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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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잘 알고 있었다.
“협상인가 보네요. 흐흐.”
[귀신 같은 꼬마군. 그래서 리안 선장. 원하는 거라도 있나? 협상 자리에 참
석하게 해 주겠다.]
어찌 보면 파격적인 대우다.
협상 자리에는 최소 대령급 이상만이 자리에 겨우 참여할 예정.
물론 해적왕 측도 주요 간부들만 겨우 구석 자리를 허락받을 뿐이다.
그런 자리에서 세력이라고는 배 한 척이 전부인 어린 선장이 참여하다니.
“원하는 것이라기보단 원하는 목이 있죠.”
살려 두기엔 뒤가 찝찝한 놈이 하나 있긴 있었다.
당연히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패가 필요하다.
“예배실에서 레오폴트를 데려와 줘요. 호위로는 샤롯을 데려갈 거구요.”
잠시 후 레오폴트는 선교로 올라왔다.
“서··· 선장님. 찾으셨다고······.”
녀석은 눈을 살살 굴리며 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일국의 황자라기에는 너무 볼품없는 태도.
“에휴··· 뭐가 이리 꾸부정하냐. 허리 펴!! 어깨도!”
“네?! 네넵.”
리안의 호통에 즉시 명령을 이행하는 레오폴트.
“레오폴트. 데뷔전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의 얼굴을 알릴 때가 왔다고.”
“네에에?!!!”
레오폴트는 그 말에 겁을 먹어서.
“꼬맹이··· 이놈 선 채로 기절했는데?”
***
낭트 항의 앞바다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부서진 배,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비명 소리.
스랑 제국과 잉글슨 왕국 모두 소모전만 강요하는 전투를 더는 이어 갈 수 없
었다.
함선들은 빠르게 소모되어 갔다.
-공들여 온 해군이······.
해군은 하루아침에 키울 수 없는 법.
함선은 그렇다 치고 숙련된 수병들을 키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이겨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것이다.
끼걱! 끼걱!
잉글슨 왕국의 기함으로 해적왕과 함께 보트를 타고 넘어가는 길.
출렁거리는 작은 보트에는 겨우 몇 명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해적왕 할아버지. 잉글슨 측에서 저를 데리고 오라던가요?”
“아까 전 해무가 꼈을 때 작전을 입안한 사람을 데려오라는 잉글슨 왕국의 강
력한 요청이 있었다.”
원하는 목이 없었다면, 딱히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해군들 사이에 유명해져서 좋을 것 없기 때문.
전쟁만 끝나면 경찰과 도둑으로 만나지 않겠는가.
“나도 이번 협상에 리안 네 녀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요?”
“이대로 소모전을 계속하면 우리 연합 측이 질 거다.”
그래도 약간의 희망.
리안이 판을 만들었으니 리안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했을 터.
특히나 해적왕은 리안이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배짱을 튀길지 말지가 제게 달렸군요. 이거 두근두근한데요? 흐흣.”
양측 군대는 서로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국가의 자
존심이 문제.
결국 서로 물러서려면. 미세하게 불리한 잉글슨 쪽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로 끝까지 갈지도 모른다.
그 끝이 파멸뿐이라 하더라도.
또르르르~!
해적왕과 리안이 탄 보트가 잉글슨 왕국 기함의 도르래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
이미 도착한 주요 인물들도 꽤 있었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붉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대령 이상급 회담이라지만, 대령들은 한쪽에 겨우 찌그러져 있었다.
“그 아이인가?! 처음에 우리에게 명령을 내린 녀석이?”
말을 꺼낸 자는 잉글슨 왕국의 대제독 네이자르였다.
샤로트 베리가 대제독에 오르기 전까지 잉글슨 해군을 책임졌던 자였다.
-무슨 애들이 세 명이나.
-선장은 꼬맹이라 들었는데, 저 뒤에 둘은 또 뭐지?
주변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대제독.”
“어리군. 어려.”
그는 리안을 신기한 듯이 훑어봤다.
처음에는 어린 선장이 지휘를 했다기에 해적왕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해적왕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럴 사이도 아니고.
“그래도 한 배의 선장입니다. 대제독님.”
해적왕이 대제독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거 실례가 많았군. 3급선을 타고 있다면, 최소 영관급인가?! 겉모습만 보
고 판단한 것을 사과하지. 그건 그렇고 우리가 끝까지 전투를 치르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리안 선장.”
그는 자세를 고친 다음 리안에게 물었다.
확실히 결례였다.
같은 소속이라 할지라도 그럴 진데, 다른 소속의 선장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3급 신형 전함의 주인라면 더욱이.
“생각하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겁니다. 이 정도 규모에선 기교 따위로
승패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대제독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양측 모
두 지치기까지 한 상황입니다.”
리안은 적당히 시치미를 뗐다.
자신이 지휘를 한다면 적당하게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능력이 너무 눈에 띄게 된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잉글슨 왕국에서 자신에게 눈독을 들일지도 모르고.
러브콜을 거절하기에도 부담스럽다.
자신의 외조부가 아일리 섬(잉글슨 왕국령-식민지)의 백작이기에.
어찌 보면 자신의 피 반쪽은 잉글슨 왕국의 소속되어 있었다.
“내 생각과 같아. 확실히 아까 전 해무가 꼈을 때 명령을 내린 게 리안 선장
그대가 맞나 보군.”
“딱히 대단한 걸 한 것은 아니고 부하들과 열심히 기록을 해 놨을 뿐입니다.
설마 해무가 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헤헤.”
리안은 적당히 자신을 깎아내렸다.
거기다가 칭찬하는 상대를 향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어줬다.
‘눈독 들이지 마라. 난 제독이 아니라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잉글슨 왕국의 대제독 네이자르는 깨어 있어도 엄청나게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아이인 리안에게 정중하게 의견을 묻는 것만 봐도 보통 사람과는 결이 다
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훗날 샤로트 베리를 등용해 차기 대제독으로 만드는 것도 네이자르의 작품이다.
“그렇군.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나. 쯧.”
잉글슨 왕국의 기함이 서서히 전장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상대측의 기함인 특급 전열함도 중심으로 향했다.
끼리리릭! 덜컹.
두 배는 천천히 접선했다.
양측의 인사들은 서로 마주한 채 갑판에 서 있었다.
당연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스랑 제국의 이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잉글슨 왕국의 대제독이 먼저 예법에 맞춰 인사를 했다.
그에 이 황자 클로도는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하고.
“그대의 지략과 통솔력에 감탄했다네. 그리고 운도 좋더군.”
정도로 받아 줬다.
이 정도면 저 미친 황자 쪽에서도 많이 양보한 것이다.
원래라면 전투 중 정비를 위해 서로 물러난다는 선택지 따위는 생각하지 못하
는 놈이니.
그만한 실력도 있고.
물론 육전이 전공이지만, 훗날에는 바다에서도 준수한 지휘력을 보인다.
“네. 운이 좋았습니다. 거기서 해무가 낄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만 휴전
을 하라는 바다의 신 메살 님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대의 왕국이 노디르망과 앙쥬 공작령을 포기한다는 건가?”
그에 잉글슨의 대제독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땅은 선대께서 여왕께 물려주신 적법한 땅. 그건 애초에 소장이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 실무자들끼리 의논하도록.”
그리 말하고는 스랑 제국의 이 황자는 선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그가 이번 해전에 참여한 이유가 바로 그 노디르망과 앙쥬 때문.
황태자가 아니었기에 그 땅을 얻으면 자신의 것이 될 거라는 계산이 섰다.
원래는 스랑 제국의 영토였지만, 노르드 부족장 중 한 명에게 봉토로 내줬고.
이후 전쟁으로 그 땅이 잉글슨의 왕족 중 한 명의 소유가 되었다.
그것이 다시 승계에 승계를 거듭하다 보니 지금의 잉글슨 국왕에게 승계되어
복잡하게 꼬여버린 것.
다시 말해 노디르망의 공작이 잉글슨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으며 개판 오 분
전이 되어 버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디르망 공작 시절 세금을 스랑 제국에 내 왔던 것도 골
치 아픈 문제다.
어떻게 보면 잉글슨 왕은 스랑 제국 황제의 신하이지만, 외부에선 한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로 동등하게 되어 버린다.
(잉글슨은 스랑을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같은 왕으로 봄.)
결국 지금 이 전쟁은 저 개족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벌어진 것.
어떻게 보면 내전인데, 또 어떻게 보면 국가 간의 전쟁이다.
“오랜만일세. 네이자르.”
이제 실질적인 실무자인 대제독 간의 대화가 남았다.
“네. 이렇게 바다에서 마주 보는 건 5년 만이던가요? 포틀랑 공.”
양측 대제독은 서로 아는 사이로 보였다.
두 사람의 인사에서 이미 이 만남 이전에도 한 판 붙어 본 사이 같이 느껴졌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해무 속에서 병력을 움직이고 말이야. 항상 위치를 기
록해 놓다니. 많이 치밀해졌어.”
그렇지 않고서야 갑작스런 해무 속에서 어떻게 함부로 함선을 움직일 수 있었
겠나.
물론 그것은 고인물인 리안이 한 짓이었지만.
“뭐. 그 정도는 해야 제독이라 불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잉글슨 대제독 네이자르의 답은 일종의 조롱이었다.
너희는 제독만 세 명에 대제독까지 총 네 명이 참전하지 않았느냐고 까는 것
이었다.
확실히 잉글슨 왕국과 스랑 제국의 해군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크흠. 그건 됐고. 포로 교환 후 병력을 이만 물리게. 이대로 전투를 계속할
생각은 자네도 없지 않은가.”
“포로 교환은 추후에 하시죠. 재판을 받아야 할 놈들이 있어서 지금 당장은
곤란합니다.”
이게 핵심이었다.
리안이 배신한 해적왕의 부하들과 노르드 해적들을 한쪽으로 몰아 버린 바람
에 꽤 많이 소탕되었다.
잉글슨 쪽은 그들을 포로로 잡았고 내어 주고 싶지도 않은 거다.
포로 교환을 나중으로 미뤄서라도.
“흥!! 그거 너무한 거 아니요. 우리는 그저 용병으로 참여했을 뿐인데!!”
배신한 해적 중 한 명이 발끈했다.
저쪽 대표 중에선 배신의 주동자인 검은 수염 플랑크도 있었다.
꼴이 좋지 않았는데, 제법 해전을 거칠게 치른 모양.
그나마 포로로 잡히지 않아 이번 회담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배신을 한 놈들을 그냥 풀어 주면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지.”
“해적이라고 무시하나 본데, 우린 그저 군사 작전을 했을 뿐이오.”
플랑크의 해명.
용병이 사정에 따라 창을 거꾸로 드는 일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먼저 비밀 계약 된 스랑제국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주장.
애초에 용병은 그다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고 속은 놈이 잘못이라는 개논리
를 시전하는 거다.
이번 일로 서해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의 신용도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다른 걸 다 떠나서 문제는 잡은 배신자들을 모두 풀어 줄 경우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스랑 제국의 후원을 받아서 두고두고 잉글슨 왕국을 괴
롭힐 게 뻔했다.
“흐흐흣.”
그때 리안이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웃었다.
-누가 웃는 거지?
-저 녀석 같은데.
-이런···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는 나이라지만.
-어린아이를 협상 자리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었어.
여기에 모인 자들은 모두 한가락 하는 선장들.
아무리 조용한 웃음이라도 이상 행동을 하는 리안을 눈치채고선 시선이 모였다.
“굳이 다 잡을 필요는 없죠. 가장 명예롭지 않은 한 놈만 조지면 체면은 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
리안이 잉글슨 대제독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는 한발 양보해야 하는 입장.
사실 리안에게는 잉글슨 왕국이 전쟁 이후 괴롭힘을 받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방법이 있나? 리안 선장.”
“저에게 맡겨 주시죠.”
리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당연히 플랑크는 리안을 알아봤고.
“꼬맹이!!!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나대는 거냐! 꺼져라.”
플랑크가 리안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바다에서 절 보면 후회할 거라 경고했었죠?! 재기발랄함이 특기라고 했을 텐
데.”
“그래서. 네놈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어려서 모르나 본데. 이대로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그 말에 리안은 싱글벙글 웃었다.
“전투에선 이겨도 전쟁에서는 패하겠죠.”
“무슨 개소리더냐.”
리안은 뒤로 팔을 뻗어 레오폴트의 목덜미를 살짝 잡아끌었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정중하게.
“그 이유는 너 때문이다. 이 변태 놈아. 당연히 이분을 기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