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046
리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놈은 조져서 될 놈이 아니야.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간 앙심만 품을 뿐.’
이곳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지나다니던 성의 고용인들도 조용히 멈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놈에게는 강하게 나가기보단 유약하게 보이는 게 유리하겠어.’
자고로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마구 흔들거나 방심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첫째는 자존심이 높아 보이는 인물.
괜히 흔들어 봐야 둘째처럼 기가 죽기는커녕 반발심만 생긴다.
“그래서 시녀를 내게 넘길 터냐.”
“그···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보다 크··· 큰형님.
샤로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리안의 소심한 척하는 모습을 본 부선장은 경악했다.
해적왕에게는 귀여운 손주처럼 굴더니.
이번에는 동네 양아치에게 삥을 뜯기는 불쌍한 소년 같았다.
‘다중인격 같은 저 영악한 꼬맹이 녀석······!’
실제로 첫째 일리언도 거기에 넘어갔다.
씩씩대던 것이 금방 가라앉았다.
나름 쓸만할 것 같다만은 냄비같은 저 성미가 문제다.
용맹하고 기사도를 반스푼 탑재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첫째도 그렇고. 둘째도 그렇고. 쟁쟁한 후계자들이 식민지 전쟁에 끌려가 다
죽고 하자가 있는 두 놈만 남았다.
하자가 있어서 살아남은 건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이 놈들을 버릴수도 없다.
“응?! 더 중요한?”
“미래에 형수님에 관해서요. 이··· 이건 둘째 형님에게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
입니다. 두 분··· 민감한 문제라 여기선 좀 그렇고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를······.”
갑작스러운 리안의 말에 호기심이 생긴 두 형제는 바로 근처의 빈방으로 들어
갔다.
“샤로트 넌 남아.”
“힝··· 네에······.”
샤로트는 첫째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남겨 뒀다.
“리안. 네 뒤에 그 사람은 뭐냐.”
형제는 부관이 없이 홀로 들어갔지만, 리안의 뒤에는 부선장이 따라붙었다.
“아··· 그. 제 부하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흠··· 뭐. 상관없으려나. 그래서 형수라는 건 무슨 말이더냐. 별로 쓸데없는
일이라면 혼날 줄 알거라.”
첫째 일리언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리안은 속으로 콧방귀를 끼었다.
뒤에 있는 부선장의 실력이면 형제가 힘을 합쳐 둘이 동시에 덤벼도 충분히
제압할 거다.
그동안 워낙 쟁쟁한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렇지 부선장도 어디 가서 빠지는
실력은 아니다.
무려 완숙한 중견급 대전사이니.
“그게. 옆 영지인 줄리아 데르 영애 말이에요. 후계자로 유력한.”
“응?! 레이디 데르가?”
“데르?! 아일리 섬 최고의 미녀!”
두 형제 모두 호기심이 확 올랐다.
리안도 자~알 알고 있다.
이 둘 모두가 줄리아 데르에게 매우 관심이 높다는 사실을.
그건 게임에서도 확인한 사실이다.
뭐. 아일리 섬에서 그녀를 사모하지 않는 남자는 없지만.
적령기의 남자 귀족들은 한 번쯤은 그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쓴다.
앞의 두 형제도 그랬고.
뭐. 어쨌든.
고대에서부터 ‘삼각관계’나 ‘연적’은 ‘비극’이란 녀석과 가까운 친구 아니었
던가.
이들의 우정은 시대가 바뀐다고 세계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도 아주 끈끈한 관계일 터.
“그래서 줄리아가 뭘 어쨌다는 거지?”
“이··· 이 곳으로 오는 길에 잠깐 만났었습니다.”
“네가?!”
“네. 길을 막고 은밀히. 아주 은밀히 저를 불러서는.”
‘은밀히’란 단어 선정에 두 사람의 집중도는 더 높아졌다.
“이걸 좀 보십시오.”
리안이 품에서 조심스럽게 줄리아 데르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가문의 문장과 함께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줄리아 데르라고 수놓아져 있는.
“그것은!”
“아니. 네가 왜 그걸 가지고 있느냐?!”
형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아주 눈알이 빠지겠네. 흐흐.’
성격이 정반대처럼 보였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형제는 형제랄까.
전혀 다른 생김새인데 표정은 아주 판박이다.
“그것이··· 두 분 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줄리아 데르 영애께서 혼기를
놓친 것을.”
리안의 말에 두 형제는 앞다투어 줄리아 데르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혼기를 놓친 것이 아니다. 마땅한 배필을 못 만났을 뿐이지.”
“맞다. 귀족가의 여식이 후계문제로 일찍 결혼은 한다지만, 그것 하급 귀족들
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고위 귀족일수록 선택의 폭이 넓지만, 유아 사망률 때문에 아주 자유롭지는
않다.
이왕이면 빨리 혼약을 맺고. 성인식이 끝나면 결혼을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후계자가 안정되지 않으면 외세에 언제든 흔들릴 수 있기에.
영지민들도 자신들의 영주가 빨리 후계를 낳아야 안심을 한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줄리아 데르님 영애님은 두 분 형님들 중
에서 한 분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계십니다.”
“뭐?!! 우리 둘 중 한 명을?”
“이럴 수가! 내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리안은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형님들 대단해요! 이런 표정?
아무리 소심한 아이라도 뭔가 대단한 일이 생기면 솟아오르는 기분을 숨기지
못하는 듯 리안의 얼굴이 딱 그 짝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연기다.
“우리 아트로네와 데르(더블린)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 결혼 동
맹이 성립되면 잉글슨 왕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거예요!”
이것은 합병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백작가끼리의 결혼 동맹은 당연하게도 후계자는 제외다. 이유는.
“그걸 잉글슨 왕국에서 허락할 리가.”
“맞아. 녀석들이 우리 아일리 섬을 통제하는 것은 힘의 균형을 맞춰서 그런
거라고.”
리안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리아 영애께서 해결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후작!”
“뭐?! 후작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두 백작가를 합병해서.
“대영주가 되면 되는 겁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두 형제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우리 아트로네 백작가는 아일리 섬을 대표하는 전통 귀족. 반면에 데르 백작
가는 잉글슨 국왕에게 봉토를 받아서 새로 잡은 친 잉글슨 백작가죠.”
원래는 그 지역은 더블린 백작가가 있던 곳.
그들은 예전 잉글슨의 복속 전쟁 중 멸망했고 그 자리에 지금의 데르 가문을
앉힌 거다.
“두 가문의 결합은 아일리 섬과 잉글슨 왕국의 화합을 뜻하는 겁니다. 그리되
면 아일리 섬은 더 이상 식민지 취급이 아니라 속국이 되는 것이구요.”
리안의 설명은 장황하고 뭔가 그럴싸했다.
다만··· 결코 그럴 리가 없다.
그게 가능했다면, 잉글슨 왕국에서 진즉에 그리 했지.
그들에게는 착취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물가를 낮춰 본섬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지지를 높이기 위해서.
아일리 섬이 딱이지 않은가.
하나의 땅덩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좁은 해협을 두고 있는 가까운 거리.
착취 후 운송 거리도 짧고. 반란을 진압하기도 쉽고.
인종과 문화권은 미묘하게 조금 다르니 양심의 가책 또한 줄일 수 있다.
이보다 완벽한 식민지가 어디에 있으랴.
“이것은 오래전부터 데르 백작가에서 은밀히 작업 중인 내용이라고 들었어요.
사실 그들도 잉글슨 본섬 귀족이 아니라 노르드 야만 부족이었으니까.”
리안의 추가설명은 더 그럴싸했다.
데르 백작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개연성을 설명하는 것이니.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돼요. 비밀이 새어 나가
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까. 줄리아 영애께서 신신당부를 했어요.
두 분만 알고 있으라고.”
“우··· 우리만?”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두 형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은 양쪽을 끈끈히 이어 주는 마음의 붉은 실이랄까.
다만.
“할아버지도 알고 계신 사실이더냐.”
“아니에요. 할아버지도 알아선 안 돼요. 아직 은밀히 작업 중에 있는데, 할아
버지까지 끼이게 되면 복잡해질 수도 있다고 해요.”
“하긴. 할아버지가 아신다면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지.”
“그래. 데르 백작가 쪽도 정신이 없을 테니······.”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도 상의하기 힘들어요. 지금 데르 백작이 성지 순례 중이라고 떠들어 대
지만, 죽기 전에 이걸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서 잉글슨 왕국의 총리를 은밀히
만나러 간 겁니다.”
순례길 중간에 총리와 마주치긴 했다.
아··· 주··· 잠깐 사우나에서 인사 정도를 나눴을 뿐이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래!!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한 달 전 이야기라 분명 소문이 돌기는 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잠깐 이상한 찌라시가 나돌기도 했다.
그냥 으레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십거리였을 뿐이었지만.
“그러니 할아버지께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조만간 데르 백작가에서
언질을 줄 예정이니.”
형제는 궁금했다.
백작도 모르는 일을 후계자인 자신들에게······.
“그보다 우리에게는··· 왜에······?”
“형님 두 분이 당사자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손수건을 받아 온 것이
고요. 영애께서도 이것을 줄 당시에도 두 분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었어요.”
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 줄리아.”
“형님. 줄리아 데르는 제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시죠.”
“뭣?! 내가 아트로네의 적장자이거늘 무슨 소릴. 줄리아와 결혼할 사람은 나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졌다.
절세 미녀라는 줄리아 데르뿐만 아니라 후작 작위가 함께 딸려 올 예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식민지의 후작이라지만, 본 섬에 가면 백작들보단 위에 설 수 있다.
그동안 본 섬 귀족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물론 후작이 되어도 본 섬 후작에게는 비비지 못하겠지만 그게 어디란 말인가.
아무리 욕심이 없는 사람도 당연히 눈이 돌아 버릴 상황.
“그 손수건을 내게 넘겨라. 리안.”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 저건 제 겁니다. 몇 년 전에 줄리아 데르 영애와 밥
도 먹고 다 했습니다.”
“난 술도 먹었다.”
그냥 줄리아가 남성 편력이 심할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해 이리저리 찔러 보며 반응을 즐겼을 뿐.
“닥치거라! 후작이 되어 아일리 섬을 지배하는 사람은 당연히 내가 되어야 한
다!!”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한 첫째가 언성을 높였다.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화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여튼 저 성미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 텐데.
리안은 훗날 두 사람을 진짜로 후작을 만들어 줄 고민도 하고 있었다.
일단 가족이라고는 얼마 없으니.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친족을 대영주로 앉혀 놓을 필요가 있다.
허수아비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너무 수준 미달인데······.’
일단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그만들 하세요!”
“리안! 당장 손수건을 내게 넘기지 못할까!!”
결국 첫째가 윽박지르며 리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지만.
치이이익!!
어떤 기운에 부딪히며 수증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의 속성인 부선장이었다.
“두 분 모두 그만하시지요. 홧김에 공들여 놓은 일을 엎어 버릴 참입니까?!
그럼 데르 영애님과의 결혼 동맹도 물거품이 됩니다.”
“그··· 그대는······?”
“저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리안 레온님을 모시고 있는 제랄드 트라몰이라고합
니다.”
부선장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보였다.
가문의 징표였다.
“트라몰이라면!!”
“저 아래에 있는 올몬드 백작령의 옛날······.”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아주 게을리하지는 않은 모양.
올몬드와 트라몰은 과거 아일리 왕국. 그러니까 지고왕이 다스리던 그 시절의
소왕과 봉신이었다.
“후작이 되기 위해선 더 많은 하위령이 필요할 것인데 <랜스터> 지역 전체를
아우르게 될 것입니다.”
랜스터는 아일리 섬을 십자가로 그었을 때, 오른쪽 아래에 해당하는 전체 1/4
지역이다.
이는 대충 아트로네, 더블린, 오스라거, 라인스터. 거기다가 올몬드까지를 합
한 것으로 이 정도 규모라면 공국으로 독립해도 될 수준이다.
리안의 거짓말은 부선장이 등장함으로써 신빙성을 더하며 완성도가 높아졌다.
“그··· 그렇구려.”
“트라몰의 후손까지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니······.”
부선장은 정중히 부탁했다.
“두 분 모두 자중하시길 바랍니다. 다투지 마시고 두 분께서 잘 협의해서 누
가 데르 영애님과 결혼할 것인지 정하세요. 그때 리안 도련님께서 손수건을
넘겨 드릴 겁니다. 그전에는 당연히 리안 레온 님께서 보관하실 것이고.”
그 선장에 그 부하라고.
부선장은 한술 더 떠서 두 사나이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