계자인 자신을 죽이진 않았겠지만, 샤로트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연스럽게 첩으로 그녀를 들이겠단 생각은 사라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줄리아 데르 영애다.”
뭔가 리안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 떠난다고 했던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동생에게 손수건을 넘긴다면?
확실히 못 박아 둘 필요가 있다.
똑똑!
그는 곧장 리안을 찾아갔다.
“그새를 못 참고. 왔네. 왔어. 흐흐.”
당연히 리안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성미가 급하니 참을 수가 없었겠지.
더군다나 샤로트의 무력을 보고 엉뚱하게 자신이 뿌린 거짓말을 의심하기는커
녕 더 믿게 되었을 거다.
“큰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떠나기 전에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아서······.”
“잘 오셨습니다. 사실 저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리안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큰형님. 사실은 말입니다. 줄리아 영애는 큰형님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떠나기 전에 하던 것은 마무리 지어 놓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신센롬 제국에 다녀올 동안 불씨가 꺼져 버리면 안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