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035
대제독의 표정은 아주 흡족했다.
‘아주 좋아 죽네.’
잉글슨 왕국은 이제 리안을 적당한 패로 쓸 생각일 거다.
지금 해전은 미궁으로 빠져 버렸다.
운이 나쁘면 스랑 제국에 있는 잉글슨 국왕의 직영지인 노르디망-앙쥬 공작령
의 내전으로 확전될 수도 있고.
그때 시선 분산용으로 리안을 브루타뉴 공작령에 밀어 넣으면 딱일 거다.
“듣기로는 신센롬 제국의 황자를 호송한다고?”
“네.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외가의 깃발을 빌려서 갈 생각입니
다. 황자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우리 쪽에서 외가에 미리 말해 주지. 갑자기 찾아가면 그쪽에서도 당황할 테
니. 그리고 통행증은 해군 사령부로 해서 바로 발급해 주겠네.”
리안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약발 제대로 받았네.’
이걸 위해 두 포로를 그냥 넘겨준 거다.
아마 포트의 동기 라이코가 눈치가 제법 있는 모양이다.
리안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입을 털었을 터.
“감사합니다. 대제독.”
그렇게 악수를 하고서 대제독의 개인실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샤로트가 볼을 빵빵하게 하고는 리안의 뒤로 붙었다.
“이 아이가 대전사라고 들었네. 대단하군.”
“제가 부하 복이 좀 많은 편이죠.”
기함으로 넘어온 부하 두 명 모두 대전사다.
그 외에 고잉미샤호에는 4명의 대전사가 더 있다.
용병들로 일반 병사의 숫자만 좀 채워 넣으면 완벽하다.
물론 리안은 그 돈을 자신이 댈 생각이 없었다.
싱긋.
그런 의미에서 대제독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자네가 땅을 찾을 때가 되면 우리 잉글슨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야.”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그걸 믿는 것이 병신이긴 하지만, 용병을 고용할 돈 정도는 줄 거다.
이상하게도 섬나라들은 찔끔찔끔 지원해 주고 생색내는 것이 특징인 듯하니.
그러면서 남의 나라에 이리저리 찔러 보는 것을 좋아한다.
잉글슨이 딱 그런 형태의 국가이고.
찰캉. 찰캉.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고잉미샤호는 대제독의 기함 옆에 고정되어 있었다.
독대를 하던 사이 나무 판으로 다리를 놓았다.
돌아갈 땐 모양 빠지게 부선장의 어깨를 빌리지 않아도 될 듯싶다.
“아무리 봐도 자네의 능력이 탐난단 말이지.”
헤어지기 전에도 대제독은 리안의 얼굴에 금칠을 해줬다.
그의 눈에는 고잉미샤호의 갑판에서 해체 중인 철갑상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맛을 다시기까지.
“혹시 쓰실 데가 있으신가요? 그냥 있길래 잡은 거라.”
부함장의 가보 때문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잡긴 잡았는데, 진짜로 쓸데가 그리 많지 않다.
철갑상어가 잡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잡으면 그 부산물의 양이 제법
많다.
“저번 전투로 장교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네.”
많이 죽긴 죽었지.
그리되도록 리안이 설계한 것이다.
최소 1/5은 갈려 나갔을 거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 때문에.”
“아니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해군은 제해권을 잃었을 거야. 이번 전투
에서 양쪽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덕분에 신대륙 쪽은 우리가 유리하게 되었어.”
신대륙의 식민지 패권에서 밀리고 있던 잉글슨이다.
그런데 이번 전쟁으로 골치 아파진 것은 스랑 제국.
그들은 3개의 바다를 가지고 있었고 이번 전쟁으로 곳곳에 구멍이 송송 뚫리
게 되었다.
이걸 메꾸기 전에는 신대륙의 함대에 충원이 힘들어질 예정.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혹시 생도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은
건가요?”
“어찌 알았나? 자네 나이에 이런 것까지 예측하다니.”
이미 자기 입으로 말했으면서 호들갑이다.
장교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고.
“아마도 조기 졸업을 시켜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국왕께서도 나름 체면을
세우셔야······.”
그래서 검이나 한자루씩 만들어 주고 싶은 거다.
문제는 재료다.
“한 자루 분량을 빼고 전부 넘겨드리겠습니다.”
“고마워. 정말 고맙네. 값은 제대로 쳐 주겠네.”
특별한 재료는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다른 재료로 만들어서 나눠 주면 차별을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거고.
“가~조옥 같은 사이끼리 어려움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죠.”
잉글슨과는 절대 가족이 될 수없다.
아일리 섬의 외가는 잉글슨 왕국의 식민지. 브루타뉴 공작령에 있는 레온 백
작령의 여론은 스랑 제국에 오히려 가깝다.
결국 잉글슨과의 관계는 점점 우하향으로 깎이는 일만 남았다.
리안이 잉글슨이 크게 이기지 못하게 판을 짠 것도 그 이유고.
“해체를 도와주지. 그쪽으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리안은 인사를 하고 고잉미샤호로 옮겨탔다.
철컥! 철커덩!
이후 해군의 카락급 한 척이 고잉미샤호의 옆면에 붙었다.
“호오··· 진짜로 꼬마가 선장이라니······.”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멀리서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에는 거대한 참마도(말을 벨 때 쓰는 칼)를 걸치고 있었다.
해군 군복의 단추가 아무렇게나 풀어져 있었고 어깨에는 소령 계급장이 얹혀
있다.
“오오오!! 발골의 신! 이미거저 베그즈언 소령님 아니십니까?!”
리안은 멀리서 그를 보고는 날래게 뛰어왔다.
설마 하자니 그가 올 줄이야.
“날 아는가? 내 이름은 이미거저 베그즈언이란 이상한 이름이 아니라 이밀 벡
젼이네.”
“아. 죄송합니다. 하하. 제가 원래 브루타뉴 쪽 방언이 심해서··· 헤헤. 어리
니까 봐줘요~.”
“그런 것치고는 율 대륙 표준어가 유창한데······?”
율 대륙 언어는 총 세 가지 종류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대중 언어인 율 표준어.
뭔가 여러 가지를 섞어 놓은 짬뽕인 언어다.
두 번째는 귀족들이 선호하는 스랑 제국의 표준어.
세 번째는 왕족이나 사제들이 의식을 위해 사용하는 고대 제국의 롬 표준어.
배우기 매우 어렵다.
참고로 신센롬 제국은 과거 제국의 롬 제국에서 따온 국명이다.
“이미거저 베그즈언이 더 멋있지 않나요?”
“거참. 남의 이름으로 장난치는 거 아니다. 아직 애군. 허허허.”
이밀 벡젼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리안도 그의 성격을 알기에 친해지기 위해서 괜히 장난을 친 것이다.
사실 이미거저 베그즈언은 유저들끼리 붙인 별명이다.
-개발자들 네이밍 센스 완전히 구림. 이밀 백젼만 봐도 그래.
-맞음. ㅋㅋㅋ. 이거 풀어서 대충 읽으면 이미거저 베그즈언~
-임꺽정? 백정?
-헐. 너무 대충 짓는 거 아님?
리안도 저 글에 댓글을 달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참고로 이밀 벡젼의 집안은 거슬러 올라가면 백정 집안이다.
어쩌다 자신의 영주를 구해서 기사가 되고 또 어찌어찌하다 보니 세습 귀족이
되었다.
여전히 대우를 못 받지만 그래도 해군에 영관급 장교를 배출했고.
여기까지였으면 딱 좋은 스토리겠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앞으로 벌어질 신센롬 제국의 내전.
그때 스랑 제국에서 잉글슨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잉글슨 왕국 내부의 반란
세력을 지원해 준다.
어쩌다 보니 이밀 백젼의 가문이 말려들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도 반군의
편에 선다.
거기서 이름도 떨치는데······.
그의 엔딩은···? 사형이다.
“어쨌든 우리 동네에선 아저씨가 유명해요. 제 외가가 아일리 섬의 귀족이거
든요.”
“그래? 하긴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하지. 내가 한 일이 있으니.”
보기에 험상궂게 생겨서 그렇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반군에 가담해서는.
“더블린(아일리 섬 동쪽 백작령)에 기근이 들었을 때 아저씨가 소 백 마리를
한 번에 도축한 영웅담은 유명해요.”
“내가 기부한 소는 열 마리밖에 안 된다. 다른 소들은 다른 사람들이 준비한
거야.”
“그게 어디예요. 모르는 척했던 본토 귀족들과는 다르잖아요.”
그의 가문은 잉글슨 본토의 서쪽에 위치한 웨일즈 문화권이다.
잉글슨을 통일한 쪽은 섹슨 문화권이고.
이해하기 쉽게 통일 이전에는 백제와 신라 정도의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쪽 귀족인 그가 소 10마리를 끌고 바다를 건너와 그런 행사를 했던
거다.
광대 노릇까지 해 가며.
“어쨌든 아저씨는 제 영웅이에요.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게 꼭 말해요.”
“하하하. 무슨 일이 있으려고. 내 배는 군함이라기보다 고래나 잡으러 다니는
포경선이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다.
군함이긴 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고래를 잡아서 향유를 왕실에 납품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부하들도 군인보다 해적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에이.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저 그런 해적 선장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거물이에요. 그러니까 약속해요.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제게
도움을 받는다고.”
“으으음··· 뭐. 알겠다.”
얼떨결에 손가락을 건 이밀 소령.
“그럼 잡담도 오래 했겠다. 일을 해 볼까?”
“아참. 제일 좋은 부위는 따로 떼어 주세요.”
“어디에 쓰려고. 사용처에 따라서 좋은 부위가 달라지는 법이다.”
그는 철갑상어를 훑어보았다.
“창으로 만들 거예요. 저 아이가 쓸 거라.”
리안이 턱짓으로 샤로트를 가리켰다.
“꺄아아아~ 너무 재밌다.”
탐망대의 기둥에 밧줄을 묶어 두고 빙글빙글 도는······.
“도련니이이임~!”
“아··· 씨. 눈 마주쳤네······.”
리안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음··· 저 여자아이가 쓸 거라고?”
“성인용으로 창을 만드는 양으로 맞춰 주세요. 좀 미친년은 좀 그런가··· 어
쨌든 저래 보여도 대전사예요. 화염 속성이고.”
속성의 힘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위력이 떨어진다.
물론 샤로트가 워낙 재능충이라 실물이 없어도 엄청난 위력을 보였지만.
“그··· 렇군.”
아마도 제대로 된 무기가 있다면 더욱 무시무시해질 거다.
“전투 스타일은 화려해요.”
“그래 보여.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군. 그렇다면 탄력이 좋은 꼬리
부위가 좋겠어.”
과거에는 소 잡는 백정이었고. 지금은 포경함(?)의 함장이지만, 철갑상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리안이 인사를 하자 그는 어깨에 걸친 거대한 참마도를 내렸다.
단지 그뿐인데 기세가 대단하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우오오오오!!!”
그의 부하들이 함성으로 응답했다.
투다다닷!!
그는 순식간에 철갑상어에게 달려가.
슈우우우욱!!!
등지느러미를 따라 크게 그었다.
마치 그 모습은······.
“장인이 회를 뜨는 거 같네······.”
예술의 경지였다.
참고로 철갑상어의 등 비늘은 마포의 공격도 받아 낸다.
샤샥~! 샤샤샥!
리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넋을 놓고 그걸 바라봤다.
참으로 탐나는 인물이다.
저 인물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 있어야 할 사람.
육상 전투는 연대 단위로 테르시오를 구성하여 맞붙는 것이 유행이다.
그 밀집 된 연대에 저 괴물이 떨어지면 어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콕콕!
그때 누군가 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도련님.”
“으아악! 깜짝이야. 제발.”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눈 마주쳐 놓고. 아닌 척하기 있기예요? 그냥 대놓고 보셔도 되는데.”
“아니야. 네가 쓸 무기 때문이라고!”
그 말에 샤로트는 눈을 반짝인다.
“아아. 역시 도련님밖에 없어요. 정령 갑옷도 과분한데··· 그리고 징표 하면
창이죠!!”
무슨 무기를 징표로 주고받냐.
“우리 지역에 유명한 일화가 있잖아요. 전쟁에 나가는 낭군을 위해서 머리를
잘라 창끝에 깃을 만들어 줬다는······.”
민담이 있기는 있다.
뭔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기는.
“개뿔! 그건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거고. 그리고 창이 아니라 창끝에 기이이
이··· 헙!”
이미 샤로트의 손에는 리안의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흐흐흐! 역시 도련님께서 절 그렇게나 생각해 주시다니······.”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꽃밭으로 가득해 보였다.
“으으으······.”
리안은 급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더러워서 빨리 각성하든지 해야지.
뭐. 각성한다 해서 샤로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느 부위가 제 거인가요?”
“꼬··· 아니다. 넌 몰라도 돼.”
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위가 꼬리인 것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숨겨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