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038
레오폴트는 납치된 지가 좀 되다 보니 가족이 더 늘었다고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같은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하겠지만.
“명목상으로는 여제께 드리는 선물이지. 요.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리안은 그리 말하고서 아기상을 세이나에게 넘겼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기상을 받아 땅에 내려놓고는 기도를 올렸다.
우우웅~
뭔가가 귓가에 올리는 것 같다.
환청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노랫소리 같기도 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봄이 온다. 봄이 곧 온단다. 아이들아 봄을 준비하거라. 이제 차디찬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온단다. 우리에게 봄이 온단다.
담담하지만 포근해지는 기분··· 이······.
“아니라니까!!!”
퍽!!
리안은 달려가 아기상의 면상을 걷어찼다.
그러자 노랫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그 틈에.
“모든 봄을 관장하는 어머니 여신 에오스이시여. 부디 조금만 더 기다리시길.
기나긴 겨울은 아직 지나······.”
세이나는 부정하며 아기상을 달랬다.
채찍과 당근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아닌가 싶다.
쪼르르르.
일그러진 아기상에의 얼굴이 이슬이 맺혔다.
“한 대 처맞았다고 울기는··· 이래서 애새끼들이란. 후~”
리안은 그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역시 전쟁의 신을 모시는 세이나 혼자 힘으로는 아기상의 힘을 누르는 데 한
계가 있었다.
전쟁의 신 탱글은 참으로 하자가 많은 신이다.
“저기요! 할아버지.”
리안은 곧장 촌장에게로 다가갔다.
“서··· 선장님···!! 부디 자비를. 절대로 의도해서 반항한 것이 아닙니다. 무
지렁이인 놈들입니다.”
주변에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마을 주민들이 보였다.
다행히 해적들이 심하게 다루지는 않아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압니다. 그보다 상태들이 많이 안 좋군요.”
아주 피골들이 상접을 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은 못 봐 줄 정도.
“고기를 잡으러 먼바다도 나가지 못했고. 상행을 가려고 해도······.”
밭농사나 겨우 지을 법한 어촌이다.
그 밭농사도 소금기 때문에 재배할 만한 작물도 별로 없고 수확량도 적었다.
곡물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로 가야 하는데, 아기상 때문에 가지 못했다.
결국. 적은 양의 생선으로만 연명해야만 했다.
“세바스 아저씨.”
“찾으셨습니까? 선장님.”
“네. 보급품 절반을 마을에 반출하세요. 그리고 쿠커 아저씨에게 요리를 해서
마을 사람들을 좀 먹이라고 전해 주고요.”
“네······?!”
세바스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평소 품격 있는 그였지만, 지금 명령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아무리 신사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해적은 해적.
“구호 활동을 좀 할까 합니다.”
해적이 약탈하기는커녕 구호 활동을 하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
“해적에게 구호 활동은 납치입니다. 선장님.”
그렇다.
해적들은 가난한 마을의 주민들을 만나면 의무적으로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납치해서 노예로 파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내리는 최고의 자비이자 구호 활
동이다.
“저는 아일리 섬의 귀족입니다. 이 땅 역시 아일리 섬의 일부이고요. 뭐. 부
두를 부숴 버린 것도 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음··· 선장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반출된 보급 비용은 선장
님의 활동비에서 일부 제하겠습니다.”
‘으··· 짠돌이.’
“아마도 제 사비에서 제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다시 공짜로 보급품이 생길
예정이라.”
아마도 그냥 내버려 두고 가버린다면, 마을의 1/3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
그나마 초반에 이 마을에 왔기에 이 정도다.
게임을 플레이할 땐 거의 유령 마을에 가까웠다.
와아아아아!!!
음식을 뿌리자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다.
갑판의 위에서 그걸 내려다보던 리안에게.
“애송이. 영웅이 되기로 한 거더냐.”
항법사가 다가와서는 물었다.
그의 눈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알면서 그러시네.”
“그렇지. 여기 사람들을 길잡이로 쓸 생각인가 보군. 부선장의 땅을 찾아 줄
생각이지?”
“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죠.”
부선장의 고향인 트라몰 남작령은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의 주민들에게 굳이 아량을 베푸는 이유다.
“자. 이제 갑시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네요.”
“먼저 들어가 일러 주겠네.”
항법사는 뒷짐을 지고 선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땡~ 땡~
복귀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들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가자······!?”
“우오오오???”
해적답게 복귀하는 것도 빨랐다. 빈손이라 더욱.
약탈의 기본은 빠른 하선과 승선이 좌우하니 당연하달까.
“선장님. 인원 점검이 끝났습니다.”
"네. 이제 떠나죠."
세바스의 보고에 리안은 의자의 뒤를 잡고 자연스럽게 수정구를 돌렸다.
“띠리리리~ 리리~ 리리리~”
입으로 후진음을 내면서.
쿠웅!
부두를 부수고 한참이나 마을 쪽으로 들어왔던 고잉미샤호가 뒤로 천천히 이
동하기 시작했다.
주민들 입장에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야 정상이겠지만, 그들은 환호했다.
“만세!!! 리안 레온 백작 만세에에!!!”
해적이니 해적단이니 하지 않고 리안의 본명을 연호했다.
특별히 성까지 알려 줬다.
백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다들 백작이라 불러 줬다.
이미 리안의 생존은 이번 전쟁으로 알려질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서 브루타뉴 공국에도 그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해전이 벌였던 장소와 그다지 멀지도 않으니.
“이제부터 더블린까지 직행입니다.”
“보급은······?”
“대충 빵으로 때워요. 어차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부선장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공짜 보급을 위해서 최대한 굶을 필요가 있다.
***
데르 백작가가 통치하는 항구 도시 더블린.
육지 쪽으로 깊게 들어간 만 형태의 천연 요새이자 아일리 섬에서 가장 큰 항
구이기도 하다.
샤아아아~
그곳에 해적 깃발과 하얀 깃발을 동시에 올린 해적선이 항구 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뭐야?! 해적?”
“대놓고 해적 깃발을?”
해적이라고 해서 항구를 이용하지 못할 것은 없다.
다만, 아일리 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구답게 해적이 대놓고 드나들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해적들은 이런 큰 항구를 이용하지 않을뿐더러, 이용한다 해도 해적
깃발은 내려놓고 적당히 눈치를 보며 들어온다.
찰싹. 찰싹. 쿵.
그런데, 저 특이하게 생긴 해적선은 아주 대놓고 부두의 한복판으로 들어와
배를 댔다.
척! 척!! 척!!!
항만관리자는 급히 병력을 꾸려 고잉미샤호의 앞에 섰다.
해적 깃발을 끝까지 내리지 않은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
끼리리릭!
고잉미샤호의 옆면에서 판자가 내려왔다.
그 위로 계급장이 없는 스랑 해군의 고급진 영관급 재킷을 코트처럼 입은······.
“꼬마?!”
그 뒤로 건장한 사내들이 뒤따른다.
“뭐 하는 놈들이냐?!!”
항구 측의 병력은 지금도 계속 충원되고 있었다.
양쪽은 긴장감으로 팽팽했으나.
“본의 아니게 소란을 일으켰네요. 헤헤.”
꼬마가 항만관리자를 향해서 환하게 웃어 보인다.
“뭐··· 뭐냐?! 너희들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 바로 흉악한 해적 놈들이다.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보네요. 흐흐.”
대도시에는 마법 통신 시설이 있다.
다만, 통신선처럼 스스로 좌표를 통해 장거리 통신을 하지는 못하고. 수도에
서 먼저 연결을 해 줘야 쌍방 통신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수도에서는 주기적으로 대도시나 대영지에 통신을 걸었다.
아마도 리안의 소식은 아트로네에만 전해졌을 거다.
해국 제독 -> 수도-> 아트로네.
아트로네는 리안의 외가로 더블린 바로 옆의 영지였다.
“여기. 해군 제독께서 직접 발급하신 통행증입니다.”
사실 리안은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굳이 해적 깃발을 걸지 않고 조용히 들어와 통행증을 제시하면 소란 없이 끝
난 일.
쓸데없이 일을 키운 거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이목도 집중되었다.
‘이거 너무 관심종자인가··· 크흐흐.’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귀족은 명성과 관심을 먹고 사는 족속들.
리안도 이제 관심과 명성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해적 깃발을 내리지 않은 것은 고의였다.
돈을 들이지 않고 존재감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일 대장부가 아니었다.
‘이왕이면 공격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더블린 측에서 적당히 빌미를 잡을 행동을 해 주길 기대도 했지만, 항만
관리인의 대처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병력은 준비하되 선을 넘지는 않았다.
“허어업! 대제독께서 직접?”
통행증을 받아본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등급이 특급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던 것.
“보급을 좀 부탁드릴게요.”
리안이 중간에 보급을 하러 들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특급 통행증을 가지고 있다면, 무상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다.
‘흐흐. 내 활동비가 줄지는 않겠네.’
지급은 당연히 발행처에서 후불로 지급되지만······.
일부는 보급을 준 도시에서도 부담해야 한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승인을 받아 오겠습니다.”
참고로 부유함은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무한 에너지가 아니라 주기적으로 마석을 공급해 줘야 한다.
마석은 상당히 비싼 에너지원인데, 그걸 공짜로 보급받게 생겼다.
당연히 항구 측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관광이나 좀 하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레온 공자님.”
항만 관리인은 상대가 해적이라지만, 일단 예를 갖췄다.
애초에 특급 통행증을 가진 자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리안을 떠올렸던 것이다.
바로 옆 동네 아트로네의 주인이 바로 리안의 외조부였기에.
“부선장 아저씨. 선원들에게 내일까지 휴식을 주세요.”
“놈들이 좋아하겠군.”
우오오오오!!!
반응은 곧장 왔다.
고잉미샤호의 선원들은 눈알이 뻘겋게 변해서 항구로 뛰쳐 들어갔다.
“넌 뭘 할 거냐?”
“어차피 보급은 세바스 아저씨가 최대로 뽑아 먹을 거고. 저는 갈 곳이 있지
요. 아참. 작은어머니는 잘 있으려나. 감시를 붙여서 시집 안 간 레이디가 좋
아할 만한 목걸이나 하나 사 오라고 하세요.”
“응?!”
***
항만 관리인은 급히 대저택으로 달려갔다.
관리청이 아닌 대저택으로 간 이유는 이 항구의 책임자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 아가씨 계십니까?!”
그 최고 책임자는 파트라슈 데르 남작.
더블린 백작령의 막내딸이었다.
“무슨 일이야? 끄어억!”
입에는 하얀 크림을 잔뜩 묻힌 채 트림을 하는 100kg을 가뿐히 넘기는 여인.
그녀의 손에는 항상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아트로네 백작가의 외손자가 찾아왔습니다. ”
“응?! 아~ 그 귀엽게 생긴 아이. 그 애 고향으로 떠나지 않았어?”
리안이 고향인 레온 백작령으로 떠날 때 이곳 더블린 항에서 배를 탔다.
“웬 해적 놈들과 함께 왔습니다······?”
“납치라도 당한 거야?”
“아니요. 해적이 된 것 같습니다.”
뭔가 이야기가 아리송했다.
그녀는 크림이 잔뜩 묻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남작님!! 밖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그때 시녀가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대충이나
마 닦아 준다.
“무슨 손님?”
“리안 레온이라 밝힌 소년인데··· 아트로네 백작이 자신의 외조부라면서···
막무가내로······.”
밖이 꽤나 소란스러웠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쩌렁쩌렁 내지르는지 지나가는 행인들이 다 쳐다볼 지경.
“파트라슈 영애! 나 리안 레온이 열렬히 사모하는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문을 좀 열어 주세요.”
당연히 그 커다란 소리는 안에도 들렸다.
“푸우우우우!!!!”
초코케이크를 우물거리던 파트라슈 남작은 그대로 뿜어 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때 아주 잠깐 얼굴을 본 것이 다였다.
“마··· 만나 봐야겠다.”
“아가씨. 안 됩니다. 지금 이 꼴을 하고서는.”
“저대로 세워 둘 수는 없지 않느냐!”
그녀는 얼굴이 시뻘게 변해있었다.
“그럼 옷이라도······.”
“어차피 여기 항구에서 내 돼지 같은 꼴을 모르는 사람도 없거늘. 괜찮다. 도
대체 무슨 저의로 나를 저리도 농락하는지 알아봐야겠다.”
그래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리안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겨우 몇 살 차이가 아니다.
극복하지 못할 나이는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설사 유부녀라 할지라도 사모할 수는 있다.
지지한다는 뜻을 남녀 관계일 땐 사모한다는 정도로 표현할 때도 있고.
특히나 여왕이나 여자 영주에게 기사들이 그런 표현을 잘 쓴다.
다만, 아트로네 백작가와 데르(더블린) 백작가는 서로 앙숙 관계다.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에 많은 관세가 부과되어 아트로네 백작령의 물가
상승에 지대한 원인을 끼치기에.
최근에는 그 관계가 험악해져 영지전이 일어날 뻔도 하지 않았던가.
아트로네의 가문의 사람이 데르가 사람의 누군가를 지지나 사모 따위를 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
“들여보내거라.”
“네··· 아가씨.”
일단 만나 보기 전에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