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029
해적왕이 살아나서 외곽의 부대와 합류한다면, 싱겁게 전투가 종료될지도 모
른다.
난장판인 상태라 서로 몸을 사리며 한 발씩 물러날 확률이 높다.
정비를 핑계로.
아마도 해적왕이 앞장서서 길을 터 주겠지.
포위는 풀릴 것이고 양측 군대는.
‘[’ 만
‘=’ 양군 대치.
‘[=’ 모양으로 대치하게 될 것이다.
서로 물러나기 좋게.
물론 그 과정에서 연합 측의 피해가 더 클 것이다.
[뭐?! 음··· 뭔지 모르겠지만. 넘겨주지.]
그 말 직후.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뭔가가 고잉미샤호의 갑판으로 날아왔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
“해··· 해적왕······!”
선원들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전열함과의 거리는 제법 멀었는데, 그걸 단번에 넘어온 것이다.
끼이이익!
선교의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네. 하하하.”
그는 옆구리에 마법사 하나를 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드는 의문.
‘바람 정령 갑옷도 아닌데?’
해적왕이 계약한 속성은 물.
더군다나 정령 갑옷을 입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단번에 날아왔다.
오롯이 피지컬만을 이용해서.
‘괜히 소드 마스터가 아니네······.’
리안은 등에서 땀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3인칭인 게임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드 마스터 ‘아무개’가 12번 전함에 난입했습니다.
라는 문구가 전부.
거기에 –23··· -12··· -10이라는 선원 피해와 가끔.
-핵심 캐릭터 ‘거시기’가 사망하였습니다.
이런 텍스트를 띄워 주곤 했다.
그걸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함을 떠나서 적이 아닌 것이 다행이
라 느껴졌다.
“하하하. 리안. 이제야 나에게 존경심이 드는가 보군.”
그걸 느꼈는지 해적왕이 크게 웃었지만, 리안은 금방 떨쳐 버리고.
“에잇. 빨리 코드나 넘겨요. 마법사랑 수정구만 보내지.”
“어린 녀석이 이렇게나 정이 없어서야.”
해적왕은 바닥에 턱 하니 주저앉았다.
그의 위상에 비해 살짝 볼품이 없다고 해야 하나.
“거프 아저씨. 그냥 여기 앉으쇼.”
부선장이 선장석을 권했다.
참고로 리안이 조타석에 앉아 있었기에 항상 공석이었다.
선장석은 각종 마법이 걸려 있어서 조타석처럼 밖을 훤하게 볼 수 있었다.
번외로 낮잠을 자도 될 만큼 의자도 고급품이라 안락했고.
“그럴 수 있나. 황제가 와도 그 자리는 오롯이 선장의 것이지. 난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봐.”
콸콸콸.
그는 허리춤에서 커다란 술병을 꺼내 입으로 털어 넣었다.
배신을 당한 것 치고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인다.
“마법사 삼촌. 정리는 끝났어요?”
리안은 그런 해적왕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 으··· 조금 복잡하긴 한데··· 괜찮아.”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끝내죠.”
“으··· 응.”
리안은 한 손으로는 조종 수정구를 다른 한 손에는 메모 된 종이를 봤다.
거기에는 점이 찍혀 있었고 그 점이 어떤 배인지 표시되어 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높은 언덕에서 그저 구경만 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기록했다.
“자자. 그럼 불러 드릴 테니 전달하세요. p-23번 함. 남서 방향으로 50미터
이동. 적과 조우 시 전투 허가. 단, 보고할 것. p-71번 함. 북동쪽으로 120미
터 이동 후 대기. p-42번 함······.”
리안은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명령을 내렸다.
역시 모니터로 보다가 종이에 대충 점이 찍힌 것으로 하려니 머리가 조금 지
끈거리긴 했지만.
“도대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쪼르르르······.
해적왕은 먹던 술을 반쯤 질질 흘렸다.
입을 다물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 놀라 굳어버린 것.
“아까 언덕 위에서 열심히 정리해 놨죠.”
“해무 속에서 어떻게 움직일 줄 알고······.”
“당연히. 레이더가······.”
설명할 틈도 없이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이더의 존재를 모르는 해적왕은 오해했다.
적의 움직임조차 예측했다고.
[여기는 p-24번 함. 적과 조우. 적의 함선명은······.]
해무가 꼈다고 해서 완전히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코앞까지 다가가면 보인다.
그래서.
펑!! 퍼어엉!! 펑!펑!!
간헐적으로 마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교전이 재개된 것이다.
“에효. 말 걸지 마세요. 헛갈리잖아요.”
리안은 신발을 벗고 급히 수정구에 발을 올렸다.
조종은 손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각. 사각.
손에는 종이와 팬을 들고서 열심히 수정했다.
레이더에 잡히는 점들과 비교하며.
“으으으. p-81번 함 이동시켜요. p-92번 함은 함급이··· 코그급? 젠장, 교전
하지 말고 서북으로 쭉 빼고······.”
진형을 다잡기 시작했다.
해무는 곧 걷어질 것이다.
그전에 최대한 아군에게 유리한 진형으로 짜 놔야 한다.
특히나 배신한 놈들을 한쪽으로 몰아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그리고 잉글슨 쪽은 아직?!”
“와··· 왔어. 잉글슨 제독과 연결되었어. 어찌 된 것이지 묻는데?”
“그냥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세요. 해적왕 할아버지 이름 팔아서.”
“어··· 어.”
그러는 도중에도 고잉미샤호는 전진했다.
그 뒤로 전열함은 졸졸 따라왔고.
“해적왕 할아버지. 그만 가 보세요. 곧 전투예요.”
이제 암초 지대를 완전히 벗어나서 외곽에 포위를 형성한 아군과 합류하기 직전.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다.
“이거 손님 대접이 영 시원찮군.”
“우유라도 한 잔 드릴까요?!”
리안은 뒤로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거참. 됐다. 녀석아. 가자.”
“네. 선장님.”
마법사가 해적왕에게 다가가자 아까 전처럼 옆구리에 끼고선 선교를 나갔다.
그리고는.
펑~! 휘이이이익!!
다시 날아서 자신의 배로 돌아간다.
다시 봐도.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네.”
***
본인이 몰라서 그렇지 막상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다.
이 상황 자체를.
“이건 괴물의 농간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제국의 이 황자 클로도는 주변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그럴 것이 해무가 걷히자 전장은 완전히 개판이 되었고. 교묘하게 잉글슨 왕
국이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
그뿐인가.
배신한 해적들과 노르드 해적들은 구석에 몰려 집중포화를 당하는 중.
“해적왕!! 해적왕은 어디에 있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해적왕의 상태가 더더욱 중요해졌다.
다 필요 없고 해적왕만 잡으면······.
“저··· 저기!! 저기에 있습니다.”
특급 전열함의 함장이 손으로 가리켰다.
해적왕의 기함은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만’의 외곽을 포위하고 있는 해적들
에게 합류한 상태였다.
“무슨··· 어떻게. 어떻게 저기까지 간 것이지?”
해무가 꼈다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
여전히 만의 입구는 스랑 제국의 함대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으니까.
입구를 지나갈 때 누구라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
특급 전열함의 함장은 말을 하지 못했다.
제국의 함선과 마주치지 않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통곡의 길(암초 지
대)’뿐이었다.
펑!! 퍼어엉!!!
그 와중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이 포위망을 좁혀 옵니다!!”
방금 전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에게 포격을 하던 녀석들이었다.
포위망만 겨우 유지한 채.
그런데······.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특급 전열함은 함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황자가 있지만, 사실상 이 전쟁의 지휘관은 그였기 때문.
해군 장관급인 대제독이다.
지금은 철부지 이 황자의 옆에서 손바닥을 비비고 있지만······.
“젠장!!! 전열을 다시 짠다.”
“그게 너무 얽혀 있어서······.”
연합과 제국 둘 모두가 발을 뺄 수 없는 상황.
만 안쪽의 상황은 참으로 교묘했다.
전력은 제국이 유리한데, 진형은 또 연합이 유리했다.
배신을 한 해적들은 교묘하게 몰려서 몰살을 당하는 중.
밀어 넣었던 돌격함(이지포를 다수 탑재한)들도 고립되어 두들겨 맞는 중이다.
그렇다고 본대를 밀어 넣자니 이번에는 밖에서 포위한 채 멀뚱히 구경만 하던
연합군이 문제다.
“도대체 어떻게··· 방법이 없나? 대제독!”
철부지 이 황자는 그제야 특급 함장에게 제대로 된 호칭을 붙여줬다.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 쪽이 미묘하게 우세합니다.”
‘네놈이 간섭하지 않으면.’
“좋다. 맡기지.”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황자 전하!”
대제독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라면 황태자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
그러나 상식은 정상인에게 찾아야 하는 법.
눈앞에 놈은 미쳤다.
***
리안은 제국 해군의 움직임을 보며 아쉬워했다.
“쯧. 그놈이 참견을 안 하나 보네.”
이왕 병력을 직접 움직인 것 유리하게 전투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이다.
그런데, 적의 움직임을 보니 이 황자가 걸려 주지 않았다.
“아직 그놈에게는 이 바다가 너무 어려운가.”
S-급 지휘관.
상대로 만나면 생각보다 무시무시하다.
사실 SSR급이든 S급이든 종이 한 장 차이.
둘이 붙여 놓으면 SSR급이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이 게임은 변수투성이니까.
“누굴 말하는 거지? 지금 스랑 제국의 대제독은 포틀랑이란 놈일 텐데.”
대제독조차도 그가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 없다.
고집을 꺾었다가 괜히 일이 잘못되면 자리보전도 힘들 것이다.
특히나 이번 전쟁은 대제독이 재무부에 고개를 숙여 가며 예산을 따냈다.
덕분에 이 황자라는 혹을 달고 오게 된 것이고.
“그런 놈이 있어요. 진짜 포악하고 무서운 놈이.”
아직 해상 전투의 오묘함을 모르는 녀석이다.
캐릭터가 S급이라 해서 처음부터 S급은 아니다.
특성도 육전에 몰려 있다.
“자. 이제 휴식!”
리안은 조종구(수정구)에서 발을 뗐다.
다른 배들과 함께 포위망을 좁히지 않았다.
“뭐··· 뭐야?! 참전하지 않는다고?”
“정신력 고갈이에요. 이 정도 했으면 됐지. 조타수는 마구 부려도 되는 마도
구가 아니라구욧!”
“그럼. 명령이라도······.”
부선장도 사실 리안의 지휘력을 보고 귀신을 보듯이 했다.
설마 하자니 종이에 끄적거려 놓은 걸로 수백 척이 맞붙는 전장에서 일일이
명령을 내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리안의 속마음은······.
‘바둑 기사들은 눈 감고도 잘만 하더만······.’
자신은 천재가 아닌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저 일개 고인물일 뿐.
“이미 제 손을 떠났어요. 해무가 사라진 이상 잉글슨 왕국은 우리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혹시나 몰라 이쪽 명령을 따라 준 것이다.
이제 해무가 걷혔으니 잉글슨 쪽에서도 충분히 지휘를 할 여건이 되었다.
해적왕과 해적들은 그저 용병일 뿐.
오히려 이제는 고용주인 저쪽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럼. 해무를 계속······.”
“발동 조건이 까다로워서 안 돼요.”
야누스의 심장은 자신을 반경으로 설정된 현상을 유지하려는 기질이 있었다.
다만 위치가 이동하면 서서히 그 설정이 풀려 버린다.
리안이 언덕 위에 한참이나 대기했던 것이 그 이유.
야누스의 심장 위치가 이동한 이상 해무는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이제 서커스나 보고 빵이나 먹죠.”
“그건 또 무슨 신선한 개소리냐? 서커스를 보는데 빵이 왜 나와.”
“그건 또 그렇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하면 알아들으시려나.”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어쨌든 고잉미샤호는 관전 모드로 들어갔다.
펑!! 퍼버버벙!!
싸움은 치열했다.
양측의 생각은 똑같았다.
-물러나고 싶다! 간절히.
문제는 먼저 빼는 쪽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는 것.
결국 서로 눈치를 보며 의미 없는 소모전을 이어 나갔다.
“활활 타는구나. 뀨하하하!!!”
리안은 아주 기뻐했다.
스랑 제국도 적이지만, 잉글슨 왕국도 미래의 적이다.
아니. 모든 나라가 리안의 적이었다.
적들의 함선이 이만큼이나 줄었다.
“슬슬 끝나 가는군. 준비해야겠네.”
양측 모두 거의 절반에 달하는 전력이 전투 한 번으로 녹아 없어졌다.
바다에는 수많은 수병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양측 지휘선이 하얀 깃발이 올라왔다.
“건져!! 빨리!!!”
상황이 그리되자 살아남은 배들은 바다에서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물에 빠진
자들을 건져 냈다.
이것은 뱃사람들의 전통이었다.
-나도 빠지면 누가 구해 주겠지.
라는 믿음과 신뢰에서 오는 것.
설사 물에 빠진 자가 해적이라 해도 일단 건져 주고 본다.
물론 그 뒤에 사형이겠지만, 다행히 이 전투는 해적이 아니라 용병 취급을 받
는다.
[꼬마! 내 배로 넘어와라.]
그때 해적왕에게서 통신 마법이 들어왔다.