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047
리안이 밖으로 나오자 샤로트가 물었다.
“도련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들 표정이······.”
뭔가에 홀린 듯 보였다.
웃었다가. 진지해졌다가. 굳었다가. 붉으락푸르락해졌다가.
초 단위로 표정이 변했다.
이는 두 형제 모두에게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뭐. 꿈과 희망을 좀 줬을 뿐이야.”
“흐으음······?”
샤로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형제가 리안을 두고 저리도 얌전했던 적이 있었을까?
“어······?!”
샤로트는 흥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빨래를 걷고 있는 하녀에게로 가 있었다.
반가워하는 표정.
“왜?”
“아··· 아니에요.”
“다녀와. 어차피 저녁 만찬에 네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정말 그래도 돼요?”
“어차피 여긴 아트로네 백작가의 궁전 안이야. 저 두 형들 말고는 날 건들 사
람도 없고.”
리안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두 형제는 리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
며시 미소를 지어 주기까지 했다.
명백히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눈치.
“음··· 감사해요욧!! 도련님. 조금만 둘러보고 올게요.”
“천천히 다녀와도 돼.”
사실 리안의 몸속에는 아저씨가 들어 있다만, 샤로트는 아직 어린애이지 않은가.
이 성에서 좋은 추억을 가졌든, 나쁜 추억을 가졌든 고향과도 같은 곳.
‘사고나 안 치려나 모르겠네.’
샤로트 같은 성격에 어떻게 시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베아티에!! ”
그녀는 하녀에게 달려가 인사를 했다.
제법 친해 보인다.
‘베아티에···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리안은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는데······.
만찬에 가야 하기에 자리를 떠야 했다.
“어멋! 샤롯 시녀님!!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나이는 하녀가 더 많았지만, 그녀는 샤로트에게 높임말을 썼다.
“웅! 도와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제발······.”
하녀는 골치가 아팠다.
딱히 샤로트가 가사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들 떠 있을 때는 항상
사고를 쳤다.
“거절은 거절하겠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는지······.”
“도련님께 배웠지. 헤헷!”
그녀의 키는 작았지만, 뒤꿈치를 살짝 들어 빨래를 걷기 시작했다.
다만, 그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샤샤샥! 샥!
각성을. 그것도 2차 각성까지 마친 그녀였기에 이런 일쯤은 장난과도 같았다.
실수를 하고 뭐고 없었다.
“어멋!! 샤롯 시녀님. 엄청나게 능숙해지셨네요.”
“후후후. 이것쯤이야. 이것도 봐라.”
그녀는 빨래를 걷는 것과 동시에 공중에서.
샤샥!
하고 개기까지 했다.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어떤 원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머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당연할 것이 은밀히 화 속성을 불러일으켜 와류를 만들어 냈고. 빠른 손놀림
으로 몇 번은 툭툭 쳐서 접은 것이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알~? 헤헤.”
“도대체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 빨래 걷기 마스터가 되셨네.”
“난 한다면 하는 여자라구~!”
두 사람은 예전부터 꽤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나누는 말투 자체가 친밀해 보였다.
“이거. 빨래 보관 방으로 옮기면 되지?”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괜히 미안해 거절하는 베아티에.
“어차피 나도 할 일이 딱히 없는 걸.”
그때.
“그럼 잘되었네요. 샤롯 시녀님!”
“하녀장님?!”
베아티에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참고로 하녀장은 하녀들의 수장으로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고용인들 사이에
힘이 없지는 않았다.
하녀들이 가장 아래라고 하지만, 그녀들이 협조를 하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일종의 부사관 느낌이랄까.
“그 빨래를 옮기는 것은 다른 아이들에게 맡길 테니 베아티에와 이불을 좀 빨
아 줬으면 하네요.”
하녀장의 말에 베아티에가 항의를 했다.
“하녀장님. 이불 빨래는 시녀가 할 만한 일이··· 그리고 샤로트 시녀님은 이
제 여기 궁전 소속도 아니신데······.”
“하... 베아티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게냐. 갑자기 리안 도련님이 오는
바람에 이리된 거 아니냐.”
손님들의 방에 이불을 까는 바람에 이불들의 로테이션이 살짝 꼬이고 말았다.
지금 그걸 뭐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 다고··· 해도. 그걸 샤로트 시녀··· 님께······.”
베아티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지만, 끝까지 항의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샤로트는.
“괜찮아. 베아티에! 하녀장님 할게요. 그러니까 베아티에를 몰아붙이지 말아
주세요!”
“잘 생각했어요. 우물가에 가 있으면 아이들에게 시켜서 가져다줄게요.”
하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멀
어졌다.
“어휴. 고아들끼리 잘 노네.”
베아티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샤로트 시녀니임···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그런데 아직도 하녀장님이 너 괴롭혀?”
“······.”
무언은 긍정을 뜻했다.
샤로트는 리안에게 하녀가 생기는 걸 별로 바라지 않았지만, 베아티에를 데려
갈까도 생각했다.
다만, 해적선이란 것이 전투에 자주 휘말리니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가자. 베아티에.”
그녀는 고민을 잠시 뒤로 하고 씩씩하게 베아티에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우물은 성문 근처에 있었다.
“이··· 건··· 너무 많잖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들이 이불을 가지고 왔는데, 10개는 되어 보였다.
베아티에가 항의를 했지만.
“흥! 엄살은. 둘이서면 금방이야!!”
“우린 못 도와주니까 그런 줄 알아. 하녀장님이 손님 만찬 때문에 바쁘니까
이불만 주고 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어.”
하녀들은 그리 말하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베아티에는 절망적이었다.
이제 곧 해가 지는데, 두 명이서 이불 10개를 빨아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
였다.
쌀쌀한 날씨라 발로 계속 밟다가는 동상이······.
화르르르~
“어어어?! 왜··· 물에서 김이······.”
“뭐해. 안 들어오고. 헤헤헤. 재밌다. 이불 빨래~에에~~”
오늘도 역시나 즐거운 샤로트였다.
***
아트로네 백작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여전히 잉글슨 왕국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아무런 저의가 없기 때문이다.
“백작님. 만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트로네 백작을 가장 오래 모신 제1 기사단장이 조용히 일러 주었다.
사실 그 역시 머릿속은 혼돈의 도가니.
“알겠네. 이만 가지.”
백작은 천천히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두 명의 손자와 외손자 그리고 손님들까지 모두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 사이가 안 좋은 두 외손자였지만, 오늘따라 더 각을 세우고 있다고 해야
하나.
거기 사이에 끼인 리안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저런 녀석이 전쟁 영웅일 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하다. 이것은 잉글슨 왕국의 음모라는 걸.
“리안. 오랜만에 보는구나.”
“네에··· 아트로네 백작님.”
호칭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운 리안.
‘역시나. 변한 게 없어.’
역시나 백작은 그런 리안은 한심하게 봤다.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그보다 왜 돌아왔을꼬? 그리고 데리고 온 손님들
은······?”
백작은 오히려 리안의 손님들에게 관심이 더 갔다.
분명 저들이 음모의 주체일 테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가문의 깃발을 빌리러 왔어요. 그리고 이들은 제 수행원들과······.”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 전하이십니다.”
“······?!!”
“······?!!!”
“······?!!!!!!!!!!!!”
모두의 두뇌에 잠시 사고 정지가 왔다.
갑자기 머나먼 곳에 있는 신센롬 제국의 이 황자가 왜 튀어나오는가.
꿈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인물.
아무런 접전도 없었다.
***
리안이 저녁 만찬을 즐기는 사이.
샤로트는 이불 빨래를 즐겼다.
랄랄랄라라~ 랄랄라랄라~ 포카~리~
발랄한 것이 오래전 음료 광고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와하하하~ 간지러워요~”
“어딜 도망가!! 헤헤헷.”
그렇게 웃고 즐기다 보니 빨래는 순식간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몰라도 샤로트는 2차 각성까지 한 대전사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화 속성.
자고로 빨래는 삶는 것이 제격이지 않은가.
“와아아아. 하얗게 변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샤로트 시녀
님. 마법사가 되신거에요? 아님 정령사?”
“나? 각성했지. 나 이제 대기사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불을 올려놓았다.
“허어어업!!!”
베아티에는 너무 놀랐다.
은연중에 이상하다 느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피부로 체감이 되었다.
“죄··· 죄송해요!! 대··· 대기사에게 빨래를···!! 너는 것은 제··· 제가 할게
요!”
“아니야. 빨래를 널 필요는 없어.”
펄럭~!
샤로트는 빨래들을 한쪽으로 던졌다.
화르르르~!
아주 기가 막힌 불 조절이었다.
순식간에 빨래가 말랐다.
“대··· 대단해요.”
“이쯤은 대기사라면 다 할 수 있지.”
샤로트는 위풍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올렸다.
짝짝짝!!
베아티에는 달라진 샤로트의 모습에 연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였다.
대기사라면 아까 전 하녀장을 충분히 손봐 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리했다가는 샤로트가 떠난 후 뒷감당을 베아티에 자신이 해야 했을
거다.
“뭐야! 왜 노닥거리고 있어!! 으휴. 일을 시킨 내가 바보지.”
그때 하녀장이 왔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다가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여 배알이 꼬인 듯
보였다.
더군다나 샤로트 베리는 정말 꼴이 보기 싫었다.
쥐뿔도 없는 것이 꼴에 귀족 출신이라고 시녀로 들어온 것이.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처음 시녀로 들어왔을 때는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
이였고.
그럴 때마다 얹혀사는 리안이 감싸줬었다.
그러니 한참이나 버릇을 못 고치고 헤실헤실 사고를 치고 다녔지.
“빨래. 다했는데요?”
“헛소리! 그 많은 걸 어떻게··· 으읭??!”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이불들.
급기야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기까지 했다.
“도데체··· 아.”
생각해보니 리안의 일행에 마법사가 끼어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닐까?
괘씸했다.
“샤로트 시녀님! 외부 사람에게 빨래를 시키다니요. 우리 백작가의 체면
이······.”
“우리가 했는 걸요.”
“저를 능멸하는 겁니까?! 어떻게 두 명이서 이 많은 것을!!”
오히려 화가 많이 난 모양.
아까 전에는 둘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양이라 해 놓고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성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갑자기 베아티에가 급히 성문쪽으로 달려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남동생 베지미르의 것이었기에.
“꺼져라! 면회시간이 아니다.”
“제발. 저희 누나 좀······.”
“베지미르!!”
“누나아!!!”
두 사람이 만나려는 찰나,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급기야.
퍽!!
안으로 들어가려는 베지미르의 등짝을 후려쳐서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베지미르!!”
베아티에가 소리쳤다.
쓰러진 동생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이번에는 하녀장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
고는.
짝!
베아티에의 뺨을 후려쳤다.
“엄연히 궁전의 규율이 있거늘! 도대체 베아티에 너는 생각이 있는 거냐?! 이
시간에 가족이 찾아오게 하고. 그리고 면회 때마다 몰래 동생에게 음식을 챙
겨 주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로 시간이 날 때면 혼내는 하녀장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하녀 봉급이 박하지는 않다지만, 부모님이 고리대를 빌렸다가 갚지 못하고 돌
아가셨다.
봉급은 거의 다 빼앗기고 동생 둘은 굶다시피 했다.
“하녀장님!! 하녀장님!!”
“넌 또 웬 소란이냐?!!”
그 소란에 하녀 하나가 달려왔다.
“그것이······.”
하녀장의 귓속에 소곤거리는 하녀.
“허업. 뭐라고?!!”
“급히 가 보셔야 될 것 같아요. 지금 시녀고 하녀고 다들 난리가 났어요.”
리안이 데려온 손님중 신센롬 제국 이 황자가 끼어 있으니 당연했다.
음식부터 시작해 시중의 수준을 최대로 높여야 했다.
하녀장이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 따윈 없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베아티에!”
그녀는 베아티에를 한 번 노려보고는 급히 하녀를 따라갔다.
운이 좋은 것은 그녀였다.
“베아티에 괜찮아?!”
샤로트 베리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려는 찰나 하녀가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보다 제 동생이······.”
동생의 등을 밟고 있는 것은 기사 복장을 한 사내였다.
그는 비열한 웃음으로.
“이 시간에 허락 없이 궁전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각오하고 그랬겠지?”
“그것이··· 흑흑··· 동생이 아파요. 누나아아~~으어어엉!!”
“뭐 어?! 베츠가?!”
막냇동생은 이제 겨우 다섯 살.
생활 환경이 좋지 않았기에 작은 병에도 취약했다.
“거기까지.”
그때 기사가 베지미르의 등을 밟은 채 검을 뽑아 베지미르의 목에 가져갔다.
칼날이 살에 살짝 닿아서 핏물이 살짝 흘러내렸다.
“왜··· 왜그러세요. 기사님.”
“베아티에. 내게 기사님? 그냥 기사님이라고 했나?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가?
기사인 내가 겨우 밑바닥 하녀인 너에게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 고백을
거절하는 건가?”
“그것은······.”
기사와 베아티에 사이에 뭔가가 있나 보다.
아니. 안 봐도 어떤 상황인지 뻔했다.
“이봐요. 기사 아저씨.”
“오오. 샤로트 시녀. 안 본 사이에 많이 이뻐졌네. 마침 잘되었어. 혼자보단
둘이 좋겠지?”
샤로트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리안의 체면 때문에 겨우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를 구하고 싶다면. 베아티에와 함께 내 숙직실로 찾아와라. 네 기둥
서방인 그 얼빵한 꼬맹이와 달리 참된 어른의 맛을 보여 줄 테니.”
결국 멍청한 기사는 샤로트의 봉인을 풀고 말았다.
그녀를 모욕하는 것은 백 번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절대로 모욕해선 안 될 사
람을 언급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